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67화
그가 여태까지 죽지 않은 이유는 자전마공의 마기가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인되었다고는 해도 마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봉인을 비집고 나온 마기는 어떻게든 자신의 숙주인 황현을 살리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봉인을 풀어버리게 된다면 홍수로 강이 범람하듯 마기가 순식간에 전신을 장악하고 말 것이다.
그때 전면에 나서 우두머리로 보이던 사내가 황현에게 말했다.
“나는 천이각주 진명이라 하네, 무림맹에서 왔지.”
“……그들과 한편이겠군.”
당연한 추측이었다.
초운과 자신을 노리는 이들은 모조리 명문정파의 무공을 쓰고 있었다.
특히 소림이나 무당은 확실했다.
그러니 무림맹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진명이라 소개한 사내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는가.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우리는 이번 일에 중립을 표명하였지.”
“뭘 원하지?”
“당연히 저 초운이라는 청년일세.”
황현이 하나 남은 검을 세게 움켜잡으며 외쳤다.
“불가(不可)하다!”
“불가하다…… ?”
진명이 의아한 얼굴로 황현 너머의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황현도 그의 표정을 보았는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사형.”
“너…… ?”
순식간에 마혈이 점해진 황현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점혈한 이를 바라보았다.
바로 초운이었다.
초운은 눈물을 흘리며 황현의 어깨를 잡았다.
“사형이 죽는 걸 볼 수 없었어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사형. 그냥 처음부터 나 하나만 없어지면 되는 거였어요.”
“너…… 넌 살아야 한다. 살아서 화산을 구해야 해!”
“이게 화산을 살리는 길이에요.”
두 사형제 간의 대화에 진명이 끼어들었다.
“우린 이 청년을 죽인다고 한 적 없다네.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지만…….”
초운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와 약속한 대로 해 주세요.”
절정의 고수인 진명은 초운과 황현이 운태산으로 향하는 동안 수시로 초운과 접촉을 시도했다.
대부분 전음으로 이루어진 대화였지만 결국 초운은 거래를 받아들였다.
“물론! 자네의 사형을 안전한 곳까지 이송시키고 치료해줄 것이네.”
“……믿겠습니다. 가지요.”
초운이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명이 사람 좋은 미소로 반겨 주었다.
“아주 잘 생각했네. 후후후.”
그렇게 황현의 눈앞에서 초운은 떠나갔다.
홀로 남은 그를 향해 천이각의 요원 둘이 다가왔다. 하지만 마혈을 풀어주지는 않았다.
“한 시진 정도는 기다렸다 풀어줄 테니 조금 참으라고.”
그리 말한 두 요원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일찍 풀어주었다가 초운을 찾아 나설까 봐 시간을 버는 듯했다.
하지만 황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혈을 풀어 초운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마혈을 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진기로 막혀 있는 혈을 풀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몸 상태로는 진기를 모으기 힘들었다.
설사 모으더라도 진기로 막힌 혈을 밀어붙일 힘이 있어야 하건만 적들의 검기에 경맥이 끊어져 힘이 부족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봉인을 푼다.’
제방을 쌓아 가둬 둔 물을, 제방을 무너뜨려 한꺼번에 풀어 놓는다면 어마어마한 힘으로 뻗어 나가는 법이다.
봉인된 마기는 가둬 둔 물과 같이 포화상태였고, 황현의 몸 상태가 나빠질수록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봉인을 풀어버린다면…… 혈도를 뚫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결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미간에서 하얀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머리카락보다 미세한 금침이 뽑혀져 나왔다.
생각보다 쉽게 뽑혀 나온 금침에 의아해 했으나, 지금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지지지직---!
새어 나오는 뇌기(雷氣)를 제어하는 것이었다.
“으아아악!”
“크악!”
천이각의 요원 둘이 순식간에 타 죽었다. 그저 새어 나온 뇌기에 닿았을 뿐인데 절명하고 만 것이다.
황현은 이에 놀랄 겨를도 없이 전신에 엄청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마기가 무서운 속도로 전신의 경혈을 역주행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소주천에 이르고 대주천에 이르더니 그가 화산파에서 모았던 모든 기운이 모공을 통해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오직 강인한 정신만이 그가 마성에 잠식당하지 않게 해 주고 있었다.
“헉, 헉…… 헉!”
무릎을 펴고 일어선 황현의 눈빛이 자색으로 물들었다.
“찾아야 해.”
그가 한 걸음 떼었다.
팡!
힘 조절이 안 되는지 순식간에 오 장을 이동하고 말았다.
그저 걷고자 하였을 뿐인데 무릎뼈에 금이 갔다.
몸이 급격히 늘어난 마기에 적응 못 하고 부서지는 중이었다. 봉인을 풀어버린 데 대한 부작용이었다.
황현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광이 떠오른 눈빛이 초운의 기운을 좇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 * *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한 청년은 가끔씩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몸이 아픈 사형을 두고 온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빨리 서둘러야 할 거요. 구파나 육대세가나 사활을 걸었는지 각각 속가문파나 방계가문에서 수많은 이들을 동원했다오.”
그를 감시하는 한 무인이 옆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에 초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화광이 충천하며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그들이 지나온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같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진명은 의아한 얼굴로 요원을 하나 보냈다.
일각도 안 되어 돌아온 그는 심각한 얼굴로 진명에게 전음을 보냈다. 초운은 전음을 훔쳐 들을 수 없기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아 뭔가 심각한 일이 터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진명이 초운을 향해 다가와 말했다.
