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59화
五章
초운을 등에 업고 천으로 단단히 동여맨 황현이 서평을 향해 말했다.
“이쯤 해서 찢어져야 할 것 같군. 그동안 고마웠다.”
“무슨 헛소리야?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서평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정말로 억울한 듯 보였다.
한쪽 다리를 좀 절긴 하지만 꽤 준수한 외모인데다, 항상 좋은 옷에 장신구를 차고 다니는 녀석이 지금은 산발한 머리에 여기저기 구멍이 난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었다.
황현은 이곳까지 따라와 준 서평이 기특해 보였다.
그는 서평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 어? 뭐, 뭐하는 거야! 가, 감히 종놈이 주인의 머리를…… 건방지게.”
서평이 얼굴을 붉히며 투정을 부렸지만 그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정이 든 건지…… 황현은 그가 친동생처럼 귀여웠다.
“난 이제 네 하인이 아니야.”
“……알고 있어.”
황현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가 서평에게 좋은 감정을 담아 웃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맙다. 우리가 곁에 없으면 널 건드리진 않을 거다. 안휘에는 서가장 소속의 상회가 많으니 그곳에 부탁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문제없을 거고.”
“신의를 만나면 나 없이 어떻게 설득하려고.”
“일단 만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팔 예정이니 염려 말아라. 그의 별호가 일사일생(一死一生)이라 했으니 하찮은 목숨이라도 받아는 줄 테지.”
“장난이 아냐. 그놈은 정말로 죽일 거야! 하지만 내가 가면 안 죽어도 된다니까? 정말이야!”
“…….”
하지만 황현의 뜻은 확고했다.
그의 표정에 묻어 있는 단호함을 읽은 서평은 업혀 있는 초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왜 이 녀석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거지?”
“그러는 너는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냐.”
서평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다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막연히 도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대답을 못해 머뭇거리는 서평을 향해 황현이 말했다.
“그저 마음이 일어나니 행했다. 그저 그뿐이야. 도사가 움직일 이유로는 차고 넘치는 것이지.”
“…….”
황현이 등을 돌렸다.
“이제 가 봐. 이별은 짧을수록 좋은 법이다.”
“하지만…….”
서평이 아쉬움을 담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현이 그의 말을 막았다.
“널 돌봐 주면서 초운까지 지킬 여력이 없어. 내 곁에 있다간 개죽음당할 뿐이야…….”
‘적의 손에 죽든…… 미쳐 버린 나의 손에 죽든…….’
황현은 서평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죽는 게 보고 싶지도 않았다. 오래된 은원 따위는 신기하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평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볼 뿐 더 이상 잡지는 않았다.
“서 사형…… 살아요.”
언제 깨어난 건지 황현의 등에 업혀 있던 초운이 고개를 돌려 서평을 향해 웃어주며 말했다.
“바, 바보야. 이 몸이 쉽게 죽을 성싶으냐! 장왕의 장력에 맞고도 살아난 몸이야! 이 서평은!”
서평은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울먹이며 외쳤다.
“네놈들 같은 건 이제 다시 돌아와도 안 받아 준다! 가다가 넘어져서 코나 깨져 버려!”
멀리서 황현이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어깨 위로 하나뿐인 손을 들고 흔들었다. 초운 역시 가누기도 힘들 텐데 손을 들어주었다.
그것을 본 서평이 젖은 목소리로 더 크게 외쳤다.
“이 의리 없는 자식들아! 가지 말란 말이야!”
하지만 이내 그들의 신형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황현이 경공을 펼친 것이리라.
마음이 공허해졌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그저 악연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사라지고 나니 빈자리가 너무 컸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쳇!”
짧게 투덜대던 서평은 차마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리를 절뚝이며 천천히 걷던 그는 왜인지는 몰라도 걷는 동안 복잡하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소가죽 위에 그려진 지도를 살피던 중년인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안휘 전체에 천라지망이 펼쳐졌다고 봐도 좋을 듯하군.”
“육대세가도 그렇고, 구파 놈들도 그렇고 다들 상당히 다급한가 봅니다. 각주, 벌써부터 지들끼리 코피 나게 싸우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밝은 표정의 청년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일월신마…… 과연 무서운 자다. 아마도 이런 다툼들까지 다 계산에 넣고 협상을 한 거겠지.”
“정말이지 백월성이나 성천궁의 멍청이들과는 차원이 다르군요. 제갈 총사께서 경계하실 만해요.”
지도를 접어 품에 넣은 중년인이 동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우리의 임무는 그 아이들을 회유하거나, 다른 놈들은 못 잡게 하는 것. 찾아내었느냐. 형호.”
“물론입니다.”
형호라 불린 청년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가자.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이기에 무려 한 달 동안 우리 천이각은 물론이고 구파와 육대세가의 눈까지 피해 다닐 수 있었는지 얼굴을 보고 싶구나.”
“용모파기 보면 되잖아요.”
“……시끄럽다.”
안휘성 정원(定遠).
바로 형호를 비롯한 천이각의 요원들이 한 달 동안 발품을 팔아 겨우겨우 알아낸 곳이었다.
