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62화
무림맹의 총사직속 정보단체인 천이각.
그곳의 자칭 ‘차기 각주를 넘보는 기대주’ 형호는 벌써 넉 달이나 호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천이각이라는 곳이 정보를 다루는 곳답게 파견이 많은 편이긴 하나 대부분은 그 지역에 사는 정보원을 통해 얻지 이렇게 오랫동안 외지에 나와 있지는 않는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 가는 형호였다.
그런 그가 오늘 들른 곳은 백석촌이라는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원하는 건 아주 단순했다.
피로에 지친 몸을 녹여 줄 뜨거운 물과 맛깔스러운 음식, 그리고 독한 분주 한 병이었다.
파견 나올 때나 만끽할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랄까?
하지만 때론 이런 작은 행동이 운명의 큰 물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크으으으으! 이런 맛이라도 없으면 이 짓을 어떻게 하겠어!”
목젖이 움직이는 게 다 보일 정도로 고개를 한없이 젖혀 분주를 들이키던 형호가 입에 묻은 술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대낮부터 술 먹는다고 누가 욕하는 건 아니겠지?”
객잔은 점심때라 식사 손님이 많았지만 술 손님은 형호가 유일했다.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풍만한 몸매의 주인아줌마가 객잔의 문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햇빛을 등지고 선 덕분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 누군가를 주인은 이렇게 불렀다.
“소소공자. 내일도 또 와. 이 누나가 맛있는 거 대접할 테니.”
“네!”
목소리는 청년이 분명한데 어투는 아주 밝고 힘찼다.
그 맑은 목소리에 형호는 참 근심 없이 사는 놈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소소공자라 웃기는 별명이구나. 그래도 입에 딱 달라붙는 좋은 이름이다.”
형호는 밝고 힘찬 목소리와 소소공자라는 별명…… 이 단 두 가지만으로도 좀 전의 청년에 대해 호감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같은 호감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글 때도, 편안한 침상에서 저녁까지 낮잠을 자면서도 계속되었다.
아니, 잠에서 깨어서도 처음 생각나는 단어가 소소공자일 정도였다.
왜 이 같은 호감이 무럭무럭 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것도 일종의 감인가?”
정보를 다루는 이는 오직 정보만을 본다. 하지만 상당한 ‘감’도 필요로 했다.
이 정보가 그럴듯한 포장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구별해낼 수 있는 그런 ‘감’ 말이다.
천이각주인 진명은 형호의 그 ‘감’만을 보고 말단 문지기에서 천이각의 요원으로 직급을 상승시켰다.
형호는 그런 자신의 감을 절대적으로 믿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하던 임무를 팽개치고 다른 짓을 해야 될 정도는 아니었다.
진명 또한 그리 가르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형호는 알고 싶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피어오르는 훈훈한 감정의 정체를.
그는 낯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만 듣고 이렇게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호감은 호기심으로 변해 저녁때 떠나려던 그의 발길을 붙잡고 말았다.
그는 하루 더 머물러 소소공자를 만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형호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운명은 급격히 요동치는 중이었다.
다음 날.
형호는 아침부터 객잔의 식당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버릇처럼 벽을 등지고 객잔이 다 보이는 자리에 앉는 행위는 일부러 멀리했다.
어떻게든 가까이서 소소공자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해서 일부러 객잔의 현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루함이 엄습해 왔다.
‘내가 너무 일찍 나온 건가? 언제 오는지 알아보고 나왔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한참을 지루해하며 있다가, 점소이의 눈초리에 못 이겨 소면 한 그릇을 시켜 먹었을 때였다.
바깥에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객잔 아줌마 안녕하세요!”
이에 풍만한 몸매의 주인아줌마가 어울리지 않게 교태를 부리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아이참, 소소공자도. 아줌마가 뭐야? 누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아, 맞다. 객잔 누님!”
“어서 들어와, 내 오늘은 맛있는 걸 준비했어. 확실히 고기는 못 먹는댔지?”
“네. 먹으면 혼나거든요.”
주인의 손에 이끌려 객잔 안으로 들어온 청년. 드디어 형호는 소소공자를 볼 수 있었다.
‘제법 잘생겼는데.’
제법이 아니라 상당한 미남이었지만, 형호는 원래 미남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제법’이라고 한 것도 꽤 큰 칭찬이었다.
형호는 식탁에 앉아 주인 여인과 함께 밥을 먹는 그를 몰래 힐끗힐끗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 정도 미남이라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직접 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낯이 익다는 것인데, 이는 꼭 봐야만 아는 것이 아니다.
그가 아는 다른 사람과 닮았을 때도 낯이 익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누구와 닮았을까…… 누구와.’
형호의 머릿속이 맹렬히 회전했다.
자신과 관련된 수십 수백의 인간관계가 남녀 구분하지 않고 떠올랐다 사라졌다.
심지어 닮은 신체 부위가 따로 있는 건 아닌지 하고 기억을 부분적으로 떠올리기도 했다.
이는 놀라운 능력이었다. 무림맹 북문의 문지기 출신인 그는 사람의 얼굴을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해 냈는데, 그 능력 덕분에 변장하고 도망가려는 수배자들을 많이 잡아냈었다. 이러한 기억력은 ‘감’이 아닌 타고난 재능…… 그러나 그를 직접 뽑은 천이각주 진명이 그에게서 높이 평가한 것은 기억력이 아니었다.
그 정도 기억력은 천이각의 지옥 훈련을 통해서도 쌓을 수 있고,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감’이란 건 타고나야 한다.
특히 정보를 다루는 이가 갖는 감은 통찰력이 필요했다.
형호에겐 그 통찰력이 있었다.
