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73화
초운이 짧은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하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다.
“곧 좋은 구경을 하게 될 테니 그대로 누워 있으라구.”
그 말과 함께 천응의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실이 하나 흘러나왔다.
이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氣)가 유형화된 것이다.
실은 곧 황현의 피부에 닿았고 스스로 기맥을 찾아 스며들었다.
천응은 눈을 스르르 감고 낮은 음성으로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쓰러져 있던 황현의 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초운이 절규하듯 외쳤다.
“사형!”
하지만 초운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는다. 이미 천응에 의해 몸이 지배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요동치던 황현의 몸이 허공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자색의 연기가 몸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천응은 자색의 연기가 누에고치처럼 황현의 몸을 모두 감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의 실을 회수했다.
그는 마치 힘들었다는 듯이 과장된 표정으로 소매를 들어 이마를 닦았다.
“휴우. 다 됐다.”
그때 석운자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쳐라!”
와아아아---!
무인들이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넋 놓고 있다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천응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회안의 마인 제갈청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죽이지는 마, 제갈청. 좀 전에 말했지? 네 먹이가 아니야.”
제갈청의 심장 어림에서 나타난 붉은 기운이 마치 방패처럼 퍼지며 둘을 감쌌다.
캉-! 까강-!
무인들의 무기는 붉은 기운의 막에 의해 막혀 튕겨져 나갔다.
석운자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호신강기로군.”
진짜 호신강기는 아니었다. 마인들이 쓰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마공. 스스로 단련하여 얻는 무공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때문에 비슷하기는 해도, 지고한 무학의 깨달음이나 정순한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나타난다는 호신강기와는 근본이 달랐다.
그러나…… 그 위력만큼은 비슷했다.
석운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날리는 장력과 검기에도 끄떡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갈청의 호신강기 속에서 석운자를 바라보던 천응은 하품을 하는 시늉을 하며 그를 비웃었다.
* * *
석운자 덕분에 시간을 번 초운은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자색의 안개 속에 있을 황현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모래로 벽을 쌓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리 노력해도 안개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천응에 대한 공격을 실패한 몇몇 무인들이 하나둘씩 초운의 존재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있었지.”
“마인과 한통속인 놈…….”
그들은 초운 덕분에 목숨을 건졌던 일을 이미 잊어버린 듯했다.
그들이 지닌 모든 원망, 아니 절망이 초운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인의 손에 죽을 거. 네놈이라도 데리고 가야겠다!”
이러한 마음은 무인들의 가슴에 들불처럼 번져 가기 시작했다.
이는 천응이나 석운자조차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특히 석운자는 휘하의 무인들이 통제 불능에 빠져 버리자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말리고자 했지만 명분을 찾지 못했다.
천응과 제갈청의 능력을 몸으로 깨달아버린 이상 무인들은 살아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죽음을 앞둔 이들의 원망이 한 명에게 쏟아지는 것은 누가 말린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초운은 일 할도 남지 않은 공력을 운용하여 검을 들기 시작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천응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녀석이 벌써 죽으면 곤란하지.”
제갈청을 움직여 무인들을 제압하려던 천응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제갈청을 향해 말했다.
“아니, 일단 놔둬도 되겠어. 제갈청.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으니.”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초운을 둘러싸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행하던 무인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뚝 하고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반경 이 장 안의 모든 인간이 석상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이 장 밖의 무인들과 석운자는 이 기현상에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들의 귓가에 천응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도망치는 게 좋을 텐데.”
그 말이 신호라도 되었던 것인가.
치이이익-!
초운을 죽이려 하던 무인 중 하나가 발끝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으. 으. 으아아아악!”
그는 석상처럼 굳어 있긴 해도 입은 살았는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은 하나둘씩 전염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몸이 타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아아악!”
지옥 같은 고통이 그들의 전신을 휩쓸었다. 안타까운 것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력으로 심맥을 끊을 수조차 없었다. 몸이 굳은 것 자체가 심맥이 굳어버렸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혀를 깨무는 자도 있었지만, 피조차 끓어올라 증발하는 고통 속에서 혀를 깨무는 고통쯤은 유희에 불과했다.
그런 것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맨 처음 타오르기 시작했던 무인은 일다경이나 시달린 끝에 인간 형태의 재만 남아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이윽고 이 장 안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똑같이 재가 되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들이 남긴 재에서는 자색의 연기만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초운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가 되어버린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부서지며 죽어 가던 사형이 깔끔한 모습으로 멀쩡히 서 있었다.
초운이 그를 불렀다.
“사…… 형?”
하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길로 재가 되어버린 무인들의 ‘잔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왼손을 처음 보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한 듯 살펴보더니 곧 잔해 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인들의 재에서 피어오르던 자색의 연기가 모조리 그의 손바닥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켜보던 이들은 그가 그 연기로 무슨 짓을 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스으으으으으-!
“흡입…… 해?”
석운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황현은 왼손에 모은 자색의 연기들을 모조리 코를 통해 흡입하는 중이었다.
결국 모든 연기를 흡수한 그는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인들의 얼굴에 공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얼굴 그대로 물러섰다. 아니 도망치려 했다.
일류고수만 수백 명이다.
만약 죽기를 각오하고 개떼처럼 달려든다면 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황현 하나 정도는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마인에 대한 공포에 판단력을 잃어버렸다. 그냥 죽는 건 괜찮으나, 저런 식으로 고통스럽게 타 죽어 한 끼 식사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도주를 선택한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무표정하던 황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는 사냥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미소였다.
주저앉은 채로 그를 지켜보던 초운은 그 미소가 너무도 낯설었다.
