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70화
아들인 가주를 닦달하여 이번 연합을 재고하게끔 하는 게 어떤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과거, 장왕의 제자가 저의 제자를 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
“열두 살 어린아이 가슴에 장왕에게서 배운 장법을 때려 박은 놈이었습니다.”
당위룡이 인상을 찌푸렸다.
같은 육왕칠사라 하나 장왕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괴팍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 들었는데 제자 복이 없는 듯했다.
“그때 제자가 죽은 줄 알고 놈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자는 살아 있었지요.”
“음, 자네로선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장왕의 제자를 죽였다면 꽤 골치 아파졌을 테니까.”
적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그놈의 팔을 잘랐습니다.”
“……!”
장법이 특기인 무인의 팔을 잘랐다? 검사의 팔을 자른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장법을 구사한다는 장왕의 제자를 불구로 만든 것이다.
“제 목표는 뚜렷합니다. 사문이 멸문한 건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저…… 제자 녀석만 무사하다면 말이지요.”
“만약 다치거나 죽었다면 어찌할 텐가.”
적오의 눈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눈을 바라보던 당위룡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눈빛만으로 만인살 당위룡이라는 절대고수를 긴장시킨 적오가 다짐하듯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다쳤다면 똑같이 갚아 줄 것이나…… 만약 죽었다면…… 관련된 자들은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씹.어.먹.을.겁.니.다.”
이 말을 끝으로 적오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당위룡은 생각했다.
‘무림맹과 천상련은 아주 위험한 맹수를 한 마리 건드리고 말았구나.’
무림맹과 천상련 같은 대방파는 위로 갈수록 관료주의적인 성향이 남아 있다.
때문에 은원이 남더라도 정치적으로 합의가 가능했다.
하지만 적오는 달랐다.
도사로서의 면모는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가장 순수한 무인이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했다.
은인에겐 은혜로 갚지만 원수에겐 복수로 갚는다.
어떤 식으로든 해를 입으면 절대 용서치 않는 것이다.
스스로는 아직 깨닫지 못했을 것이나 이는 도사의 도(道)가 아닌 패도(覇道)의 한 갈래였다.
아마 자신의 패도를 알아채고 나면 더욱 더 뻗어 나갈 테지…….
‘청정한 도문의 제자가 패도지상(覇道之想)이라…… 화산에서 어찌 이런 상을 놓칠 수 있단 말인가!’
당위룡은 화산이 일검쟁패의 승패에 집착해 수십 년간 제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던 과거를 알지 못했다.
“그나저나 놀랍군, 패도지상이라 함은 패도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내하는 이기적인 존재. 그런 이가 자신의 성품을 바꾸게 만들다니…… 제자가 어떤 아이인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 * *
“정말 지루해.”
천응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짜증이 다 나는군.”
분명 자신은 새로운 씨앗에게 각성을 위한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도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저 황현이란 사내의 자아가 아주 강력함을 뜻했다.
반쯤 미쳐 버린 상태로 만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저 사내의 자아가 미친 것이지 마성이 껍질을 깨고 각성한 것은 아니었다.
“젠장…….”
지금이라도 나서 볼까 생각했지만, 섣불리 나섰다가 새로운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걱정되었다.
나설 거면 초반에 나섰어야지 지금은 너무 많이 진행된 것이다.
게다가 저 초운이라는 이는 곽호가 총애하는 자.
명도 없었는데 건드렸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천응은 한숨을 푹 내쉬며 산 아래서 미친 듯이 싸우는 두 사형제를 바라보았다.
콰아아앙---! 지지직---!
뇌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전격의 창이 초운이 서 있던 자리를 시커멓게 태웠다.
오행매화보의 잔영만이 자리에 남아 초운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신형은 이미 황현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황현은 반사적으로 등 뒤를 향해 전격을 쏘아 보냈다.
이를 초운은 검을 들어 받아 넘겼다.
하나 그 타격은 고스란히 내상이 되어 쌓였다.
“큭!”
초운이 뒤로 물러섰다.
‘들리지 않아.’
검의 목소리가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그의 경지를 설명이라도 하듯 검명은 여전했으나, 그가 듣던 처로의 목소리.
뭐랄까, 마음이 들려주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초운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는 당연했다.
곽호와 싸울 때 이루었던 경지는 자신의 진원지기를 고의로 깨트리며 일시적으로 증폭된 힘이 기(氣)와 체(體)를 일순 합일시켰기 때문에 일어났던 우연(偶然).
설사 지금 진원지기를 태운다 하더라도 다시 그 같은 우연이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우연이라고는 하나 초운은 그 절대의 세계를 직접 몸으로 느끼며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절정경임에도 절대경에 이르러 쓸 수 있었던 기술들을 어설프나마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거대한 뇌격의 창이 다시 한 번 초운의 몸통을 후려쳐 왔다.
하지만 초운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연기처럼 허공에 퍼지며 일 장 앞에 다시 몸을 드러냈다.
화산 비전의 암향표였다. 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 아니었던지라 초운의 등이 검게 타올랐다.
검 끝에서 선명하기 그지없는 매화가 그려졌다.
한매청고(寒梅淸高).
이는 검기를 유형화시키는 비기.
제대로 된 매화 형상은 꽃잎 하나하나가 검기의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황현의 웃옷이 검기에 맞아 찢겨져 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앙상히 마른 그의 가슴이 드러났다.
초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앙상히 마른 몸이 바로 자신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표정과 다르게 검을 멈추진 않았다. 알량한 생존 본능 때문이 아니었다.
