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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41화 (41/217)

검향 41화

오다가다 꽤 인사를 나누었던 사형이었다.

초운이 인사하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몸은 이제 괜찮으냐?”

“덕분에 많이 나아지고 있어요. 황적 사형.”

유기도 왠지 흐뭇해져서 그에게 말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아, 유 사형도 계셨습니까? 남궁세가 쪽에서 손님들이 오기로 해서 말입니다. 사부님께서 저보고 마중 나가 있으라 하셨습니다.”

“남궁세가?”

유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황적이라는 도사가 말했다.

“네, 아마도 황경 사형 때문에 온 듯하더군요. 한데 왜 그리 놀라는 겁니까. 사형?”

황적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던 유기가 볼을 긁적였다.

“사형?”

초운마저 이상한 듯 묻자 유기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요새 좀 귀찮게 구는 녀석의 집안이라서 말이야.”

* * *

남궁세가.

안휘의 절대자라 볼 수 있는 가문이었다.

신생 육대세가의 반 수장 격인 가문으로, 발족은 그들이 하였으나 정작 산동악가에 밀리고 있었다.

그들은 속세에서 가장 유망한 검가 중 한 곳이기도 했다. 특히 패검의 정점이라 불리는 창궁무애검과 제왕검형은 둘 모두 천하십대검법 안에 들 정도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검쟁패 때 화산에서 추천하는 참가권을 가진 가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가문의 아들이 화산의 제자로 들어와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지난 수십 년간 남궁세가의 수많은 소년들이 이곳 화산에 들어와 검을 수련하였다.

하지만 남궁경일은 달랐다.

남궁세가주의 넷째 아들이기도 한 그는 가문의 다른 숙부나 백부들처럼 화산의 수련도사 과정이 끝나면 속가제자가 되어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련도사에서 멈추지 않고 이대제자가 되어 정식으로 도적에 이름을 올려 버리는 경악할 만한 짓을 저질러 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고, 아비인 가주는 그런 아내를 달래느라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였다.

남궁경일은 이대제자가 된 지 벌써 오 년째였지만 단 한 번도 초청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혹여 본가의 사람이 찾아와 마음을 돌리려 할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대제자가 된 이후 십사수매화검을 익히게 되면 절대 무를 수 없다. 매화검류의 유출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파문해야 한다면 양팔과 양다리의 근맥을 짓이겨 없애고 단전을 박살 내어 참회동에 가두어 버린다.

과거에는 혀를 자르고 눈도 파내는 경우도 있었다지만, 너무 잔혹하여 그나마 규율이 많이 수정된 것이었다.

물론 규율이 수정되고 나서도 칠십 년간 파문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어쨌든 이런 독한 규율들은 그가 남궁세가의 핏줄이라 해도 엄격히 적용된다.

그러니 마음을 돌리려 해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서 오 년을 버텨 왔다. 보고 싶은 어머니도, 형님들과 동생들도 모두 끊고 오직 검의 길 하나만을 보고 달렸다.

하지만 그 같은 인내심은 오 년이 한계였다. 그도 사람인지라 가족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애원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화산 무공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자신감도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대제자들 중 최강의 반열에 올랐다.

남궁경일, 아니 황경은 강했다.

모든 이대제자들이 엄지를 치켜들 만큼 강하고 다정한 대사형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단 한 명만은 그라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이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대의 이름이 바로 유기였다.

이 년, 아니 이제는 삼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황경의 바로 밑 서열에 안착한 이였다.

화산제일검 적륭자 사백이 오래전에 거둔 수제자라기에 일단 환영했다.

자신과 같은 부류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오직 검 하나만을 닦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그런 부류 말이다.

하지만 따뜻하게 맞아준 그에게 유기는 재수 없다며 발차기를 먹였다. 그것도 얼굴에…….

느닷없는 기습에 방심했던 탓도 있었지만 항상 깔끔하고 반듯하던 그가 개구리처럼 큰대자로 뻗어버린 일은 큰 사건이었다.

지독한 수치심을 느낀 그는 유기와 사부와 사숙들의 참관 아래 비무를 벌였다.

하지만 그 역시 십 초식 만에 박살.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 지옥 같은 폐관 수련을 견디고 밖으로 나온 황경은 다시 한 번 도전하기 위해 유기를 찾았으나, 평소 황경을 귀찮게 여긴 유기가 늘 피해 다니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다 오 년 만에 만나게 될 가족들을 마중하러 나갔을 때, 그는 보고 말았다.

사제인 황적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유기의 모습을…….

남궁경일은 지금 전면에 보이는 가족들과 친척들의 긴 행렬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직 보이는 것은 바로 유기뿐이었다.

“유…… 기…… 이놈.”

* * *

“뭐, 이런 사이였지.”

“황경 사형이라면 저도 오다가다 몇 번 뵌 적이 있었어요. 한 번도 인사를 받아 주신 적은 없었지만.”

유기의 짧은 설명에 초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응, 그놈이 좀 그런 것 같더라. 자기가 인정하는 놈이거나 친한 놈 외에는 다 거지새끼로 봐.”

옆에서 가만히 듣던 황적은 차마 맞장구치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형인데 없는 데서 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득 그가 유기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형께선 어째서 황경 사형께 반말인 건지……?”

“그거? 입문 날짜 애매하던데 뭐.”

“입문 날짜가요?”

“그래, 난 올해 햇수로 십 년차인데, 걔는 햇수로 칠 년도 안 되던걸?”

“이대제자는 오 년 전에 되셨는데 말입니다.”

화산의 서열은 간단했다.

