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47화
백송 진인은 얼굴의 한쪽이 사제의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한 눈초리로 비무대 위에 서 있는 적의 장포의 사내를 노려볼 뿐이었다.
적포의 사내 곽호가 오만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등천신교(登天神敎)의 마지막 후예이자 천상련(天上聯) 팔대호법신장(八大護法神將) 제일위장(第一位將) 곽호…… 위대한 화산 장문인께 인사 올립니다.”
목소리에 내공을 실었던 것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가 높은 비무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인지, 그의 소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곽호라는 이름은 몰라도, 천상련의 신비고수들인 팔대호법신장과 그들의 수장이라는 제일위장(第一位將)은 아주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월신마(日月神魔)!!”
관중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곽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유치한 별호라니, 내 무엇을 보고 일월이라는 별호를 넣은 거지? 남색을 즐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딱!
말하는 끝 무렵에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 여인이 소리 소문 없이 곽호의 왼편에 가 섰다.
이번에도 누군가 그를 알아보았다.
“천위살수…… 일월신마를 보필한다는 최강의 자객이야.”
“그런 설명은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딱!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또다시 비명이 이어졌다.
“그만두지 못할까!”
백송 진인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관중석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들…….
그들 대부분이 인질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인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실수하면 무고한 이들은 물론이고 함께 온 가족이나 사형제들 중에서도 누군가 다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모든 이들이 곽호의 손가락을 주목했다. 한 번만 튕겨도 반드시 한 사람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회장에 정적이 흘렀다.
곽호는 장난스럽게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정적을 즐겼다.
“아무도 없나? 정말 조용하군. 그렇지만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지. 정적. 고요함. 침묵.”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그의 말은 멀리까지 퍼졌다. 내공이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 화산엔 오천의 마인들이 있다.”
“헉……!”
누군가 신음을 흘렸지만 이번엔 손가락을 튕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공포를 즐기는 듯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강시랑 비슷한 놈들이라 수명은 좀 적지만 각각 일류에 달한 고수들에 버금가지…… 아마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기 힘들 거야. 후후후후.”
백송 진인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그는 믿는 것이 있었다.
이미 몰래 신호를 보내어 제자 하나를 집법원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집법원은 대대로 화산 제일의 무력단체.
그곳의 제자들이 펼치는 매화검진이라면 어쩌면 마인들에게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조차 간파하였는지 비무대 위의 곽호가 백송 진인에게 말했다.
“백송 진인, 집법원의 고수들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
“안 됐지만, 그곳은 이미 손을 써 두었습니다.”
곽호의 입꼬리가 찢어지듯 올라갔다.
* * *
“허헉…… 허허헉…… 헉, 헉…… 크흐흐흑.”
벽에 등을 대고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쪼그려 앉은 황현은 숨을 고르게 쉬지 못했다. 이는 지친 것도 있었지만, 그가 지금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챙그랑.
그의 손아귀에 있던 피 묻은 검이 힘없이 떨어지고, 검 위로 핏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 핏물의 주인은 매화검진의 중추를 책임지는 적리자였으며, 황현의 스승이었다.
지금 집법원의 내실 안에는 황현의 사제 둘과 적리자의 시신이 비참하게 뒹굴고 있었다. 오직…… 오직 황현만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 * *
“절대 배신하지 않는 훌륭한 살인 병기 하나를 그곳에 심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하하하.”
백송 진인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곳마저 당했다면 다른 곳들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곽호가 다시 놀리듯 말했다. 그는 양손을 펴고 손가락을 두 개 접어 여덟 개만 남겨 두었다.
“저는 그러한 말 잘 듣는 도구들을 여덟 군데나 깔아 놓았습니다. 당신의 화산파는 이제 반격할 구석이 전혀 없겠군요.”
“아직 도림평의 사숙들이 남아 있다.”
“글쎄요. 그들이 여기 와봤자 같은 운명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보십니까?”
백송 진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그들도 이 인질들 앞에서는 마찬가지리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 맞는 말이었다.
관중석 끄트머리에는 청연자와 청풍자가 함께 있었고, 그들은 마인들이 어떤 식으로 숨어 있는지까지 다 파악을 끝낸 뒤였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림자에 녹은 듯 숨어 있는 마인들은 곽호의 작은 신호에도 정확히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해서 화산 최고의 경공을 지닌 청풍자도, 그리고 사라진 청명자를 제외하고 화산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청연자도 곽호를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은 왜 이리도 기구한지, 청연자는 적막을 뚫고 들려온 한 청년의 목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청풍자도 마찬가지였다.
“곽…… 아저씨?”
초운의 목소리가 곽호의 귀에 스며들었다. 그의 입가에 다시 한 번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二十章
“하하하하하하하.”
앙천광소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의 커다란 웃음에 비무대가 부르르 떨리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기세만으로도 비무대 가까이 있던 관중들 중 무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약한 이들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절대경…… 인가?”
가까이 있던 백송 진인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천운이 닿아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절대경.