자신이 아는 어느 누구 하나 소소공자에게 맞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 닮은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님을…….
그걸 알게 된 순간 형호는 자기도 모르게 식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찰나의 순간 떠오른 누군가의 용모파기 때문이었다.
그는 식사 중이던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든 말든 자신의 객방으로 급히 올라갔다.
그리고 방 안의 의자에 털썩 하고 앉아 긴 호흡을 내뱉었다.
“대박이다!”
전서구가 떨어진 게 아쉬웠지만 전서에 밀마를 적어 가장 가까운 안가에 보내면 된다.
그럼 얼마 안 가서 천이각 전체에 자신의 정보가 흐를 것이고, 각주인 진명은 필요한 요원들을 지원해 줄 것이다.
형호는 자신의 직급이 몇 계단이나 상승할지 조용히 계산해 보았다.
전서를 다 쓴 그는 근처 서책을 파는 서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무 책이나 골라 사서 그 사이에 자신이 쓴 전서를 끼웠다.
책을 허름한 보자기로 단단히 묶은 그는 곧 표국을 찾기 시작했다.
백석촌이 제법 큰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아쉽게도 표국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전속력으로 경공을 펼쳐 가장 가까운 포구인 고우(高郵)까지 가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수로표국을 이용해 서책을 원하는 주소로 보낼 수 있었다.
다시 백석촌으로 돌아왔을 땐 한밤중이었다.
긴급으로 올라온 보고를 듣던 천이각주 진명의 얼굴에 모처럼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직접 영입하고 가르친 형호가 드디어 한 건 해냈기 때문이었다.
“녹봉이라도 올려 줘야겠군.”
형호가 들었다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방방 뛰어다녔을 얘기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무림맹이라 들을 수 없었다.
진명 역시 화산 제자들의 수색에 계속 참여하고 싶기는 했으나, 천이각의 각주가 무림맹을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된다는 총사의 전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 위치가 확인되었으니, 현장으로 돌아갈 명분은 충분했다.
그의 가벼운 발걸음이 총사의 집무실로 향했다.
강소성의 작은 마을에서 불쑥 튀어나온 정보는 무림맹의 것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새어 나간 것인지 안휘에서 대치 중인 구파와 육대세가에게까지 전해지고 만 것이다.
구파의 인물들을 사실상 이끌고 있다고 전해진 석운자는 육대세가와의 대치 상황을 멈추고 모든 인력을 강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육대세가의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모든 것을 즉각 멈추고 강소성으로 인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전장이 안휘성에서 강소성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있다면 서로에 대한 증오의 강도 정도랄까?
지난 넉 달 동안 두 세력 간의 증오는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말았다.
목적을 위해 서로 티격태격하던 것이 부상으로 이어졌고, 시간이 흐르자 죽는 자까지 나타났다.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까지 와 버린 것이다.
결국 두 세력 간의 감정싸움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강소성으로 인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다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쌓인 서로 간의 증오가 한꺼번에 터지고 말 것이라는 걸.
* * *
“총사님의 예상대로 부나방처럼 모여드는군.”
스무 날을 쉼 없이 달려와 백석촌에 도착한 진명은 곧바로 형호와 합류했다.
그는 요원들을 백석촌 곳곳에 배치시켜 놓고 구파와 육대세가의 인물들이 얼마나 유입되는지 알아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은 총사의 계획이다.
안휘라는 넓은 땅에서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두 세력이 이 좁은 마을에서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총사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두 세력의 힘을 줄이고 무림맹의 힘을 늘리는 것.
그러기 위해선 좀 더 많은 이들이 죽어 줘야 했다.
“저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언제 시작합니까?”
형호의 물음에 진명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어부지리라는 말도 모르느냐?”
* * *
“커…… 커컥…….”
으드…… 으드득…….
한 무인의 몸이 이상한 각도로 뒤틀리는 중이었다.
그 앞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이 의자의 턱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반대편 손가락을 기묘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신기한 것은 소년이 손가락을 기이하게 움직일 때마다 무인의 몸도 함께 꺾인다는 것이다.
이미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다 얻었음에도 무인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은 입막음의 의미가 컸지만 무엇보다도 소년이 지루해한다는 데 있었다.
해서 괴뢰사라 불리는 천응은 방금 전처럼 무인들을 잡아다 산 채로 뼈와 근육을 뒤트는 행위를 즐겨 했다.
“아니, 넌 그래도 참신한 정보를 주었으니 깔끔하게 죽여 줄까?”
딱-!
천응이 손가락을 튕기자 무인의 머리가 등 쪽으로 돌아가며 숨이 끊어졌다.
안휘성에 얼마나 있었는지 날짜를 세는 것도 잊었다.
지루할 때면 구파나 육대세가 쪽 무인을 잡아 죽였고, 다음 날엔 서로의 구역에 시체를 가져다 두었다.
그 뒤 벌어질 일은 뻔했다.
서로가 서로를 흉수라며 가끔은 보복도 해 댔다.
사람의 관절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이렇게 이간질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럼 이제 조금 서둘러야겠네.”
천응은 숙소 어딘가에 있을 친우를 불렀다.
“제갈청?”
그러자 회안의 마인이 순식간에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이제 이곳도 시시해져서 떠나야 할 것 같아.”
천응은 응석을 부리듯 제갈청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이번엔 강소성인데 그곳에 신마께서 말한 ‘씨앗’이 있나 봐. 응? 너도 새 친구가 빨리 보고 싶다구? 헤헤. 나도 그래.”
천응이 제갈청의 등에 업히며 말했다.
“가자. 강소성으로.”
제갈청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쭉 늘어지는 듯했다. 쓰는 이가 극히 드물어 이젠 전설이 되어버린 이형환위의 신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