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63화
八章
무림맹의 총사 집무실은 항상 사람과 서류들로 붐비지만 하루에 딱 한 시진 정도는 아무도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총사에게 있어 그 한 시진은 오직 천이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읽어 보기 위한 시간이었다.
천이각이 다루는 정보들은 대부분 기밀로 취급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만든 것이다.
총사인 제갈정오는 반년 전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초운이라는 화산 제자의 정체였다.
구파와는 대립하는 사이라서 이렇다 할 정보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얼마나 구하기 어려웠던지 초운이 사실은 일월신마 곽호가 정도 무림을 흔들기 위해 만든 가상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사실 초운이라는 존재의 실존 여부를 아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바로 화산의 도적을 훔쳐보는 것이다.
도적에는 화산 정식도사들의 도명과 속명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러나 화산파가 정상일 때도 요원 한 명 잠입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일월신마를 비롯해 수많은 마인들이 점거 중이었고, 천상련의 무사들도 상당수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 천이각의 요원을 잠입시켜 명부를 훔쳐오게 하는 건 자살하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달리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바로 화산의 수련도사였다. 수련도사들은 보통 정식제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면 속가제자로 내려앉는다.
그 수련도사들을 찾아 초운이라는 도사의 정보를 얻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지난 삼십 년간 화산을 거쳐간 수련도사들의 숫자만 해도 수만 명이었다.
그런 이들을 배분 순으로 골라낸다 해도 수백 명의 사람들을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천이각의 요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소수의 인원으로 조사하게끔 만들었다.
그나마 화산의 속가제자는 찾기가 어렵지 않다.
천하에 널리고 널린 게 무관이고 표국이다. 그중에 화산 속가 하나 못 찾을까.
게다가 화산과 같은 명문정파의 속가쯤 되면 오히려 출신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한다.
그래야 대접받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임무를 천이각에 의뢰한 것이 벌써 반년 전.
바로 곽호가 초운이란 존재를 이용해 협상을 개시하고 석운자가 찾아온 직후에 시작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과를 오늘 드디어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앞엔 지금 천이각에서 긴급으로 분류한 임무의 완성본이 있었다.
성인 남성의 손바닥 두 개를 겹쳐 놓은 듯한 두께의 서책이 무려 아홉 권이었다.
이 중 네 권은 벌써 다 읽었고 지금은 다섯 번째 서책을 읽는 중이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제갈정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낯익은 이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이자의 이름이 여기에……?”
평소라면 지나쳐 버렸을 테지만 워낙 자신을 귀찮게 했던 기억이 있었던 터라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렇군. 그에게 제자가 있었나. 도명이 황운이라…….”
그러고 보니 지나치다 할 정도로 사문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과거 마인 혁련수가 무림맹을 향해 진격했을 때 그를 물리치고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음에도, 원하는 것은 사문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허가해 주지는 않았다.
당시 무림맹엔 영웅이 필요했고 그 덕분에 무림맹에 가입하는 문파나 후기지수들이 평소 대비 세 배는 늘었으니까.
그 뒤로 근 석 달 가까이 파견을 끝내 달라는 서찰을 보내 귀찮게 했기 때문에 뇌리에 박혀 있는 이름이었다.
그와 그의 제자에 대한 보고를 읽어 가던 제갈정오의 눈동자가 점점 빨라졌다.
“청연자의 총애를 받다? 허. 귀선검의 총애를 받은 아이라…… 숙수로 위장했던 일월신마와도 친했다?”
읽다 보니 점점 놀라웠다.
적오만해도 장문인의 막내제자였으니 이 황운이라는 도명의 도사는 장문인의 사손이면서 화산 고(古)장로들의 대사형이라 할 수 있는 청연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일월신마와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산동악가의 유력한 차기 가주로 떠오른 천재. 악휘구와는 친형제 같은 사이라고까지 적혀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이가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제갈정오는 이 황운이라는 도사에게 뭔가 있음을 알았다.
아쉽게도 이 도사의 속명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었다. 책을 덮은 그는 황운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난 지금까지 읽은 보고서에는 어느 누구도 일월신마와 이 정도의 친분을 지닌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썬 일월신마가 원하는 도사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였다.
“적오자…… 의외의 순간에 도움이 되는군.”
만약 적오자가 아니었다면 그의 제자에 대해 바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제자에 대한 것은 황 자배 제자들에 관해 서술한 보고서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일부러 그의 제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황 자배 제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읽어 보았던 것.
언젠가는 발견했을 테지만 적오에 관한 호기심 덕분에 시간을 꽤 절약했던 것이다.
그는 수하를 시켜 적오에게 사람을 보내기로 하였다.
속명을 알아내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귀주 지부장은 청해 원정 중이었지. 당장 파발을 띄워야겠군.”
* * *
처로를 다시 쥔 초운은 감회에 젖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동안은 황현이 처로를 대신 쓰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처로는 다시 초운의 손으로 돌아왔다.
절대 무리해선 안 된다는 조건이 따랐지만 그저 검을 잡게 된 것만으로도 좋았다.
