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44화
오랜 세월에 걸쳐 경쟁을 통해 천위의 이름을 물려받게 되는 살수. 그것이 바로 천위살수였다.
영교는 천위살수의 아홉 지류 중 성암류(盛暗流)의 전인이었다.
만약 아홉의 지류 외에 더 뛰어난 지류가 나타난다면 천위살수의 위(位)는 언제나 바뀔 수 있었다.
그리고 성암류는 그러한 철칙 속에서도 오백 년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은 살수 일족이었다.
그 성암류의 마지막 살수가 바로 영교였다.
“이미 그 칭호는 잊은 지 오래입니다. 주공.”
“하지만 오랜만에 살수로서의 봉인을 풀 테지.”
“직접 하는 복수의 쓴맛은 달콤할 테니까요.”
그녀의 대답 덕분이었을까?
곽호의 입가에 주름이 잡혔다.
실로 오랜만에 보여 주는 진솔한 미소였다.
* * *
“이십사수매화검이라…… 그걸 나한테 배워도 되겠어? 도림평의 어르신들도 있잖아. 정 뭐하면 우리 사부님께 배워도 되고.”
“적륭 사백님은 한 달 뒤의 대회 준비로 바쁘시고 도림평에 가면 할아버지들이 오히려 제 수발 들어주려 하실 테니 미안하고 부담스러워요. 그러니 지금으로선 사형밖에 없어요.”
초운이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하자, 유기는 마음이 약해졌다.
“정말 장문인께 허락받은 거 맞지? 이거 화산에서도 정말 몇 명만 배울 수 있는 거 너도 알 거 아냐.”
“네, 분명히 허락하셨어요.”
“하는 수 없지, 이 몸이 가르쳐 주는 수밖에. 나 같은 절세미남자의 가르침은 비싸다는 것만 명심해라.”
“네!”
초운이 이십사수매화검을 배우려는 것은 십사수매화검을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내공도, 외공도 모자라기 짝이 없지만 그는 알았다. 자신이 십사수매화검의 끝을 보았고, 그다음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해서 그는 이십사수매화검을 배우려 하는 것이다.
허약한 몸 때문에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장문인도 쉽게 허락해 주었고, 남은 것은 사형인 유기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잘 해결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시작된 수련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유기는 심하게 시키지도 않았고, 그저 형(形)과 식(式)을 알려 주고 그 후에 현단선공의 운용을 알려줄 뿐이었다.
형태와 검식의 전수가 불과 하루 만에 끝나 버리자, 초운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이게 다예요?”
“응. 다야.”
“정말?”
“응, 정말!”
황당하다고나 할까? 오히려 십사수매화검을 배울 때가 더 힘들었구나 싶을 정도로 쉬웠다.
현단선공의 운기법과 운용법도 두 검공 모두 비슷했고, 초식들 또한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흐름 또한 십사수매화검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유기가 말했다.
“십사수매화검이란 이십사수를 쉽게 익히기 위한 도해본 같은 거야.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만 완성하면 이십사수의 오성까지는 금세 익히지.”
이해가 가는 소리였다. 확실히 현단선공과 자하신공의 일도 있었고…….
화산의 모든 무공은 어떤 식으로든 연관성이 강한 듯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기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리고 축하해.”
“네? 무엇을……?”
“넌 방금 칠성에 도달했어.”
단 한마디였지만 초운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검의 근본은 환검이야. 매화검류라는 것도 결국엔 환검의 극치를 보기 위한 수련의 도구일 뿐인 거지. 한데 너의 환검은 이미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십사수의 칠성에 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어.”
그 각성의 순간…… 검로만 보고 검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 이미 환검이 상승의 경지에 올라섰던 것이다.
말을 끝낸 유기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어째서 내가 이런 말들을 아는 거지?”
“적륭 사백께서 말해 주셨겠죠.”
“그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말인 것 같긴 한데, 사부님은 아니었어. 누구였지?”
유기는 누가 해준 말인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을 살펴봐도 기억나는 것이 얼마 없었다.
그의 기억은 어린 시절 아사 직전에 사부를 만나 구원받았을 때,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분명 그전에도 부모는 있었을 것이고 아니더라도 곁에 누군가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린 것치고는 너무 기억나지 않았다. 희미한 것조차 없는 완벽한 백지…….
그것이 유기의 기억이었다.
“사형?”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형과 식을 다 익히고 현단선공의 운용법을 알고 있으니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그렇긴 한데…….”
“모르는 게 있으면 나중에 물어봐. 알려 줄 테니까.”
“네, 사형.”
유기는 조만간 사부를 만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十八章
종남파의 삼협이라 불리는 진고, 소택, 채벽 세 사형제는 이번이 일검쟁패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그들의 나이는 이미 마흔 중반으로 더 이상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출전한 자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단 한 번의 출전이 이십 년을 좌우한다. 운 좋게 두 번째 출전할 수 있는 쪽은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었다.
종남파의 많은 제자들이 힘을 모아 보내 주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출전자들인 남궁세가나 검각의 제자들처럼 요란하게 보낼 수준은 아니었다.
종남삼협과 그들을 수행할 제자 열두 명.
가난한 문파라서 이 정도도 상당한 무리였다.
하지만 종남삼협이란 이름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무리할 수 있었다.
명문정파란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는다.
특히 협이라는 글자가 별호에 섞인다는 것은 더욱더 그러했다.
바보 같지만 그들은 그 협(俠)자를 지키기 위해, 협자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무수히 많은 마두를 쳐부수고 정의에 목숨을 건다.
