검향 74화
序章
미치도록 시린 겨울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은 곧바로 서리가 되어 얼굴을 때렸다.
이런 혹독한 날씨에는 근처의 토박이 사냥꾼들조차 함부로 나서지 않건만 청년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가 온전치도 않은 몸으로 눈 덮인 설산(雪山)을 오르는 이유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청년은 그 때문에 지난 3년 간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절대 마르지 않을 것 같던 돈이 밑바닥을 보일 만큼 사라졌고, 결국 본가인 서가장으로부터 우려 섞인 경고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뒤늦게 상재를 보이는 중인 청년은 본가에서 내려온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하오문과 개방에 쏟아부은 돈들이 모두 사람을 찾기 위해서 쓰인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가문이 벌이는 사업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정보들도 많이 얻었다.
작금의 세상은 몹시도 혼란스러웠고, 상인이란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돈을 버는 법이었다.
덕분에 지금 서가장은 섬서를 비롯하여 호북과 하북은 물론이고 남궁세가의 텃밭인 안휘에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그러자 본가에서도 더 이상 청년의 행사에 간섭을 하지 않았다.
호위무사도 아닌 충성스러운 하인 두 명 정도만 데려가는 이유는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이 처한 사정 때문이었다.
호위무사 또한 무인.
그들 입장에서 무인으로서 입신양명하는 길은 무림맹에 드는 길이 최선인데, 무림공적을 고발하는 것만큼 최선의 길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호위무사를 배제해야 했다.
“공자님, 찾는 분이 이곳에 계신 게 확실합니까요?”
청년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하인이 힘든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물어 왔다.
그러자 청년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왜, 힘드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옵고. 전에 가셨던 곳에도 없었고 그 전에 가셨던 곳에도, 그 전전에 가셨던 곳에도 없었는데…….”
“네가 걱정하는 바가 뭔지는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말거라. 만약 이번에도 없다면 나도 생각이 있으니…….”
청년도 지쳐 가던 차였다. 왜 그리도 그를 찾으려 하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악연이 커서는 선연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오히려 상대방은 무림공적이 되어버린 터라 그를 도우려는 상황이 알려지게 되면 상인으로서 상당한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 자명했다.
헌데도 늘 걱정스러웠고, 보고 싶었다.
‘삼 년이나 찾지 못했다는 건 결국 스스로 나오길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청년은 이번만큼은 기대심이 컸다.
지난 삼 년간 비슷한 자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면 다른 사람이거나 헛소문에 불과했으나 이번의 정보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기련산 기슭을 지나던 조그마한 상단이 녹림의 무리를 만나 위기에 처했고 그런 그들을 구해준 이가 독특한 무공을 썼다고 했다.
아니 독특할 것도 없다. 검기에서 향기가 나는 무공이 천하에 또 어디 있겠는가.
서가장의 청년, 서평은 아주 자신했다. 적어도 ‘그’에 대한 흔적 정도는 찾을 수 있으리라.
불편한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서평이 하루 종일 산을 오르며 겨우 도착한 곳은 석지(石地)라는 이름의 작은 계곡이었다.
그는 그곳에 이르자 서둘러 사람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누군가 살았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깊게 쌓인 눈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나?”
아쉬움에 한숨지을 때 하인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으…… 으아아아!”
이에 서평이 하인들을 향해 급히 다가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저, 저저저저…… 저기.”
산을 오르면서 불평하던 어린 하인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눈밭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평이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두터운 눈 속에 파묻힌 흐릿한 인형이 보였다.
손을 뻗어 조심스레 눈을 턴 서평은 그것이 사람의 시신임을 알 수 있었다.
“음…….”
작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시신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놀란 이유는 시신의 상태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렇게 말끔히 자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절단면이 깨끗했다.
당장 절단면끼리 붙이면 다시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깔끔했다.
시신을 더 살피던 서평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복장이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정규무사로군.”
정규무사란 무림맹에 파견된 타 방파의 무사가 아니라 무림맹에서 자체적으로 키우거나 영입한 무인을 뜻했다.
이들은 오직 맹의 명령에만 복종한다.
시신의 오른쪽 팔목 안쪽에는 천(天)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 문신은 분명 최정예의 천검단(天劍團). 이런 자가 이곳에서 죽은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닐 거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서평이 하인들에게 명했다.
“당장 주변의 눈을 치우거라.”
“네?”
“시체가 더 나올 것이다.”
“히익~”
처음 시신을 발견했던 어린 하인이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평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옆에 서 있는 나이 든 하인에게 명했다.
“일단 자네가 하게.”
“알겠습니다, 공자님.”
하인은 묵묵히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제대로 치울 필요는 없었다. 작은 계곡이라 하나 한 명이 계곡의 눈을 다 털어 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저 시신을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면 충분했다.
게다가 땅에 눈이 많이 쌓여 있긴 했어도 시신이 깊게 파묻혀 있지는 않았다.
그것인즉, 어느 정도 눈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살해당했다는 뜻이었다.
얼마 후 서평은 이 계곡에 자그마치 일백 명이나 되는 천검단의 시신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찾아 올라온 곳에 천검단의 시신이 잔뜩 있다?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시신의 상태였다.
“망설임 없이 한 번에 베였군. 극악한 살인자도 이렇게 망설임 없이 백 명의 인간을 베기란 힘든 일일 텐데…….”
