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향-66화 (66/217)

검향 66화

적오자는 가죽에 적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상인들이 주고받는 서신 같은 것이었는데, 중원의 정황에 대해 농담처럼 적혀 있었다.

하지만 적오자는 그것들을 다 읽어갈수록 점점 변하고 있었다.

온화한 도사에서 냉혹한 검귀로…….

“이 서신은 어디서 난 것이냐.”

“이단과 삼단이 마적들을 토벌하였다가 나온 것입니다.”

“살아 있는 놈들을 당장 데려와.”

“네!”

일각 후 마적의 두목과 부두목이 적오자 앞에 무릎 꿇렸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현재 청해를 삼분하고 있다는 귀천무단주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당연했다.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경을 칠 것이다.”

마영이 그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논하겠는가. 둘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오자는 그들에게 가죽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 가죽은 어디서 났느냐.”

“어, 얼마 전에 상단을 하나 털었습니다요. 아마도 거기서…….”

“중원 쪽의 상단이었겠지?”

“잘은 모르겠습니다요. 하지만 어수룩한 것이 중원 놈들 같았지요. 호위무사들도 형편없었고…….”

이에 적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청해의 상단이었다면 이런 마적들에게 쉽사리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상단 자체가 강력한 무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청해에선 힘이 없으면 당하고 만다. 그것은 상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가죽의 내용을 아느냐?”

두목과 부두목은 낯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글자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 가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타고 다니는 말안장에 깔기 위해서였다고…….

곁에서 듣고 있던 마영이 가죽을 잡았던 손을 코에 가져다 대며 눈살을 찌푸렸다.

적오가 그들에게 다시 물었다.

“이 가죽을 갖고 있던 상인들은 어찌했느냐. 죽였느냐?”

부두목이 양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냥 털어먹고 나서 놓아주었습니다.”

적오자가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마영을 향해 말했다.

“이놈들 데려가서 그 중원상인들을 찾아오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단주.”

마영이 목례를 하고 떠나자 적오자는 다시 한 번 서찰을 읽었다.

믿기 힘든 단어가 그의 가슴을 찔렀다.

화산파…… 멸문.

사부인 백송 진인과 제자인 초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 * *

마영이 중원의 상인들을 찾아서 데리고 온 것은 닷새가 지난 후였다.

다행히 그들은 교역 중이던 상단에 의해 구조되어 있었다.

상단주는 고씨 성을 가진 이로 이름은 소백이라 했다.

그는 상인이라기보다 선비와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마적들이 우습게 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듯했다.

적오는 그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와 차를 한 잔 대접하며 공손히 대했다.

고소백 역시 오면서 적오나 귀천무단에 대해 귀가 아프게 들었기 때문에 아랫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비굴하지는 않았다.

차를 다 마신 적오가 품에서 가죽을 꺼내 들며 물었다.

“마적을 토벌하다 우연히 이 가죽을 발견하였소. 가죽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오?”

가죽을 건네받은 고소백은 그것을 읽어 보며 되물었다.

“어떤 내용을 말씀하시는 건지…….”

“화산파의 멸문 말이오.”

“네, 사실입니다. 청해와 중원은 멀지 않은데, 모르셨습니까? 반년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적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히……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시오.”

마적을 대신 혼내주고 상단의 물건까지 되찾아 준 은인이었다.

화산파의 일을 말해 주는 것이 뭐 어려울 게 있겠는가. 고소백이 입을 열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예닐곱 달 정도 전에…….”

얼마 후.

적오의 거처에서 홀로 나온 고소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도 눈치는 있는 바, 적오의 반응을 보았을 때 화산파와 상당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은 모두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먼 동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몰라도…… 저 귀천무단주를 화나게 했으니 곱게 죽지는 못하겠구나.”

고소백이 되찾은 교역품으로 상단을 다시 꾸려 떠나자 적오는 그에게 백 명의 무사를 붙여 주었다. 모두 귀천무단의 정예들이었다.

그들은 고소백이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잘 보살펴 줄 것이며 교역이 끝나면 다시 귀천무단으로 복귀할 것이다.

대신 복귀는 청해가 아닌 중원이 될 예정이었다.

굳은 표정의 적오가 말 위에 올랐다. 그러자 팔천이 넘는 대인원이 따라서 말 위에 올랐다.

귀천무단의 일단부터 삼단까지에 이르는 모든 인원이었다.

일단은 중원의 무림맹 출신으로 적오가 청해 정벌에 나설 때 데리고 온 이들이었고, 이단은 혈교를 비롯한 여러 방파들을 복속시키며 거둔 이들이었다.

그리고 삼단은 반무맹을 거두며 얻은 이들이었다.

이들 삼단의 무력은 무림맹의 지부 다섯 개를 합쳐 놓은 것에 맞먹었다.

적오는 아득히 먼 동쪽을 바라보며 살기를 일으켰다.

“감히…… 내 사문이…… 내 사부가…… 내 제자가 고초를 당하고 있는데도 알리지 않았단 말인가.”

그의 증오는 단순히 천상련이나 그들의 호법신장이라는 곽호에게만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홀대한 무림맹의 처사에 더욱 더 증오를 불태우고 있었다.

거기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사부와 제자에 대한 걱정이 버무려지자 증오는 실체화되었다.

“마영.”

“네! 단주!”

