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49화
짝. 짝. 짝.
비무대 위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박수의 주인공은 당연히 곽호였다.
“대단하구나. 초운아. 네가 이렇게 강하다니 이 아저씨는 놀라고 말았는걸?”
초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랬어.”
“무엇을 말이냐?”
“왜 그랬어……?”
초운이 비무대 아래에 쌓여 있는 아이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곽호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나중에 말해주마.”
그의 주변으로 다시 마인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초운은 땅에 내려 검을 들었다.
그리고 좌에서 우로 휘두르자 수십의 마인들 사이로 한일자의 틈이 생기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이 잔인한 일검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마인들 뒤편에 있던 사람들까지 베어버렸다.
“꺄아아악.”
“으헉!!”
그러나 초운은 개의치 않았다.
땅 밑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마인들을 죽이고 또 죽일 뿐이었다.
비무대 근처에 있던 백송 진인은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입에 풀칠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뗄 수도, 발에 못질이라도 한 것처럼 달려 나갈 수도 없었다.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운의 전신에 선명히 떠오르는 자색의 호신강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사부님…… 나타났습니다. 자하신공이 사부님이 어릴 때 보셨다던 것과 아주 똑같습니다. 그것을 저 아이가…… 재질이 모자라다고 쫓아내려 했던 저 아이가 펼치고 있습니다. 보이십니까…… 사부님.”
백송 진인은 실종된 사부, 청명자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적륭자는 이제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이젠 가야겠소. 더 참으려니 화딱지가 나는구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다행히 대답이 빨리 나왔다.
“나도 마찬가지였소. 그러고 보니 당신과 나는 제법 말이 통하는구려.”
무당의 소요자였다.
두 사람이 검을 뽑고 마인들을 향해 뛰었다. 청풍자가 멍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청연자는 그저 초운만을 바라보았다.
“슬퍼하고 있다.”
초운은 적의 피를 뒤집어쓰고 악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미쳐 있었다. 그 상태로 점점 더 강해지기까지 했다.
일검에 열 놈, 스무 놈이 베어 나가고 산 자, 죽은 자 할 것 없이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리고 웃었다.
사람, 마인 할 것 없이 죽이면서 웃고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것은 아니었다.
문득 어린 날 자신의 등에 업혀 화산에 오르는 초운을 떠올렸다.
자신의 등에서 안도하던 어린 생명…….
그 따뜻함이 등에 느껴졌을 때 청연자는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하늘이 눈부시다 여겼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사명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우스갯소리 하듯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휴우, 하늘의 그물은 성김이 없다 하더니…… 꼭 나한테 그물을 던지셔야 했소?”
그러나 무정한 하늘이 대답할 리 없다.
그의 신형이 초운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걸리는 마인에게는 절정에 달한, 아니 어느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절정을 뛰어넘어 절대에 도달한 청연자의 검강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인들을 핏물로 만들며 직선으로 길을 낸 이 노도사는 그들이 만들어 낸 이상한 가시에 몸이 꿰뚫려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마치 고통이 없는 것처럼 그는 웃었다.
사제인 청풍의 절규가 그의 귓가를 스치기도 하였으나 청연은 고개를 돌려 한 번 웃어 주며 다시 제 갈 길로 향했다.
그곳에는 선인이 아니라 마귀(魔鬼)로 화해 가는 자신의 아이가 있었다.
자색의 선기(仙氣)를 내보내야 할 아이가 자색의 마기(魔氣)를 쏟아 내고 있었다.
아이의 온몸엔 검은 그림자가 들러붙어 있었다.
자신이 산에서 주워온 아이…… 살린 아이…… 그리고 구원해준 아이…….
그러나 구원받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젠 내가 널 구원해 주마.”
오른팔은 곧 떨어질 것처럼 너덜너덜했고,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하얀 수염을 붉게 물들였지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폭주 중인 초운에게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자색의 검기는 청연자를 비껴가기라도 하듯 맞지 않았다.
초운의 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그가 뒤로 물러섰지만 청연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훼방꾼이 나타난 것은.
비무대에서 뛰어내린 곽호의 회색 검이 청연자의 목을 치려 했다.
그 순간 두 명의 도사가 그의 검을 막아섰다.
쩡!!!
두 도사가 딛고 있던 땅이 거미줄 갈라지듯 쩍 하고 갈라지며 굉음을 냈다.
