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향-50화 (50/217)

검향 50화

序章

바퀴가 돌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덜컹거리며 느껴지는 불편함에 문득 눈이 뜨였다.

물에 먹이 번지듯 희미한 시야.

여러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한 사내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팔이 없는 듯 펄럭이는 소매가 외롭게 보였다.

“당신은…….”

초운의 마른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그러자 사내가 급히 고삐를 잡아당기며 수레를 멈추었다.

“깨어난 것이냐!”

“화, 황현 사형……?”

분명 황현이었다.

사문에서 자신을 좋게 봐준 몇 안 되는 사형제 중 한 명.

그러나 유기나 악휘구만큼 유대감이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의 앞에 있단 말인가. 자신은 분명…….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머릿속이 몽롱하고 기억이 희미했다. 게다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나 보구나. 상처와 내상이 깊어 앵속(罌粟:양귀비)을 복용시켜서 그럴 것이다. 조금, 아주 조금만 참거라.”

그리 말한 황현의 손끝이 초운의 수혈을 짚었다. 초운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一章

……검과 검이 마주치자 푸른 하늘을 머금은 허공에 시뻘건 혈화가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젊은 도인의 팔과 가슴의 살갗이 찢겨 나갔다.

그러나 젊은 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화구변(梅花九變)을 펼쳤다.

처로(悽路)라는 이름이 붙은 그의 애검에는 절정에 달한 변화가 새겨졌다.

이는 화산이 자랑하는 환검(幻劍)의 오의.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의 일부였다.

곽호는 흑기(黑氣)로 몸을 감싸 절대경에 달한 자신의 호신강기를 마음껏 자랑했다.

자색의 검기는 흑기를 꿰뚫지 못하고 간단히 스러졌다. 하지만 젊은 도인. 초운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꾸준히 검초를 날리며 곽호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밀리는 듯한 인상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에 혈투를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금 살아남은 이들 중에 곽호만 한 경지에 이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당의 소요자가 무극의 초입에 이르렀다지만 같은 절대경이라도 지금 곽호가 보여 주는 것은 그 수준이 달랐다.

만약 그들 눈앞에서 곽호를 막아 주고 있는 저 젊은 도인이 패해 버린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리라.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천 단위가 넘는 마인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산의 몇몇 장로들이나 일대제자들이 분발하여 싸우고는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포기한 채 그저 곽호와 초운의 대결에 모든 것을 걸고 있을 뿐이었다.

“봐라. 저 이기적인 쓰레기들을……!”

챙-!

흑기가 맺힌 검으로 초운의 검을 후려치던 곽호가 말했다. 하지만 초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 어린 사제들의 피를 희생양으로 삼았으면서도, 제 목숨이 아까워 네게 기대를 거는 저 눈빛들을 봐라.”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음성이었다. 초운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검초를 뿌렸다.

“날 따른다면, 저런 쓰레기들을 모조리 치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내 사제들을 죽인 건 당신이지. 저들이 아냐.”

초운이 모처럼 입을 열자 곽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래?”

순간, 그의 검 끝에서 뻗어 나온 흑기가 중인들을 향해 뿌려졌다.

콰콰콰콰콰!

살갗이 잘리는 수준이 아니라 톱으로 썬 듯 찢겨 나가며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꺄아아악!”

팔다리가 튀어 오르고 내장이 쏟아지는 처참한 상황임에도 초운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그저 곽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에 곽호가 말했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구나. 아닌 척하지만 네 녀석도 저들이 밉겠지? 죽이고 싶지?”

“…….”

그가 손을 내밀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선을 넘어라. 그리하면 인외마경(人外魔境)을 열고 마도(魔道)를 걷게 될 것이다.”

곽호는 믿고 있었다. 비록 청연자 때문에 실패했으나 이미 한 번은 열린 길, 다시 열 수 있으리라는 것을.

원래 선근(仙筋)이나 선골(仙骨)을 타고난 이는 그러했다.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어렵지, 한 번 떨어지고 나면 암흑의 끝에서부터 시작되는 유혹을 떨쳐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초운은 감정 하나 없는 눈길로 그를, 그리고 그가 저지른 짓을 바라보았다.

곽호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팍---!

가슴 어림에 차갑고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 순간, 급박하게 몸을 피했지만 완전하진 않았는지 피가 솟구쳤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를 손으로 매만지며 혀를 찼다.

“아직도 깨닫지 못한 건가? 인간이란 그 자체가 마(魔).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천륜과 인륜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버린다. 때문에 하늘은 인간을 버렸다. 극악한 마(魔)를 제어할 방법이 사라져 버린 게지. 그러니…… 이 우매한 것들에게 교훈을 내리고 다스려 줄 존재가 필요하다.”

“그게…… 당신이라고 누가 정했지.”

초운의 몸에 흐르던 자색의 기운이 더욱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곽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전신에 흑기가 터질 듯 흘러나왔다.

처로의 검 끝에서 터져 나온 순수한 강기가 곽호의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쭉 뻗어 나왔다.

꽝!

곽호의 몸이 뒤로 칠 장이나 밀려 나갔다.

하지만 초운이 도리어 피를 토해 냈다. 반면 곽호는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다 타 버린 땔감은 마지막에 맹렬히 불타오르는 법이지.”

그가 백송 진인이 안고 있는 청연자의 시신을 가리켰다.

“저 늙은이에게 검향을 보이는 게 그리 중요했나? 성치 않은 몸으로 수명까지 줄이면서 말이야.”

그의 말에 백송 진인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얼굴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굳어버렸다.

화산의 도사들은 초운에 대한 걱정 때문에, 나머지는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충격 때문이었다.

