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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43화 (43/217)

검향 43화

황경은 어느새 검을 멈추고 초운의 등 뒤에 서 있는 유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기가 씩 하고 웃으며 물었다.

“네가 졌지?”

“…….”

황경은 평소 때처럼 패배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 초운이 보여 주었던 검을 다시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유기가 다시 말했다.

“그 애의 검에 섞인 검리를 네가 이해할 수 있다면 진 게 아닐 거야. 하지만 넌 전혀 이해 못했어. 그렇지?

“…….”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좀 전에 초운이 펼치던 육합구궁검의 기본 초식마저도 이해 못했다.

분명 같은 초식을 펼치는데도 그 속에 얽혀 있는 변화를 읽을 수 없었다.

타심통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남의 것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것으로 완성할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천재였건만…….

초운의 저 검리만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환검이 상대보다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수준의 문제였다.

거의 어른과 아이의 수준이랄까?

황경은 이를 계기로 자신이 깨달은 환검은 진짜 환검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검에 모든 걸 건 황경으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황경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남궁계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아도 동생의 패배는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갔다면 비무에선 이겼겠지만, 동생의 성격상 지독한 수치심에 평생 괴로워했을 것이다.

수준 자체가 달랐다. 상대는 이미 또래의 수준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적어도 검리 면에서는 가문의 몇 안 되는 장로들에 버금가는 듯했다.

‘역시 화산인가. 구파일방의 다른 곳에도 이 정도의 제자들이 여럿 있다면 육대세가에겐 시간이 더 필요하겠어.’

그의 눈이 빛났다. 동생과 바보짓을 하던 때의 눈빛은 아니었다.

황경이 패배를 인정하자, 초운은 그때서야 힘이 풀린 듯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초운아!”

깜짝 놀란 유기가 다가오더니 초운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사형.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무 일 없어 다행이다. 하여튼 오늘은 네놈치고는 꽤 잘했다.”

“사형에 비하면 멀었지요.”

사실이 그러했다. 사형인 유기는 이제 이십사수매화검의 팔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장로들은 그것을 역사상 두 번째로 빠른 성취라 했다.

옛날 각성했을 때 부렸던 욕심이 성공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도저히 사형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봤죠? 이젠 조금이지만 비무도 버틸 수 있게 되었어요.”

그의 말에 유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걸 시험해 보고 싶어서 비무를 성사시킨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수련하는 것만 봐선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앞으로는 나도 널 도와줄게. 조금이지만 희망이 보이더군. 그래도 되죠? 사부님.”

그가 묻자 적륭이 답했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사형제 간에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지.”

“고맙습니다.”

이에 적륭자가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돌아섰다.

둘의 사이가 너무도 좋아 자신도 모르게 과거 적오와의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산하며 사제인 적오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젠가 웃으며 보길 바란다네 사제.’

적륭이 아쉬운 한숨과 함께 처소로 돌아갔다.

* * *

다시 아이들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체력적으로 불리한 면이 있었지만, 사백들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무엇보다 황경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 게 큰 요인이었다. 검을 못 써도, 내공이 없어도 무공을 봐주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연무장에 들어서자 일대제자인 사백들은 나간 지 오래였고, 아이들은 개별적인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또 그 수를 불렸는지 어느덧 열다섯 명이 되어 있었다.

이들 중 과거 초운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아이들이 크게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모르는 아이들은 덩달아 소리 지르며 따라왔다.

“와! 사형!!”

‘진짜 안기면 안 되는데…….’

검 한 자루도 겨우 들고 다니는 판에 아이들을 안아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미리 언질은 받았는지 아이들은 바로 앞에서 멈추더니 초운을 살짝 껴안으며 등을 토닥거렸다.

제법 의젓한 것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번엔 천우라는 아이가 주동자가 되어 초운을 가리켰다.

“애늙은이!”

그러자 모두가 검지를 가리키며 초운을 향해 말했다.

“애늙은이!”

“애늙은이!!”

초운이 한숨을 쉬며 유기를 되뇌었다.

“사형, 제발 좀…….”

‘아이들에게 이상한 거 가르치지 좀 말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다 가라앉았다.

이런 상황마저도 그리워했던 것이다.

* * *

오대검파는 제각각 형산, 청성, 무당, 종남, 화산…….

이렇게 구파일방 중 검으로 유명한 다섯 곳을 뜻했다.

이들 오대검파가 일검쟁패를 시작한 이유는 등천마교와의 대전에서 잃은 것들을 경쟁을 통해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토벌에 나선 이들이 바로 오대검파였고, 그만큼 많은 고수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이 후학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절전된 무공들을 재수습하고 복원해 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일검쟁패였다.

처음의 시작은 비무대회라기보다는 논검대회였다.

검을 논하고 연구하는 그런 고상한 대회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대회는 변질되기 시작했고, 작금에 와서는 미래의 천하제일검을 뽑는 대회가 되어버렸다.