지쳐서든, 질려서든 그도 아니면 죄책감이든, 적어도 검 끝에 흔들림은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시신들의 상흔은 하나같이 깔끔했다.
정황상 서평이 만나러 온 그 ‘누군가’가 저지른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무림맹이 ‘무림공적’인 그를 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헛걸음질은 하지 않은 것 같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한숨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초운…….”
그가 그렇게도 만나고자 했던 이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一章
3년여의 시간 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화산의 멸문을 시작으로 전통의 구파는 몰락하였다.
곽호의 사악한 계획에 의해 벌여진 구파와 육대세가 간의 암투.
그리고 화산파 출신의 새로운 마인과 한 명의 무림공적으로 인해 힘을 소모한 구파는 천상련의 강력한 호법신장들에 의해 차근차근 정복당했고, 수많은 본산제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운 좋게 위기를 벗어난 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맹과 무림맹에 속한 무림방파들은 구파를 돕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쳐 온 구파의 무인들을 쫓아내거나 회유하여 구파의 비기를 빼앗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허무하게 무너진 구파로 인해 정사간의 균형이 무너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내보인 무림맹의 행보는 그 같은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무림맹은 언제 그런 힘을 숨겨 두었는지, 강력한 팔천의 무인을 동원하여 천상련의 지부를 삼 할이나 격파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일의 선봉에 선 것은 바로 천중팔성(天中八星)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무인들이었다.
천상련이 자랑하는 구대호법신장에 대응하기 위해 무림맹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운 무인. 천중팔성.
그들의 힘은 천상련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파의 또 다른 거대 세력인 성천궁과 백월성이 손을 잡고 천상련을 견제하고 있던 터라 무림맹의 기습은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렇게 정사대전, 아니 천상련은 이미 무림에서 금기된 마인들을 양성한 것이 명백하였기 때문에, 과거 정(正)과 사(邪)가 힘을 합쳐 등천마교라는 마(魔)를 멸망시켰던 멸마대전이 새로이 시작되는 듯했다.
하지만 두 번째 멸마대전의 심지는 채 불이 붙기도 전에 꺼져 버리고 말았다.
서쪽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 무림맹의 지부들을 쳐부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사천의 방파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맹을 세우고 스스로 패도맹이라 칭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 패도맹의 제일적은 바로 무림맹이었다. 그렇다고 천상련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천상련 또한 적으로 선포하였다. 단지 무림맹을 가장 큰 적으로 인식한 것뿐이다.
하지만 이들 덕분에 천상련은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사파의 백월성과 성천궁은 눈물을 머금고 정예들을 뒤로 물려야 했다.
가장 강력한 동맹인 무림맹의 발이 묶인 이상 그들만으로 천상련을 어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삼 년이 흘렀고 천하는 셋으로 나뉘었다.
정파의 무림맹과 사파의 성천궁, 백월성이 동맹을 맺은 반천련.
그리고 사파의 최대 세력이자 마인들의 소굴이라 할 수 있는 천상련.
그리고 중원의 서쪽을 제압한 신흥 세력인 패도맹……
물론 이들을 한순간에 정리해 버릴 수 있는 개방이라는 대 방파가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들은 중원 내부의 다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세외의 침략을 경계할 뿐이었다.
구파가 몰락하고 무림맹이 사파의 두 세력과 손을 잡은 순간 이미 정사의 경계는 무의미해졌다.
탐욕스러운 늑대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 * *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었다…….
악몽이 분명하건만 괴로워 깨어나도 도무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너무도 행복했던 그 시절을 꿈꾸었던 것이 분명하리라.
다시는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꿈은 곧 악몽이 된다.
꿈속에선 너무도 행복했기에 깨어나면 느낄 현실의 불운함이 오히려 악몽과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는다.
“이보게, 운(韻)이. 이제 일어날 시간일세.”
이미 일어나 있었지만 어깨를 흔드는 손을 거부하진 않았다.
운이라 불린 청년은 조용히 일어나 자신을 깨운 중년인을 향해 인사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응? 자네 일어나 있었나? 괜히 깨운 건가?”
“아닙니다. 이제 일어났습니다.”
그의 대답에 중년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용직 표사라면 조금은 일찍 일어나는 게 좋다네. 정규표사 놈들이 눈칫밥을 주거든.”
걱정해 주는 게 감사했지만 고마움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중년인이 입맛을 다시며 멀어졌다.
다른 표사들을 깨우러 가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게 편했다.
자신을 좋아했던, 사랑했던 사람들은 늘 불행해졌다.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부님.
비참히 운명한 청연 할아버지, 그리고 황현 사형까지도…….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사람을 멀리했다.
더군다나 쫓기는 몸이기까지 하니 오다가다 만나는 이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보여 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만큼만 보여 주면 족했다.
몸을 일으킨 그는 밤새 얼어붙은 이슬을 옷에서 털어내었다.
모닥불은 어느새 꺼져 있었다.
초운이라는 본명 대신 남들에게 운이라 불리는 청년은 모닥불에 남아 있는 불씨를 발로 비벼 꺼트렸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과 같은 표사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좀 전에 자신을 깨운 중년의 쟁자수를 비롯해 불침번을 서던 표사들이 다른 이들을 깨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새벽녘의 어수선함 덕분인지 칠십 명이나 되는 표사들은 금세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