초운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남은 수명을 다 걸어도 문제 될 게 없어. 그리고 그게 내가 선택한 삶이야.”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화산엔 바보들만 사는구나.”

곽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나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면…… 죽어야 한다.”

그의 검에서 강대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등천명광검(登天明光劍).

칠대오의(七大奧義).

용승(龍昇).

그가 일으킨 흑색의 검기(劍氣)가 수십 가닥으로 나뉘더니 곧이어 사막의 용권풍처럼 회오리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선으로 회전하며 한 점에 모인 검기의 다발은 초운의 심장을 노리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초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

검 끝에서 자색의 검강이 다시 떠오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선명한 매화꽃의 형상이 유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초운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매영조하(梅影造河).”

매화형상의 검강이 수십 수백 조각으로 부서지듯 흩날려 강처럼 흐르고 선명한 매화향이 그 뒤를 따랐다.

“저것이었던가. 저것이…… 진정한 매영조하.”

지켜보던 백송 진인이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곽호가 일으킨 나선의 검기는 매화꽃에 휩쓸려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마르지 않은 내공으로 검기를 끝도 없이 뿌렸다.

파파파파파---!

하나 둘 늘어가던 검기가 이윽고 초운이 이룬 매영조하의 검기를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일으킨 흑색의 검기는 흉악한 짐승의 이빨처럼 초운의 검기를 잡아 삼키기 시작했다.

“막아 보아라. 용승(龍昇)에 이은 또 다른 오의(奧義), 천우(千雨)를…….”

그가 중얼거렸지만 그게 초운에게 들릴 리 없었다. 수없이 따라붙는 검기를 쳐 내는 것도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검기로 쳐 내는 것마저 버거워 언제부턴가 검에 기를 두르는 행위마저 포기한 채 검초만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곽호가 일으킨 일천 개의 검기는 하늘을 집어삼킬 듯 초운을 포위한 채 폭풍우처럼 내리칠 뿐이었다.

육합구궁검부터 이십사수매화검까지 초운이 아는 검식은 모조리 튀어나왔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굵디굵은 검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저 사천의 패자인 당문이 자랑한다는 암기술의 극의. 만천화우조차 지금 곽호의 검기에 비할 바는 못 되리라.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초운의 몸을 휘감고 있는 자하강기의 한 축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것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초운의 몸도…….

초운이 서 있던 땅도…….

곽호가 만든 흑색의 검기에 휩쓸렸다.

콰콰콰콰콰……!

초운이 서 있던 자리를 기점으로 반경 오 장이 폐허로 변했다.

아니 땅이 뒤집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어울리리라.

먼지로 인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초운이 살아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지켜보던 이들 중 일부는 결사항전을 위해 전의를 가다듬었고, 또 다른 일부는 절망하여 체념했다.

전의를 가다듬은 이들은 당연히 화산파를 비롯한 오대검파의 인물들이었으며, 절망한 이들은 그 외 나머지였다.

먼지가 그쳤다. 그리고 누군가의 탄성이 역병처럼 번져 나갔다.

백송 진인은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것은…… 저 아이는…… 분명……?”

곽호의 검기에 큰 상처를 입은 초운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앞에 서 있는 푸른 도포의 청년은 오른팔이 어깨까지 잘리고 한쪽 눈이 뭉그러져 있었다.

곽호가 굳은 얼굴로 청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황현…….”

* * *

황현이 비록 이대제자 중에서도 뛰어난 축에 속한다지만 절대경의 고수가 펼친 절기에 맞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곽호가 검기의 방향을 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모두 빗나간 것은 아니었기에 황현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쿨럭…….”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고 나서야 가슴이 편해진 황현은 잘린 어깨 부근을 점혈했다.

그러자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던 핏줄기가 겨우 잦아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용케 쓰러지지 않던 그가 곽호를 노려보았다.

화가 났는지 곽호는 지금까지 보이던 여유로운 표정을 버리고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놈이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이냐. 분명 중요한 임무를 주었을 텐데.”

“이미 처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대기하지 않고 왜 스승의 행사를 방해하는지 모르겠구나.”

스승이라는 단어에 황현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분명 황현의 스승은 집법원의 차기 원주인 적리자였다.

한데도 곽호는 자신이 황현의 스승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백송 진인은 문득 곽호가 말하던 ‘살인병기’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네 이놈! 감히 사문을 배신하고! 악도의 제자가 되다니!”

황현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는 출혈로 인해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져 있는 초운을 들쳐 업었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구나. 설마 그 아이를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곽호의 물음에 황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겐 스승님을 어찌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요.”

이에 곽호가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아이를 당장 내려놓거라. 그 아인 아직 나와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단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스승님은 가질 수 없다면 없애 버리는 분 아닙니까.”

“잘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지금 네가 하는 짓이 내 울타리를 벗어나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테지?”

“…….”

황현은 대답지 않았다. 대신 곽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이에 곽호가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도사들이 서른 명이나 서 있었다.

그들은 은퇴한 전대의 화산장로들로 도림평의 고(古)장로들이라 불리는 이들이었으며 화산의 숨겨진 힘이기도 했다.

곽호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이들이라면 날 막을 수 있겠지. 절정의 끝이라는 건 곧 절대의 초입이나 마찬가지니까.”

무당의 소요자는 화산의 일대제자인 적륭자와 같은 배분이면서도 무극의 초입에 들어 절대경의 영역에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절대경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문 앞을 기웃거리는 수준인 것이다.

이는 도림평의 장로들도 다르지 않았다.

반면에 곽호는 반로환동한 고수로 절대경을 이룬 지 수십 년이다.

질적인 면에서는 이곳에 있는 어느 고수도 따를 수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