황현이 자신을 위해 해준 일들을 생각한다면 초운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해도 억울할 게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황현은 황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공에 빠지면 그땐 내가, 내가 아니다. 본래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마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되거든…… 나를 가차 없이 죽여다오.”
‘사형…… 정말 더 이상 사형이 아닌 건가요?’
황현은 인간으로서 죽고자 했기에 그 목숨을 초운에게 맡겼다.
그러나 초운이 그의 목숨을 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초운의 머릿속은 갈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내상은 점점 쌓여만 갔다.
황현이 자신의 왼팔에 구현한 전격의 창은 초식도 뭣도 없는 그저 힘의 집약체.
그런데도 초운은 거기에 맞설 수 없었다.
초식은 없었으나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황현의 오감이 초식을 대체해 주고 있었다.
초식을 뛰어넘는 감각이 상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파지지직!
전격의 창은 번개처럼 불규칙적인 빛을 뿜어내며 초운의 머리통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초운이 양손으로 검을 잡고 창을 막아 냈다.
검면의 바로 한 치 앞에서 멈춘 창이 앞으로 나가려 용을 써 보지만 나갈 수 없었다.
초운이 순간적으로 십사수매화검의 유일한 방어초식인 설매제한(雪梅制寒)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힘에서 밀린 초운은 땅에 두 줄기 긴 도랑을 만들며 밀려났다.
“죽어!”
광기에 취해 버린 황현의 입에서 살기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는 무의식적으로 진각을 밟았다.
순간 전격의 창의 기운이 더욱더 커지며, 초운의 애검 처로의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적!
“크윽!”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초운의 잇몸에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만큼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람도 없건만 황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초운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의 몸은 더욱더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자신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되면 사형은 결국 마인이 되고 말 것이다.
갈등 어린 눈으로 황현의 얼굴을 바라보던 초운이 결심을 굳힌 듯 표정이 변했다.
“미안합니다. 사형!”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
매개이도(梅開利導)!
초운의 검에서 펼쳐진 매개이도의 초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한 번으로도 충분한 초식을 찰나의 순간 수십 번 연달아 펼쳐낸 것이다.
곧이어 매개이도의 검기가 그물처럼 중첩되기 시작했다.
매개이도를 펼쳐 내 얻은 검기는 커다란 바위라도 단번에 잘라낼 만한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것이 수십 가닥 모여 그물을 이루니 황현은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황현의 본능은 보통이 아니었다.
위험을 느낀 그가 전격의 창을 땅에 꽂았다.
콰콰콰쾅----!
엄청난 뇌전의 파편 사방으로 뻗어 가더니 초운이 만든 매개이도의 그물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초운은 놀라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이 다음 초식을 풀어냈다.
십사수매화검(十四手梅花劍)…….
동매잠춘(冬梅潛春)!
다소 느려 보이는 초식이었다. 마치 화산의 구석에 살 법한 늙은 선인이 춤을 추는 듯한 초식…….
그러나 그 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황현의 시야에서는 초운의 전신이 검 한 자루에 가려지는 듯 보였다.
동매잠춘은 검신합일(劍身合一)에 이르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초운이 비록 절대경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이미 그 경지를 한 번 경험해 보았고, 이미 완성되어 가는 절정고수였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동매잠춘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함을 뜻했다.
거대한 검의 형상이 황현을 잡아먹을 듯 다가왔다.
이에 황현의 본능은 그로 하여금 전격의 창을 더욱더 크게 만들도록 명했다.
그의 하나뿐인 왼팔이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전격의 창 역시 어마어마한 빛을 뿜으며 높이 솟았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내리쳤다.
초운의 검기와 황현의 뇌기가 부딪히며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어, 엄청나군…….”
무당의 석운자가 날아오는 파편을 막기 위해 팔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 역시 절정의 고수이나 저 초운이나 황현처럼 싸울 수 없었다.
같은 절정이라도 수준이 달랐다. 아마 자신이 절정의 끝에 도달한다 하여도 저 수준의 싸움은 힘들 것이다.
이는 초운이 어린 시절부터 쌓은 수련이 특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초운의 스승인 적오자는 절정고수 같은 일류고수, 절대고수 같은 절정고수를 만들고자 했다.
같은 경지의 무인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순도 높은 무인을 만들려 한 것이다.
그 덕분에 초운의 힘은 같은 경지의 어느 누구보다 강했다.
“사형. 우리가 과연 초운이라는 청년을 데려갈 수 있겠습니까?”
소림의 조 자배 승려였다. 그는 석운자와 같은 배분이었으나 나이나 입문 시기가 늦고 구파 간에는 사형제처럼 호칭하는 경우가 제법 되는지라 사형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음…….”
사실 자신이 없었다. 저 마인 한 명에게 수백의 인원이 농락당하다시피 하였다. 그런 마인과 호각으로 싸우는 이를 사로잡는다? 지금으로선 불가능했다.
“장로님들이 나서지 않는 한, 힘들겠군. 그나마도 최소 다섯 분…… 아니 열 분 이상은 있어야 별 상처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네.”
소림승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맞는 말이오. 대체 화산파에선 저런 제자를 어찌 만들었는지…….”
그의 부러움 섞인 목소리에 석운자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저 청년이 필요하다네. 그러니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라도 잡아야 해. 모든 수단을 말일세.”
소림승이 조금 놀란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석운 사형! 설마 그것을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어쩔 수 없네.”
“하지만…… 그것을 쓴다면 천하에 지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 청년을 데려가지 못한다면…… 우리 오대검파는 그 지탄조차 그리워하게 될 걸세. 자넨 그러길 바라나?”
“…….”
소림승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석운자의 입장이더라도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색의 구슬을 꺼내 드는 석운자의 얼굴을 더 볼 수 없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