초운은 이미 현단선공과 자하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하여 공력도 이 할이나 돌아왔다.
하지만 엽궁은 의원으로서 걱정이 많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 생각하고 있었다.
심법으로 쌓은 기운이 후천지기라면 쌓은 것을 담아 두는 그릇은 선천지기였다.
강호에선 그 그릇을 두고 진원지기라고도 불렀다.
후천지기는 그릇을 집으로 삼아 전신을 돌며 그릇을 튼튼하게 만들고 튼튼해진 그릇은 후천지기가 지내기 편한 집을 만든다.
이것이 내공심법의 기초였고, 어느 무공도 이 같은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마공까지도…….
하지만 초운은 이제 깨진 그릇을 모아서 형태만 맞춰 놨을 뿐, 진원지기가 완벽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엽궁이 조심하라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회복까지는 앞으로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뭘 하지? 아 그래, 십사수를 한번 풀어 볼까?”
초운은 실로 오랜만에 십사수매화검의 기수식을 펼쳐 보았다.
특이하게도 그렇게 꼬였던 초식이 이제는 더 이상 꼬이지 않았다.
우습게도 내상이 심해진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과거의 그는 몸은 이루었는데 깨달음이 못 따라가거나 혹은 반대로 머리는 경지에 올랐으나 몸이 못 따라가는 상황이 여러 번 있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약했다.
여전히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상태지만,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오랜 시간 누워 있으며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게 되었고, 힘을 적절하게 배분하여 쓸 수 있도록 궁리해 왔다.
사실 누워 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란 무공에 대한 생각뿐이다.
비록 병상에 있었긴 했지만 자신이 배운 것들과 아는 것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도달해 있는 경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타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지금은 그 가르침들을 소화시키는 단계인 것이다.
초운은 몰랐으나, 무인들은 이 같은 공부를 두고 탈각이라 하였다.
짐승도 때가 되면 어미 품을 벗어나듯, 제자가 사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하였을 때 쓰는 말이었다.
탈각을 했다 해서 경지가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한 준비는 되었다 볼 수 있었다.
탈각이 없는 이는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십사수매화검의 초식 중 기수식을 포함해 겨우 서너 개의 초식을 풀어 놨을 뿐인데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처로의 검날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초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들…… 리네.”
무슨 일인지 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혹시 화라도 난 걸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젠 검의 목소리가 스스로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임을 안다.
때문에 검명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검이 아닌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음을 뜻했다.
반년 만에 다시 잡은 검은 기쁨을 주기도 했지만 대신 고민도 늘려 주었다.
초운은 다시 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당분간은 처로와 떨어지지 않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검을 친구처럼 대하기로 한 것이다.
언뜻 무식해 보였지만 사실 그의 방법은 옳았다.
검을 든 검사는 검을 쥠으로써 검에 익숙해진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 감을 잃어버린 경우라면 이런 식으로라도 감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 어떤 고수는 시퍼런 검날을 껴안고 잠을 잤다는 전설도 있었다. 그러므로 초운의 방법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 * *
“이게 그 씨앗인가…….”
천응은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 끙끙대는 청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걸…… 어떻게 생각해, 제갈청?”
“…….”
인형에 불과한 제갈청이 말을 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치 대답이라도 한 것처럼 천응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누군가 마기(魔氣)를 봉인한 것 같아.”
그리 말한 천응은 청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얼마 후 그의 손끝에서 하얀 기운이 일어나더니 이마로 스며들었다.
이마에서 손을 뗀 천응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할 만큼 했어. 각성 못 하면 네 잘못이야.”
그 말을 끝으로 천응과 제갈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굴 없는 사부의 손이 자신을 잡으려 다가온다.
도망친 곳의 끝엔 사제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피하려 방향을 바꿔 보지만 이번엔 그쪽에 서 있었다.
사부의 손이 자신의 목을 누른다. 어느새 나타난 사제들도 그의 목을 함께 조른다…….
“아악!”
비명과 함께 눈을 뜬 황현은 습관처럼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목이 타는지 침상 옆에 담긴 찻주전자를 그대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그의 호흡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저의 죽음을 원하십니까…… 사부.”
그러면서 앙상하게 마른 자신의 하나뿐인 팔을 들어 보았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원래도 조금 마른 체구였으나 지금은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말라 있었다.
초운이 점점 낫는 동안 그는 건강을 잃었다.
원인은 명확했다.
마공의 봉인 때문이었다. 엽궁에 의해 봉인된 자전마공의 마기(魔氣)가 순환되지 못하자 몸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엽궁은 그에게 잠깐이라도 봉인을 풀자고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그는 죽더라도 그 자신으로서 죽고 싶지, 마성에 지배되고 싶지 않았다.
황현은 문득 이마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고 만져 보았다.
하지만 이마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잠이 더 필요했다.
오후가 되면 초운과 새로운 검을 사러 나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로를 초운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가뜩이나 약해진 체력인데 무리를 할 순 없었다.
침상에 누운 황현이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