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69화
지금 그의 눈엔 도망치는 이들이 모두 죽은 사부와 사제들처럼 보였다.
이성은 그러지 마라 하는데 마성에 잠식된 본능은 그들을 쫓으라 하는 중이었다.
사문과의 연을 끊으라고, 환영 속의 사부와 사제들을 다시 죽이라고 명하고 있었다.
황현은 거부하지 못하고 사부와 사제들을 계속해서 죽였다.
그가 환영 속 사부와 사제들의 심장에 수도(手刀)를 꽂을 때마다 그의 정신이 마공에 잠식되는 속도는 빨라지기만 했다.
더불어 그의 성취 역시 높아졌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육대세가의 인물로 보이는 소년은 이제 겨우 열다섯 정도였다.
그러나 황현의 눈앞에 선 소년은 죽은 사제의 귀신처럼 보였다.
사부처럼 눈꺼풀이 꿰매어 있는 형상의 사제는 황현을 향해 쉴 새 없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 속의 소년은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는 검을 치켜들고 있을 뿐이었다.
“오, 오지 마. 이 괴물아……!”
점점 뒤로 물러서는 소년을 향해 황현이 다가갔다.
그의 팔을 자색으로 물들인 뇌기(雷氣)가 솟구쳐 올랐다.
챙!
소년의 검이 무형의 기운에 의해 멀리 날아가 버렸다.
밀리다 못해 소년은 주저앉아 버렸다. 그 상태로도 땅에 엉덩이를 비비며 물러섰다.
이윽고 바위에 등을 부딪치며 막다른 곳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소년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황현이 수도를 치켜들며 중얼거렸다.
“왜…… 왜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이냐?”
라는 한마디와 함께 수도를 내리쳤다, 아니, 내리치려 했다.
그를 붙잡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사형!”
절정에 달해야만 비로소 빛을 본다는 화산의 보법.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가 한 청년의 몸에서 펼쳐지는 중이었다.
초운이 땅에 내려서자 마성의 광기에 시달려 차갑게 변한 황현의 눈동자에 일순 온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잠시뿐, 이미 흐르기 시작한 강물을 되돌릴 순 없는 법이다.
황현의 처참한 몰골을 바라보는 초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형…… 나 때문에…… 못난 사제 때문에…….”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그런 그를 향해 황현이 서서히 다가왔다.
“사제, 돌아와 주었구나. 돌아와 주었어.”
“네, 사형.”
지지지직---!
황현은 반가워하는 얼굴과 달리 더욱더 많은 뇌기를 풀어내는 중이었다.
“너는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초운아……!”
“…….”
“사부를 죽이고 친형제와 같던 사제들을 죽였다. 은인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명분에 취해…… 정(情)을 잃어버린 것이다.”
“황현 사형.”
“너도 나를 용서할 수 없지? 그렇지? 크흐흐흐…….”
그가 나지막이 웃었다. 하지만 초운은 그게 울음으로 들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황현의 하나 남은 왼팔에 전신의 뇌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초운은 그 기세에 놀라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나를 용서할 수 없다면…… 속죄할 길이 없다면…….”
광기로 가득한 자색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가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모두…….”
파지지지지직!
압축된 뇌기가 이 장에 달하는 거대한 창으로 화했다.
“모두 다 사라져 버려라.”
그가 거대한 뇌기의 창을 슬쩍 휘둘렀다. 초운은 급히 몸을 피했다. 극성의 오행매화보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두 사형제 간…… 긴 싸움의 막이 올랐다.
十章
무림맹의 총사 제갈정오는 얼마 전 황당한 보고를 하나 받게 되었다.
청해로 원정을 나간 적오자가 실종되었다는 것이었다.
파발을 띄워 적오자에게 중대한 것을 물어보려 했더니 정작 적오자가 사라지고 없어서 그곳에 도착한 무림맹의 사람도 다시 돌아와야 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오자를 따라나선 귀천무단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 많은 인원이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기사에 놀라움보단 황당함이 앞섰다.
그리고 그 황당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감숙성의 지부가 괴멸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데 그걸 괴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유는 무림맹 감숙성 지부의 모든 무인들이 모조리 실종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들까지 사라졌다.
“대체 어찌 된 일이지? 흠, 하필 이럴 때 천이각주가 강소성에 있으니…… 쯧.”
물론 천이각의 눈은 천하에 퍼져 있으니 각주인 진명이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하나 정말 상관없었다면 제갈정오가 굳이 진명을 친히 천이각주로 세운 보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진명의 통찰력은 놀라운 것이었고, 그 통찰력에서 나오는 정보의 분류는 제갈정오를 편하게 해 주었다.
지금으로선 많기만 하지 무용한 정보들을 무작정 받고 있는 상태이니 아무리 제갈정오라 하더라도 곤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한참 난감해하고 있을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졌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는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바로 지난 수백 년간 어떠한 외부 세력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던 사천성에 누군가가 깃발을 세우고 똬리를 튼 것이다.
그것은 즉 사천의 패자라 불리는 사천당가가 그 누군가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사천의 지부에선 어찌하여 아무 소식도 없단 말인가.”
제아무리 냉철한 총사라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사천의 당가에서는 주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는 특정 무리들 간의 화합을 위한 주연이었다.