반나절을 걸어 어느 이름 모를 야산에 도착한 두 사람은 산 중턱에서 작은 초옥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이냐?”
“틀림없습니다. 우리 측 녀석들 외에는 근처를 다녀간 녀석들도 없고…… 몸을 숨기기에 완벽한 곳입니다. 이 근방 출신의 요원이 없었다면 다들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게다가 아랫마을에 사는 약초꾼이 용모파기를 확인해 주었답니다. 용모파기와 꼭 닮은 녀석들이 초옥에서 나오는 걸 봤다고.”
“음…… 들어가 보자.”
중년인이 말하자 형호가 앞장서서 초옥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외쳤다.
“계시오!”
초옥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둘 다 무공의 고수라 집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형호가 다시 소리를 높였다.
“계시오!”
그러자 잠시 후, 초옥 안쪽에서 누군가 나오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삐걱---!
잠시 후 원래는 푸른색이었을 헐렁한 도포를 입은 한 사내가 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뉘시오.”
“천이각의 각주, 진명이다.”
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 사내가 히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켁!”
부지불식간에 목젖을 잡힌 사내는 문밖으로 끌려 나왔다. 형호가 놀란 얼굴로 중년 사내 진명을 불렀다.
“각주님!”
“왜.”
진명이 심드렁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형호가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긴, 심문하려는 거지.”
진명은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형호가 되물었다.
“심문이요?”
“이놈은 가짜거든.”
“헉!”
형호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그렇다면 자신과 수하들이 조사한 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진명이 다시 말했다.
“용모파기에 의하면 두 놈 모두 키는 육 척이 넘는다. 한데 이놈은 오 척이 조금 넘을 뿐이야. 결국 안에 있는 게 누가 되었든 가짜라는 얘기지.”
형호가 사내의 턱을 쥐고 얼굴 이곳저곳을 살피며 말했다.
“꽤 닮았는데 말입니다.”
“추적에 혼란을 주기 위해 닮은 녀석들을 찾은 거겠지. 문제는 어떤 놈들이 이런 짓을 했냐는 건데…….”
형호는 가짜를 무릎 꿇린 뒤 초옥의 안에 들어가서 또 다른 사내를 데리고 나왔다.
“아이고, 한 번만 살려주십쇼. 뭐든 다 말하겠습니다요.”
둘 다 하는 말은 비슷했다.
형호는 그런 그들의 다리뼈를 사이좋게 부러뜨린 뒤, 원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켰냐.”
“어떤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돈을 주면서 이런저런 분장을 하고 한 달 정도만 어디 숨어 있으라고요.”
“이름은 알고?”
“모…… 모르겠습니다.”
형호는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칼을 하나 꺼냈다.
과일을 깎는 칼이었는데 얼마나 날카로운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 칼이 과일만 깎는 게 아니거든. 너, 백정들이 어떻게 소가죽 벗기는 줄 아냐?”
형호가 칼을 혀로 핥으며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소리쳤다.
“정말로! 정말로 모릅니다! 몰라요! 생각나는 거라곤 다리를 전다는 것뿐입니다. 돈을 줄 때도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어요.”
“아…… 그래?”
자신의 칼에 과도한 애정 행각을 벌이던 형호는 허리춤의 주머니에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심문을 받던 두 사내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형호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나 되니까 다리만 부러뜨렸지, 다른 놈들이었음 죽었다. 알았어? 그러니 공짜 좋아하지 말고 성실히 살아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내는 이마가 깨져라 절을 하고 또 했다.
형호는 그런 그들을 한심한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진명이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진명이 말했다.
“저런 놈들이 한두 놈이 아니었던 거야.”
“네?”
진명이 하늘로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고 형호를 바라보았다.
“저런 놈들이 한두 놈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구파의 눈도, 육대세가의 눈도 다 피할 수 있었던 것이지.”
“에? 그렇다면…….”
“떡밥을 사방에다 뿌렸는데 물고기가 안 모이겠느냐?”
“윽!”
졸지에 물고기가 되어버린 형호는 인상을 구겼다.
“그렇다면 그놈들은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이미 안휘엔 없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 한 달이 넘게 헛수고를 한 거지.”
“그럴 수가!”
형호가 패배감에 사무쳐 절망 중일 때 진명은 오히려 크게 웃었다.
“이 진명이 어린놈들에게 농락을 당하다니. 하하하하! 이젠 오기로라도 놈들을 잡아야겠구나!”
“맞습니다! 오기로라도 잡아야지요!”
그의 말에 자극이라도 된 것인지 형호가 승부욕을 불태웠다.
“그런데 어디부터 살핍니까? 이미 살필 만한 곳은 다 살펴봤는데…….”
“안휘의 외각부터 바깥쪽까지 샅샅이 뒤져야지. 어서 전서구를 날려라.”
“알겠습니다.”
형호가 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전서구를 날리기 위해서였다.
같은 동료일지라도 전서구를 날리는 위치는 알리지 않는다. 천이각의 규칙이었다.
홀로 남은 진명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이는 마치 먹이를 쫓는 사냥꾼의 눈빛과 같았다.
“아주 재밌게 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