“자네 사형은 대체 뭐하는 자인가.”
“네?”
그가 초운의 팔을 잡더니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그들 일행 모두 경공을 펼치지는 않았다.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는 상태에서 이 인원이 경공을 펼친다는 것은 적들을 모으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적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가 지나온 길을 걷고 있다 하더군. 아마 운태산에 있는 적 전력의 칠 할은 자네 사형에게 몰려들었을 걸세.”
“사형!”
급히 돌아가려 했지만 초운의 팔은 이미 진명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가만있게. 거래는 잊은 건가?”
“하지만 사형이…… 사형이 위험해요.”
“자네 사형이 막무가내라 어쩔 수 없네. 자네 편의를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그럴 수가…… 사형을 돌봐 주기로 했잖아요!”
“거짓말하지 않았네. 그러나 지금 자네 사형의 분위기를 봐선 약속을 이행해 줄 내 수하들은 모두 죽었다고 봐야 한다네.”
진명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정보단체의 수장이라 해도 괴물은 아니었다.
언제나 수하들을 잃을 준비는 하고 있으나 막상 잃고 나면 살을 베어 내는 듯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다.
현장과 집무실의 다른 점이 있다면 집무실에서는 어디까지나 보고서를 통해 접하는 것이고, 현장은 그 아픔을 직접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초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지금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호.”
그의 부름에 인상 좋은 청년 하나가 곁으로 다가왔다.
“네.”
“이 청년을 잡고 있어라. 난 곧 돌아오마.”
형호가 비록 밝은 성격이라 하나, 농담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기는 한다.
“알겠습니다.”
“음…….”
진명이 수하 둘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형호는 진명처럼 초운을 잡진 않았다. 초운은 이미 도망가려는 의지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형호는 그 특유의 감으로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 * *
멀리서 황현과 그를 향해 돌진하는 이들을 살피던 진명은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선명한 자색의 뇌기(雷氣)는, 아무
보아도 정종의 공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부나방처럼 거기 달려드는 이들도 악에 받쳐 목숨을 도외시하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쌓여 가는 동료의 주검들 때문이라도 독기가 오를 만했다.
그러나 부나방은 어디까지나 부나방…….
무슨 수를 쓴 건지 황현이라는 청년은 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지 오래. 그에 반해 달려드는 대부분의 무인들은 일류 정도였다.
그나마 간간이 절정의 고수가 섞여 있어서 타격을 입히고는 있지만, 황현이라는 청년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한 방향으로만 망령처럼 계속 걷고 있었고 그 길에 방해되는 것을 죽이고 또 죽일 뿐이었다.
진명은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우리를 따라오려는 거군. 대체 저 사내는 무엇이 그리도 절박하단 말인가.”
허벅지와 옆구리에 부러진 검 조각이 박혀 있는데도 움직이고 있었으며 이미 수십 차례의 장력에 격중당하였는데도 하나 남은 손으로 뇌기를 뿌려 댔다.
단순히 마공에 지배당한 움직임은 아닌 듯했다.
사제를 구하기 위함이라 보기엔 너무 처절했다.
황현은 먹물처럼 번져 가는 시야를 애써 바로잡았다.
과거 곽호에 의해 한쪽 눈을 잃었던 터라 시야가 좁았다. 그리고 그 사각을 통해 얻어맞은 공격들은 모두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의 왼손이 한 소림승의 얼굴을 잡았다. 그러자 자색의 뇌전에 의해 얼굴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끄으아아아아!”
그의 동료들이 황현의 팔을 자르기 위해 칼로 내리쳤으나 자전마공의 기운이 도는 팔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소림승은 절명하고 말았다.
“분명 마공이긴 하나 아직은 ‘절정경’에 불과하다. 이 정도 숫자라면 설사 소림의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거늘…….”
석운자가 중얼거렸다. 그 역시 절정경에 달한 무인. 같은 경지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한데 저것과 똑같이 하라고 하면 절대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 저자를 움직이는가?”
황현의 신형이 다시 급격히 앞으로 나갔다.
수십 명의 손바닥이 그를 잡고 막았지만 그는 그들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나갔다.
눈과 입을 실로 꿰맨 사부와 사제들의 형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꿈이 아님에도 나타나 그를 비웃었다.
“용서받아야 해…… !”
황현은 눈앞의 환영을 지나쳤다. 복부에 검기가 스쳐 지나갔다.
“속죄해야 해…… !”
자색의 뇌기는 더욱 더 커져만 갔다.
자전마공이 칠성을 넘어 팔성에 이르렀다. 그의 몸이, 근육이, 뼈가 한계에 달한 듯 비명을 질렀다.
투툭.
근육의 힘줄이 끊어지며 경고했다.
더 이상의 힘은 용납할 수 없다며…….
왼팔의 수도(手刀)가 적의 심장을 꿰뚫고 몸 안에 강력한 뇌기를 흘려보낸다. 그러자 적은 내부에서부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내장과 근육이 전격(電激)에 찢기고 박살 났으며 눈알이 터지고 코로 뇌 조각이 튀어나왔다.
시커멓게 타오른 시체를 던지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다.
햇볕에 반사된 수많은 검날이 눈부셨다. 그게 그대로 다가왔으나 이미 자전마공의 경지는 팔성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