사천의 당가는 예로부터 사천 지역에 군림해 왔다.
그들이 사천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천인들의 마음속엔 언제나 지배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는 무림맹과 천상련이 각자 지부를 세운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언제나 복종을 원했고, 사천당가는 그런 그들을 향해 코웃음을 치기 바빴다.
코웃음 칠 만도 했다.
복종을 원하는 데 반해 어느 단체에서도 사천당가를 건드리진 못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천하일절이라 할 만큼 무서운 암기술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천하제일의 의가(醫家)이면서 독문(毒門)이었기에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천하가 무림에 의해 일통되기 전부터 존재해 온 그들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의술과 독술을 연구해 왔다.
천하일절로 칭송되는 암기술은 독술을 잘 활용할 방안을 찾다가 얻게 된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했다.
무림세가(武林世家)라는 것이 생겨난 이후 가장 오래된 가문이 바로 사천당가였다.
그런 곳이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 단체에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천 땅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사실 권리라고 할 것까지 없었다.
그저 그들과 앙숙이라 할 수 있는 천상련과 무림맹에 크게 한 방 먹여 줄 세력이 나타난 것에 대한 즐거움의 표시였다.
“화산의 제자시라고?”
이제 약 삼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당위룡의 물음에 적오자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적 자배입니다.”
“그래서 적오라 하였구만. 허허…… 그나저나 근심이 많겠군. 사문이 그리되어서.”
적오는 올해 마흔여덟으로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런데도 당위룡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는 이유는 그의 진짜 나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인살(萬人殺) 당위룡은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이며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열세 명의 절대고수.
육왕칠사 중 칠사(七邪)에 속한 이였다.
의술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가훈인 사천당가는 무림과 별 상관없다 강조하고 정사지간을 표방한다.
그러나 그들의 숭고한 목적이 담긴 가훈 때문에 대부분의 무인들은 그들을 두고 정파라 칭한다.
하지만 정파로 인정받는 가문의 인물이 사파의 칠사(七邪)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된 것은 그의 심성 때문이 아니라 잔혹한 손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사연이 있었다.
한때 그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가문의 사명을 위해 세상을 떠돈 적이 있었다.
그러다 요동의 구석진 곳에서 한 마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은 작지만 정이 넘치는 곳이라 고향인 당가타를 생각나게 하였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근 일 년을 보내며 사람들을 돌봐 주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어느 날.
그를 분노하게 하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근처의 도시에 나가 약초를 사서 돌아와 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분노한 당위룡은 흉수를 찾았고, 그 흉수들이 흑풍대라 불리는 대(大)마적단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이야 사라진 이름이지만 그 당시 요동의 흑풍대라고 하면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기저기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공적으로 선포된 이들이 모여 마적단을 이룬 것으로 마인사냥에서 살아남은 마인들도 두엇 섞여 있기까지 했다.
세외로부터 중원을 방어하는 개방에서도 골머리를 앓을 만큼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였는데 그 규모만도 무려 일만에 달했다.
그러나 분노한 당위룡에게 숫자는 아무 의미 없었다.
그날부터 그들의 자취를 몰래 추적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하나둘씩 죽이기 시작했다.
밤에는 독향을 뿌렸으며 낮에는 지나갈 곳을 미리 예상하여 모든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밤에 자던 이들은 뜬금없이 급사했고, 낮에 우물물을 마시던 이들은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조리 피를 토해내며 죽었다.
그렇게 근 일 년을 추격하는 동안, 흑풍대의 마적들 중 어느 누구도 당위룡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일만이 넘던 인원이 일 년 만에 겨우 백 명만 남게 된 흑풍대는 뒤늦게 범인이 당가의 당위룡임을 알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당가의 극독 중의 극독이라 불리는 칠보단혼사…….
이를 당위룡이 자체적으로 개량한 풍파살(風破殺)은 그들을 아주 오랜 시간 괴롭혔다.
살갗이 바람에 스치기만 해도 엄청난 통증에 시달려야 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도 죽지 않는다. 생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다.
결국 흑풍대의 생존자들은 하나둘씩 자결했고 괴멸에 이르렀다.
이 일로 인해 당위룡은 한동안 대살성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당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있는데다, 그 자신의 독술이 절대의 고수도 죽일 수 있다는 평을 들을 만큼 엄청난 경지였기에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만인살(萬人殺)이라는 별호와 함께 육왕칠사의 한 축에도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적오는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는 인물이 마인보다 더 잔혹한 손속을 지닌 대살성이며 천하에서 개인의 손으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자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도, 기세에 밀리지도 않았다. 그저 당당하게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그가 적오에게 물었다.
“어찌할 생각인가? 우리 당가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무림맹과 천상련을 동시에 상대하려면 쉽지 않을 걸세.”
“그보다 더 중한 일이 있어 아직은 생각지 않기로 했습니다.”
당위룡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무림맹과 천상련에게 한 방 먹여 주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중한 일? 그게 무엇인가?”
“제자를 다시 찾는 일입니다.”
“제자?”
당위룡은 실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실망할 만도 했다.
대의를 앞두고 고작 제자를 찾다니…… 거대한 방파를 이끌 재목도, 무림맹과 천상련이라는 거인을 이겨 낼 재목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