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57화
그사이 남궁천이 총사에게 물었다.
“정말 끼어들지 않을 생각이오?”
“맹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무림맹주라는 직위는 말 한마디에도 상당한 무게가 실리는 법이다.
때문에 확실하지 않으면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한데도 직접 말했다는 것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음을 뜻했다. 적어도 남궁천에게는 그리 보였다.
“……좋소.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하였지만 당신들이 구파를…… 오대검파를 돕지 않는 것만 확실하다면 나는 이만 물러서겠소.”
남궁천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일어섰다.
구파가 일월신마에 의한 습격으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알지만, 그래도 명문정파였다.
결코 무시 못 할 저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림맹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한 것인데 실패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편 역시 무림맹을 끌어들이지 못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나 할까?
약간은 공정한 입장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석운자 또한 일어섰다.
“맹주의 선택으로 인해 명문정파 간에 피바람이 불 것이오. 그리 되면 결국 천상련만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란 걸 왜 모르시는 것이오.”
송산이 눈을 감은 채 답했다.
“미안하오. 그 말밖에 해줄 수가 없구려.”
“…….”
석운자는 송산의 사과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아니, 풀릴 수가 없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말없이 돌아서 떠났다. 남궁천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송산은 한숨을 내쉬며 제갈정오에게 물었다.
“이러면 되었나?”
“잘하셨습니다. 맹주.”
“어느 쪽이든 그 화산의 제자를 잡게 될 텐데, 우리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겠는가?”
“절대 튀지 않을 겁니다.”
제갈정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이에 송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찌도 그리 확신을 하는지 모르겠군.”
“왜냐하면 그 화산의 제자를 우리 손으로 잡을 예정이니까요.”
“지금 내가 내 입으로 한 소리를 번복하라는 건가?! 아니, 그보다 우리가 나서야 할 이유가 뭔가!”
송산이 깜짝 놀라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총사인 제갈정오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주께서 저들에게 하신 말씀은, 둘 중 어느 한 곳의 편을 들지 않겠다는 것이지, 끼어들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음…… 그게 변명이라면 말장난이 될 뿐이네.”
“그렇지요.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어느 쪽을 도와도 맹에는 이득이지만 대신 얻은 만큼 맹의 힘이 분열된다는 것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제대로 설명을 해 보게나.”
제갈정오는 누가 들을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구파를 도우면 육대세가는 후계자 문제로 내부에서 혼란에 빠질 테고 구파는, 아니 정확하게 오대검파는 성세를 회복하게 되겠지요. 반대로 우리가 육대세가를 돕는 경우, 제자를 잃은 오대검파는 더욱 어려워지겠으나, 우리는 육대세가를 무림맹에 편입시킬 수 있어 좋습니다.”
그 정도는 송산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제갈정오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구파가 성세를 회복하면 무림맹은 언제나 이인자가 됩니다. 육대세가를 편입시킨다면 무림맹이 반으로 쪼개질 수도 있습니다. 무림세가들의 권력욕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요?”
“음…….”
송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젊은 시절 몇몇 무림세가들과 은원이 얽혀 고생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지닌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제갈정오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구파를 돕는 것이 낫지 않았겠나?”
“아닙니다. 그들이 있는 한 무림맹은 영원히 발전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은 힘들 때 무림맹이 아닌 구파일방부터 떠올립니다. 백성을 등에 업는다…… 그게 얼마나 큰 힘인지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구파가 몰락하면 백성의 지지가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음…….”
“하지만 이번 일에 둘 다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송산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무공 한 자락 모르면 어떠한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내는 말 몇 마디로 천하제일의 무인을 감탄하게 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구파가 몰락하면 그 지지 세력을 우리가 흡수할 수 있고, 육대세가가 후계자 싸움으로 약해지면 그들의 기반을 우리가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렇군…… 그랬어. 허허. 늙어서 그런지 이젠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맞추기 힘들구먼그래.”
