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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61화 (61/217)

검향 61화

화산파.

비록 악인들에 의해 점거당하긴 했지만 지금 이곳은 매화가 한창때였다.

곽호는 매화가 가득 핀 매화나무 아래 돗자리를 하나 깔아 놓고 술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함께 마셔 줄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랄까?

이 화산에는 이제 강시로 제조된 마인이나 포로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속한 천상련에서 정식으로 파견 나온 무인들이 상주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곽호는 편하게 술 한 잔 마실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도 술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소년이었으니 혼자 마실 수밖에 없었다.

“……보내긴 보내야겠지.”

술잔에서 흘러나오는 매화향을 음미하던 곽호는 어젯밤 내내 생각했던 고민거리를 떠올렸다.

아홉 번째 씨앗을 개화시키기 위한 안배에 관한 문제였다.

곧이어 그는 자신과 심령으로 연결된 마인 중 하나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마인은 빠르게 경공을 펼쳐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움직이는 거 귀찮아하는 녀석인데, 멀리까지 가려는지 모르겠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하지만 확실한 건 마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 * *

화산의 도림평은 소년이 좋아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거나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그는 도림평에서 지내면서 제갈청과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가령 제갈청을 시켜 복숭아를 따오라 시켰는데 열매가 별로 없으면 복숭아나무를 뽑아 흔들게 하였다.

가끔 포로들 중 하나를 일월신마 몰래 데려와서 제갈청의 먹이로 지정하여 도망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이 잡혀서 뼈와 살이 분리되었고 소년은 그 장면을 아주 즐겼다.

오늘도 제갈청과 함께 재밌게 놀던 소년은 웬 마인이 하나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흑포의 마인은 소년의 괴뢰술(傀儡術)이 첨가되어 만들어진 것.

자신의 곁에 있는 제갈청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 것이었으나, 그래도 보통의 강시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한 마인의 입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 오랜만이다. 괴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신마님.”

소년이 토라진 얼굴로 투덜댔다. 그러자 마인을 통해 말하던 곽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다. 천응(天鷹).

천응이라는 본명으로 불린 소년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아,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뭔데 그래요?”

-내가 씨앗을 하나 뿌려 놨는데, 그게 싹이 날 시기인데도 싹이 안 나네. 네가 가서 좀 흔들어 줘야겠다.

천응은 ‘씨앗’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러한 씨앗 중 하나였으니까.

팔대호법 중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이 그런 식으로 천상련으로 넘어왔다.

“그 씨앗 어디 있는데요?”

-글쎄…… 마지막으로 감이 끊긴 게 두 달 전 강소성이더구나. 나머지는 알아서 찾아보도록 해라.

“그래요, 찾는 재미 정도는 있어야죠.”

곽호가 보낸 마인이 사라지자, 천응은 자신의 곁에 서 있던 제갈청의 팔에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새로운 친구래. 어떤 사람일지 기대되지 않아? 응? 응? 제갈청?”

제갈청이라 불린 이 회안의 마인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성적인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응의 괴뢰술은 그런 인간적인 부분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다.

제갈청은 천응을 등에 업었다. 그의 신형이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七章

“와! 우와! 우와아아아!”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탄성이 커졌다.

옆에서 듣던 엽궁은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후볐다.

“이제 걷는 게 어렵지는 않지?”

“네! 방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젠 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보실래요?”

초운이 정말로 뛸 것처럼 자세를 취하자 엽궁과 그 곁에 있던 황현이 깜짝 놀라 손을 흔들었다.

“안 돼!”

“안 된다, 이놈아!”

자세를 푼 초운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밝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십년감수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엽궁과 황현이 초운을 향해 다가가더니 머리통을 한 대씩 쳤다.

“이건 정당한 응징이다.”

“사형을 놀리다니…….”

초운이 뒤통수를 감싼 채 쪼그려 앉았다.

“윽. 환자를 때리다니.”

“시끄럽다. 하여간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정도는 괜찮을 테니 밖에 나갔다 오거라.”

“정말요?”

엽궁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나가기 싫으냐?”

“그럴 리가요!”

석 달이 넘도록 밖에 나가지 못했으니 기쁠 수밖에…….

초운은 위에 아무거나 걸치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황현은 따라나서지 않고 엽궁과 방에 남았다.

그는 초운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엽궁에게 말했다.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뭐가?”

“일생일사의 거래…… 말입니다.”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소리를 참 쉽게 하는구나. 그리도 죽고 싶으냐?”

황현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부정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엽궁은 그러한 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난 죽고 싶어 하는 놈 죽여줄 만큼 자비심 없다. 딴 데 가서 알아봐라. 아니면 어디 산에라도 올라가서 목 매달고 혼자 뒈지든가.”

엽궁이 차가운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황현이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왜 죽이지 않는 겁니까. 당신은 일생일사…… 한 명을 살리면 한 명은 반드시 죽이는 생사신의지 않습니까.”

엽궁이 그런 그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지옥이나 다름없었지. 거리엔 병에 걸린 거지 아이들이 들끓고, 무인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싸움만 해 댔다. 거기에 휩쓸려 죽고, 병 걸려 죽고, 다쳐서 죽고, 맞아 죽고, 터져 죽고, 급살 맞아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오직 죽음뿐인 곳이었다. 때문에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지.”

일생일사의 규칙은 거기에서 나왔다.

남들이 물을 땐 염라대왕의 시기를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런 규칙을 만든 거라 둘러댔지만, 정확히는 무림인에 한정된 규칙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양민을 죽인 적이 없었다.

오직 무인에게만 그 규칙을 적용시켰다.