곽호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물러섰다.
울컥!
그의 검을 막아낸 두 도사, 소요자와 적륭이 동시에 피를 토했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적륭이 입술의 피를 스윽 닦아 내며 말했다.
“당신은 절대경이라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나 보오?”
“나도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었소.”
두 명이 함께 상대했는데도 손해는 이쪽이 더 많이 보았다. 그렇다는 것은 곽호의 경지가 훨씬 높음을 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곽호는 그들의 나이에 절대경에 오른 뒤 반로환동까지 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경험도, 힘도 한 수 위였다.
“하지만 저 인간도 우리를 경계하는군.”
“정확히는 저를 경계하는 겁니다. 무극의 한 자락을 보았으니…….”
소요자의 발언에 적륭이 휘파람을 불었다.
“당신 덕분에 육왕칠사칠마의 서열이 바뀌겠군.”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허울뿐인 천하제일검은 질렸거든요. 먼저 가겠습니다!!!”
소요자가 유수행을 펼치며 곽호를 향해 태극혜검을 뿌렸다.
“앗! 치사하오!”
적륭자도 지지 않고 이십사수매화검의 매화혈우를 펼쳤다.
곽호가 노한 얼굴로 외쳤다.
“이…… 하룻강아지들이!!”
그의 검에서 흑색의 마기가 뻗어 나왔다.
과거 등천마교주가 화산의 매화검수들에게 썼다던 흑성마공(黑星魔功)이었다.
청연자가 피를 연신 토해 내며 초운을 향해 걸었다.
자색의 검기, 아니 검강은 여전히 청연자를 맞추지 못했다.
오히려 주변의 마인들이 청연자를 공격하려 하면 못 하게 막아 내기까지 했다.
초운이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리 오너라. 초운아. 이 할아비에게 오너라.”
이제 막다른 길이었다. 초운은 비무대에 등이 막혀 갈 수가 없었다.
그때 또 다른 방해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적이 아니었다.
“사백…….”
바로 백송 진인이었다.
그 또한 지겹게 싸운 듯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청연자가 그를 향해 말했다.
“괜찮네. 하늘의 사명을 행하고 있을 뿐이라네.”
백송 진인은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청연자의 표정에서 더 이상 자신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청연자가 다시 초운에게 다가갔다. 초운의 전신을 감쌌던 불길한 자색의 기운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아니, 같은 자색이라도 이젠 청량하고 맑은 기운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초운은 마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들의 마지막 울음소리가 머릿속을 완전히 헤집는 것 같았다.
“그만…… 그만!!!”
정신이 맑지 않으면 기운은 결국 악(惡)해진다.
이윽고…… 청연자가 하나 남은 팔로 초운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초운은 현실로 돌아왔다.
“하, 할아버지?”
자신의 품에서 초운을 떨어뜨려 놓은 청연이 언제나처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로써…… 사명을 다했구나.”
파하학!
청연의 가슴에서 얇고 가는 검이 한 자루 튀어나왔다. 살수들이 주로 쓰는 것이었다.
다시 시간이 느려졌다.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것은 아주 느렸다.
초운은 그것이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영겁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도망치려 한 영교는 누군가 자신의 팔목을 잡는 것을 느꼈다.
뿌리치려고 했으나 뿌리칠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초운이었다.
“미안…… 그런데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
“아, 안 돼…….”
그녀의 팔을 시작으로 전신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는 남은 손으로 불을 치며 꺼뜨리려고 했지만 결코 꺼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언젠가 보았던 삼매진화였다. 백발의 악마가 쓰던 것과는 전혀 달랐지만 효과는 비슷했다.
그녀의 피와 살이 재가 되어 날아가고 그다음 뼈가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런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초운은 마지막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슬픈 눈으로 말했다.
“미안.”
초운은 할아버지를 조심히 뉘였다.
언제 온 건지 백송 진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누워 있던 청연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 찮으냐?”
초운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괜찮은 척할 필요 없단다.”
“……괜찮아요.”
“슬플 땐 울 줄도 알아야 훌륭한 도사가 되는 게야. 넌 너무 소리 없이 울더구나.”
눈물을 흘리던 초운이 좀 더 활짝 웃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으나 웃음은 진짜였다. 그는 청연자에게 진심으로 울어 주고 또 웃어 주었다.