“아직 정정하십니다. 아니, 앞으로 이십 년은 더 정정하셔야 합니다. 맹주님. 그래야 제가 시행하려는 것들을 제대로 밀어주실 수 있지요.”
“끄응…… 은퇴도 내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구만.”
송산은 타고난 무인이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무에 대한 열정만 가득한 자인 것이다.
그런 그가 무림맹주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총사인 제갈정오의 노력이 컸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무림맹을 관리하고 있는 것은 무림맹주 송산이 아닌 총사 제갈정오와 그 일족들이었다.
권력에 큰 관심이 없는 맹주는 제갈정오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를 자처했고, 덕분에 맹주 위에 오른 후 십 년여 동안 제갈정오와 함께 많은 개혁을 이루어 냈다.
때문에 그가 총사를 믿는 마음은 아주 단단한 바위와도 같았다.
송산이 노파심에 한마디 했다.
“그들도 눈과 귀가 있을 터. 우리의 움직임을 모르겠는가?”
“천이각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런 때를 위해서입니다.”
제갈정오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를 오랜 시간 알고 지내 온 송산은 그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아주 못된 계략이 튀어나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 *
황현이 호북의 마성(麻城)에서 소림의 사대금강을 죽이는 바람에 육로는 포기해야 했다.
본래는 합비에 들러 화산의 속가들이 많은 남궁세가의 도움을 얻으려 했지만 소림의 사대금강을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죽여 버린 상황이다.
이대로 남궁세가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남궁세가에 폐를 끼칠 수도 있는 상황…….
때문에 일행이 택한 것은 바로 수로였다.
안휘의 안경(安慶)에서 배를 얻어 타고 강소성 양주(揚州)까지만 흘러 들어간다면 목적지인 흥화(興化)는 지척이라 할 수 있었다.
수로는 빨리 갈 수 있는 대신 오가는 사람도 많고, 물 위에선 도주할 수도 없어 되도록 선택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초운의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오문에 수소문한 결과, 소림의 추적대가 편성되어 사대금강을 죽인 흉수를 찾아 안휘로 향하는 중이라는 정보까지 얻었다.
때문에 수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평은 객방의 식탁 위에 차려진 밥을 먹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한걸.”
“식사가 맛이 없어도 참아.”
황현이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있는 초운의 몸 상태를 살피는 중이었는데, 서평이 또 음식 투정을 부리는 듯하여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음식이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게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젠데?”
“하오문에서 사온 정보 말이야…… 아무리 소림사라지만, 그렇게 빨리 대처할 수 있는 걸까?”
“사대금강이 죽었으니 당연하지.”
그의 대답에 서평이 고개를 저었다.
“소림에서 바로 내려온 거라 하기엔 너무 빨라서 그래. 네가 그들을 해치운 게 겨우 아흐레 전이야. 시신을 소림으로 옮기고, 사인을 알아내고, 흉수에 대해 조사하고…… 아무튼 명문정파다운 길고 답답한 절차가 있을 텐데, 그들은 벌써 대강이나마 우리가 간 방향을 알아내고 안휘로 오는 중이야. 그건 이미 흉수를…… 아니, 우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뜻도 되는 거지.”
서평의 말을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황현은 그가 앉은 식탁의 반대편에 마주 앉았다.
황현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서평도 밥그릇을 내려놓고 다시 얘기했다.
“……정말 이상하군.”
황현은 자신이 승려들을 오해해서 죽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사대금강의 조위이라는 승려는 확실히 수상했다.
화산의 제자가 아닌 이상 알 리가 없는 초운의 속명을 알고 있는 것도 그랬고…….
무엇보다 그 당황하였을 때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이 문제였다. 뭔가 들켜서는 안 될 것을 들킨 것처럼 보였다고 할까?
곽호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잘 알고 있는 황현으로서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소림의 승려가 아닌 곽호의 조력자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들이 쓰는 무공…… 그 무공은 확실히 진짜였다.
“소림이라…… 소림이 우리를 쫓는 이유는 무얼까.”
서평이 중얼거리자 황현이 고개를 돌려 침상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아냐. 초운이지.”