“부하들에게 전해라. 오늘 이후 나 적오자는 무림맹에서 탈맹한다. 즉, 오늘부터 단주가 아닌 것이다.”

“단주!”

“단주님!”

무림맹 출신인 일단의 단원들이 놀라 소리쳤다. 하나 마영은 이미 짐작하였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 한데 어찌 가만있는가.”

그가 묻자 마영은 수하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우리에겐 귀천무단이 곧 무림맹이다. 안 그런가!”

그러자 동요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그들의 눈엔 굳은 결심이 떠올라 있었다.

적오가 놀란 눈으로 마영을 바라보았다.

청해 출신인 이단이나 삼단이면 모를까, 마영을 비롯한 일단은 중원 출신…… 그것도 무림맹에 적을 둔 상태다.

자신뿐만 아니라 출신인 가문까지도…….

때문에 적오도 그들을 놔주려 한 것이었다.

마영이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무림맹에서 귀주성에 보낸 것 자체가 죽으라고 보내는 겁니다. 모르셨습니까?”

지금이야 괜찮지만 한때 귀주성은 천상련과의 최전선이었다.

때문에 마영을 비롯한 모든 단원들은 무림맹에서 밉보인 가문 출신이거나 좌천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것은 바로 무림맹이 아닌 적오자였다.

적오자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

“나는 무림맹을 엿 먹이러 가는 거다.”

마영이 모두를 대신해 답했다.

“우리가 바라는 바입니다.”

길고 힘든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무림맹과 천상련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고. 적들 중에는 마인들도 있다.

마영이 모두를 돌아보았다.

일단과 이단 그리고 삼단의 모든 무인들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각자의 무기를 빼 들었다.

차차창!

소란은 없었다.

하지만 칠천이 넘는 대인원이 무기를 뽑아 드니 그만한 장관도 없었다.

마영이 그에게 물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단주.”

적오의 입꼬리가 찢어지듯 올라갔다.

“충분하다.”

그렇게 귀천무단은 중원을 침공했다.

시기적으로는 초운이 생사신의의 치료 덕분에 거의 회복되어 가던 때였고, 무림맹의 총사가 띄운 파발이 청해로 향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九章

천라지망이란 게 유독 끈덕지다.

동원되는 인원이 많으니 거미줄처럼 견고하고, 그 형태는 그물처럼 복잡하지만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초운과 황현에게 있어 다행이었던 것은 그들이 펼치는 천라지망이 구멍투성이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파와 육대세가가 서로 적대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어렵사리 뚫고 지나가면 어느새 재정비를 하고 다시 펼쳐지는 포위망.

처음엔 절망적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 동안 도망친 결과 도달한 곳이 바로 운태산이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몇 개로 나누어 깔아 놓은 듯한 형상의 산은 숨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초운이 이곳에 도달하였을 무렵.

엽궁이 준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백 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공력의 회복도, 몸의 회복도 순조로웠다.

하지만 황현은 달랐다. 초운을 위해 모든 공격을 대신 막아준 그의 몰골은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름 동안 도합 삼십육검을 맞았고 그중 검기에 격중된 것이 아홉 번이었다.

검기에 맞게 되면 외상도 외상이지만 경맥이 가닥가닥 끊어지게 되니 문제였다.

황현은 경맥이 끊어진 후유증으로 인해 한쪽 귀마저 멀어버렸다. 죽지 않고 운태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초운은 그의 이런 이유 없는 희생에 미칠 것만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포기하고 싶었다.

자신만 저들의 손에 넘어가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때마다 그의 불쌍한 사형은 피 묻은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져 주며 말했다.

“화산의 미래가 너의 손에 달려 있다. 너를 잃으면 화산은 모든 걸 잃게 되는 거야.”

“재능 없는 둔재가 무슨 화산의 미래에요. 저를 잘못 본 거예요.”

“부디…… 내가 너를 지키게 해다오. 그렇지 않으면…… 내 죽어서 사부와 사제들을 볼 수가 없겠구나.”

“…….”

황현은 후회했다. 그저 강해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곽호를 선택한 이유였다. 하지만 더 큰 것을 잊고 살았다. 사부인 적리자의 한없는 사랑이었다.

자신의 검에 심장이 꿰뚫릴 때도 분노하긴 했지만, 곧 벌벌 떠는 자신의 손을 쓰다듬어주었다.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 보여 준 용서의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분노하여 원독에 찬 눈빛을 쏘아 보냈으면 이해했을 것이다. 마음 편히 자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눈빛…… 사부의 그 눈빛을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었다.

‘어찌…… 어찌 저를 용서하신 겁니까. 사부…… 혹…… 이런 날을 예견하셨던 겁니까?’

괴로움으로 가득한 초운의 얼굴을 바라보던 황현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급히 검을 뽑아 든 그의 귓가에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워워워. 진정하시게. 아직은 적이 아니니.”

“누구냐.”

검은 무복을 입은 중년인.

그리고 그와 비슷한 무복을 입은 채 주변을 포위한 열한 명의 무인들.

황현은 본능적으로 이들이 보통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천라지망을 돌파하며 싸웠던 이들 중에 이런 고수들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개개인이 절정의 초입에 든 것이 분명했다.

화산으로 따지면 일대제자의 중간 서열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일류고수와 절정고수의 차이란 자라와 토끼만큼의 차이였다.

황현이 이를 악물었다.

‘역시…… 봉인을 풀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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