수련도사 때 부려 먹던 사제라도 먼저 이대제자가 되면 알아서 모셔야 한다.

즉 먼저 이대제자가 되면 사형 대접을 제대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 따지면 우리 사부님은 나보고 칠 년쯤 전에 푸른 도포 입으라 했는걸?”

유기가 그리 받아치자 그에 반하는 대답은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정식으로 도적에 오른 건 이 년 전이잖느냐.”

초운과 유기, 그리고 황적은 불평 가득한 음성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로 초운과 황적의 뒤편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황적은 이제야 생각나는 것이 있어 눈을 감았다.

‘그래, 사부님께서 황경 사형도 나올 거라 하셨었지.’

초운과 유기를 빨리 보냈어야 했다는 생각도 뒤늦게 찾아왔다.

그는 지금이라도 황경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가까이 보이는 남궁세가의 행렬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형, 가족들이 오고 있습니다. 가 보셔야죠.”

“황적이 넌 시끄럽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는 황경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을 보내오자, 황적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황경이 말했다.

“승부다! 유기!”

“무슨 소리야? 이미 내가 이겼잖아.”

“그때 그것은 진정한 승부가 아니었다. 모두 내가 방심해서 당한 일.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났으니 너에게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네가 또 지면?”

“그럼 내가 방심한 거겠지, 다시 도전할 거다.”

“그러다 또 지면?”

“역시 내가 방심한 거겠지, 그다음에 또 도전할 예정이다.”

“에라이!”

듣다 못한 유기의 발바닥이 황경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황경은 비웃는가 싶더니 곧 멋진 오행매화보로 발차기를 피해 버렸다.

“두 번 당할쏘냐!”

“어, 넌 바보니까.”

퍽!

남궁세가의 행렬이 거의 도착할 즈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기의 반대쪽 발바닥이 남궁세가주의 넷째 아들이자 자칭 화산 이대제자들의 정신적인 대사형, 황경의 얼굴에 들이박혔다.

“경일아!”

남궁세가의 행렬에서 갑자기 한 중년인이 튀어나오더니 꼴사납게 쓰러진 황경을 살폈다.

“경일아! 큰형이 왔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일검쟁패 출전자인 남궁계상 형님이 오셨다.”

‘그걸 굳이 설명할 필요 있는 건가…….’

초운이 속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황경은 기절하였을 뿐 죽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깨우겠다고 뺨을 후려치는 남궁계상의 행태가 더 살벌해 보였다.

그 모습에 유기가 말했다.

“집안 꼬라지가 원래 바보 꼬라지구만? 누가 저걸 보고 대남궁세가 소가주라 생각하겠어. 저 쓸데없는 열혈이라니.”

황적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깜짝 놀라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자신이 동조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궁계상은 자신에 의해 볼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황경의 얼굴을 부여잡고 정말 쓸데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유기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이 극악무도한 놈! 우리 경일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 꼴을 만들어 놨느냐!!”

그러자 초운이 한손을 들며 그를 향해 말했다.

“저기…… 아저씨 때문에 황경 사형이 더 다친 거 같은데요?”

“뭣이?”

갑자기 그가 눈에 불을 켜고 초운을 바라보았다. 목표가 유기에서 갑자기 초운으로 바뀐 것이다. 그가 초운을 향해 외쳤다.

“아저씨이이!?”

“……라는 말이 거슬리셨던 거군요.”

초운은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왜 화내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행동이 단순했던 것이다.

“이 삐쩍 곯은 육포 같은 자식!!감히 나 보고 아저씨라니!”

“그래! 우리 형님께 아저씨라니!”

어느새 깨어난 황경이 끼어들었다.

쓸데없이 열혈인 두 형제는 오 년 만의 재회임에도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유기가 그런 두 형제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딱 봐도 사십은 넘어 보이는구만. 아, 그러고 보니 황경이 너 늦둥이였냐?”

“어, 어떻게 알았지? 대단한 통찰력이군.”

“그게 너희 형은 형이 아니라 아버지같이 생겼거든.”

“…….”

이에 황경이나 남궁계상은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장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것은 황경이었다.

“너! 너…… 절대 꺼내선 안 되는 금기를 꺼내고 말았다.”

“잉? 무슨 금기. 난 그저 보이는 대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어쩔 수 없나? 듣고 놀라지 말거라. 우리 형님은…… 우리 형님은…….”

“너네 형님이 뭐.”

“아직 삼십 대다!!!”

이번엔 유기는 물론이고 초운과 황적까지 놀라고 말았다.

어찌 저 얼굴에 삼십 대란 말인가, 아무리 적게 잡아줘도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저 얼굴로…….

유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쨌든 너는 남궁세가에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줬다. 그러니…… 비무다!”

“왜 또 그런 쪽으로 굴러가냐? 내가 아저씨라고 한 거 아니거든?”

“아깐 명분이 부족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절대로 비무다! 세속의 가족도 가족은 가족! 가족의 명예는 곧 나의 명예인 것이다! 그러니 비무다!”

이놈의 억지는 도저히 당해 낼 수 없겠구나 라고 생각한 유기는 자신의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초운을 잠시 바라보더니 황경을 향해 말했다.

“나랑 정 붙고 싶으면 이놈을 이기고 와. 그럼 비무 한 판 벌여 주지.”

“뭣이?”

황경과 남궁계상이 동시에 소리쳤다.

“날 아저씨라 부른 삐쩍 곯은 육포 따위와 내 동생은 겨루지 않아!”

“비리비리한 놈과 싸우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초운이 당황한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삐쩍 곯은 건 아닌데…….”

이에 유기는 황경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멱살을 틀어잡고 얼굴을 마주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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