“초운?”
“그래…… 어찌 한 건지 모르지만, 소림을 움직인 것은 일월신마의 짓일 가능성이 커. 그는 초운에게 꽤 집착하고 있었거든.”
서평은 과거 식당에서 밥을 차려 주던 곽호의 훈훈한 모습을 떠올렸다. 이미 황현에게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자를 악명 높은 일월신마와 연계시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너무 비약하는 거 아니야?”
서평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초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다.”
* * *
석운자는 무당에 돌아오자마자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초운이란 아이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것과 이미 소림에서 추격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새삼 소림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피어났으나, 사대금강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이어서 듣게 되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황현이라는 녀석도 화산의 제자 아니었나?”
그러나 그가 채 화를 내기도 전에 그의 사백이자 무당의 장문인이기도 한 운현 진인이 물었다.
일월신마와 직접 협상을 한 만큼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석운자였기 때문이었다.
사백 앞에서 화를 내기도 뭐했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힌 석운자가 곧 대답하였다.
“네, 맞습니다. 사백…….”
“음…… 소림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는지 모르겠군. 자기 사문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잘 타일렀다면 분명 도왔을 터인데…….”
“타이르기엔 늦은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사대금강을 살해했다 하니…….”
“어허…… 이 일은 되도록 피를 보지 않고 조용히 해결해야 하는 일이건만…….”
석운자는 송구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곽호와 수치스러운 협상을 체결하고 돌아온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명문정파…… 그것도 도문에서 사악한 마두에게 죄 없는 청년을 넘겨야 하는 일은 골백번 생각을 해 보아도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장문인의 얼굴에 떠오른 근심 어린 표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하시게, 벌써 아까운 목숨이 넷이나 가지 않았던가…….”
장문인인 운현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세상 물정에 대해 어두웠다.
소림의 각오를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는 석운자로서는 운현자의 소리가 답답할 만도 하였으나 아니었다.
그는 운현자의 인간적인 면을 존경했다.
남과는 다른 순수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좋아했으며, 무인으로서 이룬 경지를 부러워했다.
그가 원하는 인간의 길을 걷는 자가 바로 운현자였다.
석운자는 그에게 최대한의 존경을 담아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처소를 빠져나왔다.
처소에 홀로 남은 운현자는 고개를 돌려 방의 구석을 바라보았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대금강이 죽었으니 이젠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그의 시야가 닿는 곳에는 그저 오래되어 때가 탄 벽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못난 후학에게 지혜를 빌려 주십시오.”
운현자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자 얼마 후 벽과 운현자 사이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검이 하나 삐져나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검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종잇장처럼 얇은 틈이 생겼고 그 사이에서 푸른 도포의 노인이 하나 걸어 나왔다.
소매에 매화가지가 새겨진 도포…… 화산의 것이었다.
노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운현자의 반대편에 앉았다. 운현자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자 노인 또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걱정 마시게…… 이미 천기는 예정대로 흐르기 시작하였으니…… 좋든 나쁘든 순리대로 하게나.”
“하지만 어르신…… 위험합니다. 소림은 그 근본이 불문이긴 하나 용서를 모르는 곳입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운현 진인은 조금 답답했지만, 큰 뜻이 있겠거니 하는 마음에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럼 이만 가보아야겠네, ‘하계’에 너무 오래 내려와 있었어. 스승님과 사형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네.”
운현자는 그를 보내는 것이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이 신선(神仙)을 붙잡아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매화도포를 입은 노인의 신형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정수리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뻗어 나와 하늘로 향했다. 하나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는 운현 진인 정도밖에 없었다.
“천기가 정해 준 시련은 그 아이를 성장시켜 주겠지.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 아이를 도울 수 없으니 자네가 도와야 한다네. 자네야말로 선근을 올바른 길로 이끌…… 마지막 안배. 부디…… 가르침…… 초운에게…….”
노인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빛의 기둥의 기운에 이끌려 승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운현 진인은 그 모습을 경외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청명자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