그가 익힌 것은 의술이면서도 무공인 천리소(天理昭).

일생일사와 같은 규칙을 만들어 지킬 정도는 되었다.

병이나 재해와 같은 죽음의 요인은 얼마 되지 않으니, 적어도 무인에 의해 죽는 사람들만 줄여 보자.

그런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살았더니, 사람들은 괴짜라 부르면서도 생사신의라는 과분한 별호를 지어주었다.

일생일사의 규칙도 실제로 지켜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소중한 누군가가 죽었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것뿐이지 실제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죽음을 위장하는 거랄까?

나중에 거짓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상대 또한 뭔가 뉘우치는 게 있었고, 없으면 있을 때까지 신나게 패거나 무공을 전폐시켜 버릇을 고쳐 주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늘 그렇듯 소문이 좋게 포장되어 퍼지는 경우가 드물다.

퍼지면 퍼질수록 악독함이 가미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것이 현재의 생사신의를 만들어 냈다.

엽궁은 품에서 손바닥만 한 옥병을 꺼내 황현의 손에 쥐어주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아. 대체 뭐가 그리 괴로운지 모르겠다만 쓸데없는 생각 말아라. 그리고 이건 초운이 먹어야 할 약이다. 하루에 한 알. 딱 백 일만 네 손으로 먹이거라. 그럼 원래의 몸으로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죽고 싶거든…… 그거 다 먹이고 난 후에 죽든가. 허험.”

엽궁마저 나가 버리자 방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황현은 옥병을 부서져라 쥐며 생각했다.

겨우 백 일이었다.

백 일을 더 산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밤마다 꿈에서 죽은 사부가 찾아온다.

사제들도 찾아온다. 하지만 얼굴이 없다.

아니, 감히 꿈에서조차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차라리 적들에게 쫓길 때가 더 좋았다.

그땐 악몽은 꾸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악몽 같았으니 당연했다.

다만 그때는 삶에 대한 의지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었다.

오직 편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옥병을 품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초운이 잘 걷는지 걱정이 되었다.

* * *

“안녕하세요!”

언젠가부터 백석촌의 저잣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인사였다.

저잣거리의 사람들 모두 처음엔 누군가 했다.

장사꾼들이야 같은 마을에서 벌써 십수 년째 장사 중이니 다들 서로 잘 알았다.

때문에 저렇게 크게 인사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알아보니 바로 생사신의의 환자란다.

늘 같은 시각에 장원 밖으로 나와 저잣거리를 걸으며 구경하는 이 청년은 인사성이 너무 밝아서 처음 보는 사람이든 많이 본 사람이든 인사부터 하고 봤다.

처음엔 그 같은 인사가 불편하게 느껴지던 사람들도 그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나자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청년이 나오는 걸 은근히 기대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은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저잣거리의 여인들은 부모를 잃고 평생 산에서만 살았다는 청년의 기구한 운명을 듣는 것이 좋았고, 사내들은 청년의 막내 동생 같은 순진함을 좋아했다.

그러던 와중에 하나둘씩 사람들은 서로에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평생 봐 왔던 사람임에도 청년처럼 밝게 인사하니 분위기가 훈훈했다.

그저 이웃일 뿐이던 이들이 진짜 이웃이 되었다.

서로 모르던 면을 발견하고 웃고, 울고, 싸워서 화내고…… 다시 웃게 되었다.

겨우 인사 한마디였을 뿐인데 말이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장본인은 바로 초운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초운을 소소공자라 부르게 되었다.

우연찮게도 꽤 그리운 별호로 불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슬프다기보다는 오히려 좋았다.

조금이라도 그 아이들을…… 비참히 죽어버린 불쌍한 사제들을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이 아니면 누가 그 아이들이 이 세상에 있었음을 기억해 주겠는가.

“쌀집 아저씨 안녕하세요! 객잔 아줌마도 안녕하세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뭔가 삶에 활력을 전해 받는 느낌이랄까?

그런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산에서만 살아와서 그런지 그런 것들이 오히려 눈에 잘 들어왔다. 자신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초운은 열심히 사는 인간의 삶에서 빛을 보았다.

때론 힘들고 아파도 쉽게 꺾이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삶은 아름다웠다.

화산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광경이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렇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니 초운은 점점 변해 가고 있었다.

특히 정신적인 부분의 변화가 아주 컸다.

좁은 화산이 아닌 일부나마 세상을 알아버린 만큼 사람으로서의 그릇이 넓어졌다. 덕분에 얼굴에도 여유가 묻어났다.

“또 뭘 그리 잔뜩 가지고 오는 것이냐.”

산책을 마치고 장원으로 돌아온 초운을 바라보던 엽궁이 인상을 찌푸렸다.

초운은 가끔씩 저잣거리의 상인들에게서 이것저것 받아 오는데 대부분이 먹을거리였다.

한데 오늘은 엽궁이 인상을 써야 할 정도로 그 양이 과했다.

야채며 과일이 한 보따리나 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일을 모른다고 했더니 이렇게나 많이 주시던걸요.”

“음…….”

생일을 모른다고 하니 엽궁조차도 그가 안쓰러워졌다.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까지 빠져들면 안 되지. 안 돼. 언제고 저놈의 독특한 기질을 한번 연구해 봐야겠군. 뭐가 있기에 사람들이 그리도 따르는지 말이야. 혹 자기도 모르게 무서운 섭혼공을 익히고 있는지도…….’

의원으로서 연구욕이 끓어오르는 중인 엽궁이었다.

초운은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곤 재빨리 두리번거렸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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