지이이잉-!
곽호에게 잘려 나간 후 늘 비어 있던 오른팔 어깨 쪽에서 자색의 빛이 새어 나왔다. 짧은 순간 빛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팔의 형상으로 변했다.
기를 유형화시켜 팔의 형태로 만들어 낸 것이다.
기로 만든 오른팔을 이번에도 신기한 듯 살펴보던 황현은 오른팔을 수평으로 들어 도망치던 무인들을 향해 스윽 그었다.
그러자 손이 향하던 곳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모조리 굳었다.
못 해도 일백 명 이상의 무인들이 손짓 한 번에 굳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타올랐다.
“크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
처절한 비명들이 운태산 곳곳에 울려 퍼졌다.
초운이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황현의 다리를 잡았다.
“그만 두세요! 제발 그만 두세요! 사형!”
“…….”
황현은 자신의 다리를 잡은 초운을 내려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왼손을 쫙 펴서 초운의 이마로 가져다 댔다. 초운은 자신의 몸이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그 녀석은 안 돼.”
천응이었다. 그는 제갈청을 움직여 황현의 왼팔을 잡아챘다.
이에 황현이 싸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지?”
“음. 네가 그토록 지키려 한 사제라는 헛소리는 이제 통하지 않을 것이고…… 뭐 신마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유 정도론 충분하겠지?”
신마라는 한마디에 황현은 순순히 팔을 거뒀다.
그러자 제갈청도 천응의 곁으로 돌아갔다.
황현은 초운에게서 신경을 끄고 다시 무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저 손을 뻗기만 하는데도 도망치던 무인들은 몸이 굳고 불타올랐다.
그들의 절규가 초운의 귀를 찢는 듯했다.
천응이 굳어 있는 초운에게 다가와 말했다.
“잘 봐. 저 사람들은 너 때문에 죽는 거야.”
“…….”
“애당초 네가 저 황현이라는 녀석과의 ‘약속’을 지켰다면 녀석이 저런 괴물이 되었을까? 킥.”
초운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황현이 사람들을 불태우고 그 연기를 흡수하는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봤다.
알 수 있었다.
저기 있는 것은 이미 사형이 아니었다.
사형은…… 황현 사형은 죽어버리고 그 자리를 저것이 차지한 것이다.
끝 모를 죄책감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천응이 그런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킥. 그러게 마지막 순간에 정에 이끌려 검을 멈추다니…… 멍청하기 이를 데 없구나. 강호가 그토록 우스웠어?”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황현이 행하는 모든 살육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지켜볼 뿐이었다.
초운의 눈빛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 죽어 가고 있었다.
불과 일각…… 일각 만에 모든 무인들을 ‘먹어 치운’ 황현이 돌아와 천응과 함께 초운을 내려 보았다.
초운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황현은 그런 그의 턱을 쥐어 올리더니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했다.
“가장 맛있어 보이는데…… 아쉽군. 신마의 명이 없었다면 당장 먹어 치워 버렸을 텐데 말이야.”
“…….”
“눈빛도 이젠 제법이고 말이야. 한데 내가 아직도 네 사형인 줄 아느냐?”
초운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당신은 내 사형이 아니야. 아마도 마공이 만들어 낸 다른 인격이겠지.”
“아주 바보는 아니었나 보구나. 하지만 반만 맞았다. 녀석의 기억과 경험, 감정들 모두 내 것이니 이 몸 역시 황현이라 할 수 있지. 정확히는 녀석의 어두운 부분이지만.”
그의 말은 옳았다. 마성이라 해서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어두운 마음이 마공으로 인해 또 다른 인격으로 화한 것뿐이다.
때문에 황현이 자라 오면서 겪고 느낀 것들은 마성의 황현도 함께 겪고 느낀 것들이다.
그러니 마성의 황현 또한 진짜 황현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초운은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야.”
“후후.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지금의 난 지극히 행복하거든. 세상에 나오자마자 포식도 했고.”
힘을 갈망하던 어두운 마음은 마공이라는 날개를 달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는 죄책감도 양심도 없다. 그런 마음 자체가 우스울 따름이다.
“그만 가자. 신마께서 기다리실 테니.”
천응은 지루해졌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황현을 재촉했다.
황현은 초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초운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울컥해졌다.
아니라고 부정해 보지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사형의 것과 똑같았던 것이다.
“어때. 똑같지? 황현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작별 인사라고 생각해 둬. 그래도 ‘그 녀석’이 아꼈던 사제였으니까 해 주는 내 마지막 호의 같은 거다.”
초운은 그 작은 호의조차 거부할 수 없었다. 눈물이 다시 흘렀다.
초운이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땐 ‘약속’을 지킬게요. 사형.”
초운의 머리를 쓰다듬던 황현의 손길이 순간 멈칫했다. 그를 지켜보던 천응은 일순 긴장했다.
황현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갈등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초운을 죽이지 않았다.
그저 초운으로서는 처음 보는 아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재밌겠구나. 손꼽아 기다리겠다.”
그 말을 끝으로 황현은 등을 돌렸다. 천응 또한 제갈청의 등에 업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지만 때때로 고개를 돌려 홀로 남은 초운을 바라보았다.
초운은 차마 떠나는 황현의 등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초리를 타고 다시 한 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것이 황현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길 바랐다.
이날을 기점으로 천상련은 아홉 번째 호법신장을 받아들였고, 무림맹은 새로운 무림공적의 이름을 천하에 발표하였다.
무림맹의 총사가 밝힌 공적의 이름은 화산의 이대제자 출신으로 ‘초운’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