일검쟁패는 무림에 몇 안 되는 거대 행사 중 하나로, 이 대회가 열리는 문파는 사흘 동안 엄청난 경제적인 풍요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이십 년 전에 일검쟁패가 열렸던 무당파는 겨우 사흘간 대회가 열렸을 뿐인데 십 년간 기부받아야 얻을 수 있는 돈을 한 번에 쓸어 담을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오가며 돈을 썼다.

정작 비무 대회를 볼 수 있는 이들은 오대검파나 구파일방, 그리고 대회 참가권을 얻은 다섯의 검파뿐이었지만, 대회가 개최되는 문파 인근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든다.

그들 대부분은 무인들이었으며 굳이 비무 대회를 보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했다.

그저 미래의 천하제일검이 태어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고 싶은 것이었다.

게다가 대회가 열리는 곳 인근은 경제적으로도 활성화되므로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었다.

특히 이번 화산에서 열리는 일검쟁패는 역대 최고의 규모였다.

그만큼 준비를 많이 한 것도 있겠지만, 전통의 오대검파와 그들이 추천한 다섯 검파들이 각자의 위세를 자랑하듯 최대 규모의 행렬을 꾸려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한꺼번에 몰려들진 않았다.

그들은 보통 두 달 정도 전에 화산파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초청회 때 온 남궁세가였고, 그다음으로 온 곳이 종남파와 청성파 정도였다.

그 외의 검파들도 하나둘씩 찾아오는 중이었다.

화산의 아랫마을 또한 또 한 번 터진 대목에 주민들이 모두 즐거워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초청회의 몇 십 배는 되는 손님들이 이곳을 찾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인들은 평소의 다섯 배나 늘었으며, 하오문은 이곳에 지부를 하나 세웠다.

하오문이 들어서면 본래 밤 문화가 더 꽃을 피우는 법이라 주루나 객잔은 지난겨울부터 보수 공사에 들어가 방을 네 배나 늘렸고, 여기저기서 기녀들도 데려오고 있었다.

아마 이번 대회가 끝나고 나면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 아닌 도시라 불려도 마땅하리라.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식당의 주인은 보수 공사를 핑계로 엿새째 문을 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식당 안에서 곽호는 오랜만에 제자들과 만나고 있었다.

제자의 수는 총 여덟이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너희들을 부른 이유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는 서로의 목소리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걸 알기에 곽호는 그들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명령은 이미 가슴 깊숙이 새겨놓았으니까.

“난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재능은 있으나 실력이 부족한 너희들이 이대제자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너희를 무시한 이들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

“이젠 너희가 은혜를 갚을 시간이다.”

그들 중 몇몇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이 환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얼굴에 쓴 가면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각자 맡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일만 성공한다면 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일이 끝난 뒤에도 날 따르기를 원한다면 따라와도 좋다.”

몇 가지 추가적인 지시를 내린 곽호는 단 한 명만을 남기고 모두 내보냈다.

다들 나가 버리자 그는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아주 선하게 생긴 외모의 도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황현이었다.

“네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알고 있겠지?”

“…….”

“흔들리느냐?”

“아닙니다.”

“그래. 넌 그런 아이니까. 그럼 널 믿겠다.”

황현은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영교가 정해 준 길을 따라 이동하여 사라졌다.

아마 그가 왔다 갔다는 흔적은 전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제법 쓸 만한 놈인데, 아깝게 되었군.”

“네, 주공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기도 하지요. 련 내에서도 저런 이는 드물 겁니다.”

“흠, 그렇지만 저 아이가 실행하지 않으면 대계를 실행하기란 힘들어.”

“그건 다른 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군. 다 중요하지. 그건 그렇고 련의 다른 호법들은 준비되었다더냐?”

“네, 정확히 같은 시각에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영교의 총명한 눈에 어울리지 않는 살기가 떠올랐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구파 토벌 계획이…….”

곽호의 얼굴에도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영교가 그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혹시 주공께서 주의 깊게 지켜보는 화산의 아이가 주인의 뜻을 거스른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단 죽이지 않고 회유하되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면 아쉽지만…….”

곽호는 잠시 말을 끊고 한참의 틈을 두었다.

“……?”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하겠지.”

“…….”

죽이겠다는 말에 영교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 아이에게 항시 붙어 다니는 백발의 악마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악마가 고작 꼬마 하나의 목숨 때문에 친가족과도 같은 곽호를 해코지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군. 네 안색이 안 좋구나.”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저 긴장되었을 뿐입니다.”

“후후, 긴장을 하다니 천위살수(天位殺手) 영교도 여인은 여인이었구나.”

천위살수란 모든 살수들의 정점에 이른 열 명의 살수를 뜻했다.

살수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신화였고 종교였으며 뛰어넘어야 할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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