종남삼협이란 이름은 그리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생을 하면서까지 지켜 낸 위명을 잠시나마 빛내기 위해서, 이 정도는 결코 무리하는 게 아니었다.
이번 일검쟁패는 같은 섬서 지방에서 열리는 터라 조금 느긋이 출발한 종남삼협은 갑자기 관도 앞을 막아선 네 명의 흑의인을 발견하고 멈춰서야 했다.
네 명의 흑의인들은 특이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두텁고 헐렁해 보이는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어서 살갗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무슨 용건이오?”
종남삼협의 대사형인 진고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말에서 내려 포권하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살기마저 흐르지 않는가.
“산적이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소이다.”
진고가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흑의인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종남삼협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제자들 중 셋이 검을 뽑아 들고 진고의 앞으로 나섰다.
바로 반 장 앞까지 서서히 다가갔지만 흑의인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조심하거라.”
둘째인 소택이 약간 소리 높여 말했다.
사백들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왔다고 하지만 이들은 모두 종남의 미래였다.
괜한 곳에서 헛되이 목숨을 잃을 아이들이 아닌 것이다.
한 제자가 소택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평소 소택을 따르던 제자였다.
“걱정 마세요. 사백. 이자들 그냥 미친 자들이었나…….”
그리 말하던 청년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안 돼! 피해라!”
강호 경험이 많은 종남삼협이 동시에 외쳤다.
“어……? 어……?”
다른 둘은 겨우 피했지만 그 청년만큼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몸이 굳어버렸는지 그대로 서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 흑의인의 장포가 변형된 듯한 거대한 그림자는 순식간에 청년을 삼켜 버렸다.
“우웁!! 웁!”
우드득!
옷은 엄청난 힘으로 청년을 조이며 온몸의 뼈를 부러뜨렸고, 뒤이어…….
“우우우웁!!”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핏물이 옷 밖으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새어 나온 핏물마저도 괴이하게도 옷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드득. 으드득. 우물우물…….
검은 장포 안쪽에서 뼈와 살이 씹히는 듯한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장포는 다시 흑의인의 몸으로 돌아갔고 남은 것은 원래는 사람이었을 이의 뼛조각들뿐이었다.
“우웨에엑!”
비위가 약한 제자들 몇이 토악질을 해 댔다.
종남삼협은 이 모든 것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진고가 등 뒤의 검을 뽑아 들며 조용히 말했다.
“형제들이여. 일검쟁패는 잠시 미뤄야 되겠다.”
“종남의 무인이 사악한 마공을 앞에 두고 떠날 순 없겠지요.”
“진짜 흡정마공이라…… 재미없어요, 재미없어. 한 놈은 그렇다 치고 다른 세 놈들도 분위기를 봐선 마인(魔人)일 텐데 뭔지 감이 안 잡히는군요.”
채벽의 말에 진고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언제 마두 놈들 무공 보고 때려죽였느냐?”
“일단 마두면 죽이고 봤지요.”
소택이 호기롭게 받았다.
그러자 차가운 얼굴의 채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편의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여긴 사백들이 맡을 터이니 어서 종남으로 돌아가라. 장로님들을 모셔 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 하지만…… 저희는.”
“시끄럽고, 니들 있으면 신경 쓰이니까 퍼뜩 다녀와. 흡정마공 등장했다고 말하면 노인네들이 좋다고 웃으며 버선발로 튀어나올 거다. 그 노인네들 마인 사냥에 환장한 인간들이니까.”
“예, 예!!”
제자들이 경공을 펼치거나 혹은 말에 탄 채 도망치려 하자 네 명의 마인 중 좀 전 흡정마공을 펼쳤던 마인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챙!
도(刀)도 아니고 검(劍)도 아닌 기다란 외날검이 흑색의 장포로 이루어진 흑의인을 서른여섯 번이나 베어 갔다.
펄럭.
허공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틀어,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의 검격을 피한 흑의인이 동료들의 곁으로 착지했다.
“크르르르르…….”
그의 입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먹이를 빼앗긴 짐승의 목울음 소리가 들렸다.
“진정하라고, 애초에 니들이 우릴 우습게 봐서 이리 된 거 아냐.”
진고였다. 그는 공력 소모가 많기로 유명한 천하삼십육검을 펼쳐 놓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산삼 먹은 개구리를 잡아먹은 후로 그리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하여튼 그는 그 나이 대에서 가장 내력이 심후하기로 유명한 이였다.
소택 역시 기다란 외날의 검 그것도 쌍검을 들어 보이며 여태 가만히 서 있는 마인들을 향했다.
“니들도 덤벼야지. 왜 가만히 있어?”
“사 대 삼인가?”
채벽이 그의 옆에 서며 말했다. 그러자 소택이 계산도 못하냐면서 핀잔을 줬다.
“어떻게 사 대 삼이야? 저 흡정마공 하는 새끼는 사형 거니까. 삼 대 이지. 너랑 내가 이(二)고 저놈들이 삼(三)이야.”
“하긴, 아까 그 아이 사형이 꽤 아끼던 애였는데 말이야.”
“하여간 시작하자고.”
각자 싸울 상대가 정해지자 뒤는 편했다.
이젠 싸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종남삼협은 몰랐지만 이런 일은 중원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 종남삼협처럼 소규모로 움직이는 이들이 대상이었고, 그들 대상의 공통된 목적지는 바로 화산파였다.
마인(魔人)들이 일검쟁패 참가자들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