오늘 화산에 길보다 흉이 많음을 깨달았다.
화산의 유일한 절대경 고수인 청명자는 몇 달 전에 실종되었고, 도림평의 고수들 또한 인질들 덕분에 별 소용이 없는 상황.
설사 인질을 무시한다 치더라도, 저 절대경의 고수를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백송 진인은 문득 저 곽호를 웃게 만든 청년, 초운을 바라보았다.
관중석의 끝에 있던 초운을 발견한 곽호는 난데없이 광소를 터뜨렸고 자신의 솜씨를 여지없이 발현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초운과 눈을 마주치더니 검지를 들어 앞으로 뻗었다. 검지가 향하는 대상은 바로 초운이었다.
그러자 초운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상에 존재하는 관중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크악!”
“꺄아아악!”
비명과 경악성, 그리고 핏물이 난무했다.
“하지 말아요!!”
초운이 놀라 소리쳤다. 비무를 보러 왔는데 갑자기 곽호가 비무대 위에 오른 것도 이상하고, 그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도 이상했다.
자신이 아는 곽호는 다정하고 상냥한, 음식이 맛있는 아저씨였다. 절대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 말란 말이에요!!”
초운이 다시 한 번 소리쳐 봤지만, 내공이 제대로 실리지 않으니 목소리가 제대로 닿을 리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의 비명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
이윽고 초운에게로 통하는 일직선의 길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야말로 시체의 길이었다.
곽호가 말했다.
“이리 오너라.”
초운은 슬픈 눈으로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시체들의 길을 걸었다. 뒤에서 어린 사제들이 그를 붙잡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으리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죽은 시신들을 차마 신발을 신고 밟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을 벗고 맨발로 길을 걸었다.
질퍽한 핏물이 발을 적시고 뼈가 발바닥을 찔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비무대 밑까지 왔을 때 곽호가 지난 몇 년 동안 매일 같이 보여 주었던 그 상냥한 미소로 물어 왔다.
“이 아저씨 따라 함께 가지 않을래? 매일 맛있는 걸 해주마.”
늘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묻던 것이었지만 그것이 진심인 줄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가지 않을 거예요.”
곽호의 얼굴이 웃는 낯짝 그대로 굳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위이이잉! 퍽!
“커허헉!”
초운의 그림자, 아니 정확히는 땅속에서 검은 물체가 튀어나오더니 복부에 틀어박혔다. 비명과 함께 초운이 쓰러졌다.
“초운아!!”
백송 진인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곽호의 살기가 아직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연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는 초운이 쓰러진 순간부터 인질이고 뭐고 상관없다는 듯 달려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청풍자에 의해 나갈 수 없었다.
“놔라, 청풍!”
“안 됩니다. 사형! 지금 나가시면 초운이가 더 위험해집니다!”
“으윽! 놓으라고 했다. 이놈아!”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멈추십시오. 어르신.”
“부탁입니다. 사백조님.”
하나는 천하제일검 소요자였고 또 하나는 화산제일검 적륭자였다.
“너희들…….”
“유기를 도림평에 보냈습니다. 경공이 상당히 빠른 아이이니 벌써 도착했겠지요. 그때까지만…… 사숙조들이 오실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적륭의 말이 맞습니다. 어르신…….”
청연자가 기운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청풍자도 팔에서 힘을 빼었다.
“사형, 잘 생각하셨습니다. 초운이라도 살려야지요.”
“…….”
청연자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 * *
곽호는 좌중을 향해 말했다.
“너희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들 사이가 잠시 소란스러워졌으나, 곽호가 손을 올리자 이내 잠잠해졌다.
“정말 말을 잘 듣는군. 그래서 기회를 주겠다는 얘기다.”
누군가 큰 소리로 물었다.
“무슨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오.”
“오, 용감하군. 넌 누구냐?”
“검각의 백현이오!”
곽호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별거 없다. 너희들 중 몇몇은 일검쟁패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에 왔겠지?”
“맞소.”
이번엔 여기저기서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곽호가 여유롭게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럼 나를 이겨봐.”
좌중이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크게 한 번 웃었더니 수십 명이 죽어 나간 그런 고수가 바로 곽호였다.
헌데 그런 이가 지금 도전하라고 한다. 도전하여 이기면 살려주겠다고. 헌데도 어느 누구 하나 나서는 이는 없었다.
해서 곽호가 다시 말했다.
“그래, 너희들은 죽음이 두려운 거겠지. 나와 싸우다 죽으면 어떡하느냐 이런 생각들 말이야. 그래서 또 한 가지 제안하겠다.”
문득 그의 시선이 비무대 아래에 쓰러져 꿈틀대는 초운에게로 향했다. 초운과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만났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초운 또한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끝에 있었다.
흑의 장포를 두른 열다섯 명의 마인들과 그들이 비무대 쪽으로 데려오는 중인 열다섯 명의 아이들…….
초운의 입에서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비명인지 아니면 절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안 돼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