청연자가 다시 말했다.
“고집은…… 콜록콜록.”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용케 심장은 피했으나 치명상인 건 확실했다.
설사 그 치명상이 아니었더라도, 청연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인들에게 많은 부상을 입고 말았다.
청연이 하나 남은 손을 들어 올렸다. 초운이 그런 그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분명 아플 텐데 청연은 느끼지 못하는 듯 중얼거렸다.
“따뜻…… 하구나, 초운아…….”
“할아버지…… 가지 마세요…….”
청연은 아쉽게도 초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초운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여…… 줄 수 있…… 겠…… 느냐?”
초운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어 대답한다면 미친 듯이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보…… 여…… 다오.”
초운은 할아버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리고 백송 진인에게 맡겼다.
백송 진인이 그의 고개를 잡아 주어 청연은 초운의 등을 볼 수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 자신에게 처음 검을 쥐어 주었던 사부의 주름살투성이 손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잡지는 않았다.
손자가 보여 주는 검향(劍香)을 보아야 했기에…….
초운의 신형이 허공에 흩어지며 곽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바람을 타고 나는 향기…… 암향표였다.
쓰러지기 직전이던 소요자와 적륭이 뒤로 물러섰다.
“헉, 헉…… 황운자가 뭘 하려는 걸까요?”
“사질 말이오? 글쎄요…… 뭘 보여 줄진 몰라도 그게 곧 새 역사가 될 것이오.”
“하하하하. 너는 정말 대단한 아이다.”
“우습습니까?”
“그렇지. 애써 나와 같은 녀석이 탄생하나 했더니 아쉽게도 아니었어.”
초운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처럼 되지 않습니다. 저에겐 가족이 있으니까요.”
“저기 곧 죽어 가는 영감탱이 말이더냐?”
곽호가 청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할아버지는 죽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아요. 순리죠.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가 아닌 어떻게 살아왔느냐입니다.”
꿈과 현실을 헤매던 청연자는 초운의 목소리를 듣고 미소 지었다.
그의 꿈속에 어린 시절 부모의 시신 앞에서 울던 작은 꼬마 아이가 나타났다.
그가 아이에게 물었다.
‘너의…… 는 부끄럽게 살았느냐?’
초운이 곽호를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는 부끄럽게 사신 적 없습니다.”
꿈속에서 그가 아이에게 또다시 물었다.
‘그럼 아이야, 묻자.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럴 때 제가 하는 말은 뻔합니다.”
청연자가 꿈속에서 만난 아이와 현실의 초운이 동시에 답했다.
“살아요.”
청연자가 미소 지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초운이 검을 쳐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할아버지가 들을 수 있도록 아주 크게 외쳤다!
“매화만개(梅花滿開)!”
착각이 아니었다.
은은한 매화향이 천지 사방에 퍼져 흐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청연자는 분명히 맡았다. 손자의 검 끝에서 시작되어 흐르는 청량한 향기를…….
그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드디어 사부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주름투성이인 사부의 손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백송 진인은 체통도 잊고 소리쳤다.
“사백!! 사백!! 보이십니까? 맡아지십니까? 정말 매화향입니다. 검향이에요!”
백송 진인은 흥분한 얼굴로 초운의 등을 바라보다 자신의 품 안에서 더 이상 생기가 느껴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청연의 시신을 꼭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사백…….”
이에 초운 또한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곽호가 이를 갈며 달려들었다.
“꼴사납구나! 정(情)이란……!”
초운의 검 끝에서 십사수매화검, 아니 매화검류의 선매청고(仙梅淸孤)가 튀어나왔다. 사람 몸통보다 커다란 매화꽃의 환영이 곽호를 가로막았다.
“이까짓 거! 부숴 주마!!!”
곽호가 흑성마공을 전신에 두르며 돌격했다. 검기로 이루어진 매화꽃이 짓이겨졌다. 초운의 몸에서도 맑은 자색의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초운의 검이 맑은 검명을 울리며 자색의 빛을 뿜어냈다.
곽호의 검 또한 검명을 울리며 흑기(黑氣)를 쏟아 내었다.
두 사람의 검이 교차하며 불꽃이 튀고 차가운 금속성이 귀를 울렸다.
살기 가득한 눈동자가 지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본다.
순수한 악과 증오의 교차점에서 검날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