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37화
“왜 안 된다는 거지?”
의아한 표정의 혁련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그건…….”
원래대로라면 곽호가 초운이라는 아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말해 줘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 때문에 머뭇거렸다.
자신의 주인이 그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얼마나 감정적이 되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혁련수의 일만 해도 그러했다.
그는 일검쟁패가 시작되는 날 중원을 침공하기로 되어 있던 이들 중 하나였다.
한데 자신의 주인은 그것을 무려 삼 년이나 앞당겼다.
그것도 초운의 스승을 없애려는 하찮은 이유 때문에…….
영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그 아이를 혁련수에게 줘 버리기로.
주인이 대계에 실패하는 건 괜찮지만, 그 실패로 인해 주인이 처벌받는 건 괜찮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죽어줘야 했다.
어차피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혁련수가 지면 되는 일이다.
지금의 곽호를 보았을 때,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다면 변명도 듣지 않고 흉수를 때려죽일 테니 자신과 연관 짓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혁련수는 주인을 만나기도 전에 화산 도사들의 손에 의해 참살당할 것이다.
자신이 그리 되게 만들 테니까.
“너…… 너무 어리잖아요.”
“그래? 어차피 오대검문에 속한 아이이니 나중에 다 죽일 것 아닌가? 몇 년 뒤에 죽나 지금 죽나 별 차이는 없겠지.”
“그럼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부디 고통 없이 죽여주길 바랄게요.”
“그건 걱정 마라, 고문은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어린도 사의 심장을 뜯어 먹는 건 즐겁겠지.’
마인다운 생각이었다.
그의 청수암왕공은 인간의 심장에서 흐르는 피를 마실수록 더욱 강력해진다.
과거의 그는 도사나 중들의 심장을 즐겨 먹었다.
칠십 년을 넘게 청해에서 살았더니 그 맛을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맛볼 걸 생각하니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이를 눈치챘는지 영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안 되겠군요. 나도 가야겠어요. 쓸데없는 짓을 할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당신 혼자 화산에 잠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니 따라가려는 거예요.”
선기 가득한 화산파에 혈향 가득한 마인이 침입하기란 쉬운 일도 아니었고, 침입하더라도 초운을 찾기 전에 발각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다행히 영교는 그러한 잠입의 달인이었고, 화산에 잠입한 경험이 아주 많았다.
“흥.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
‘아쉽군, 오랜만에 도사의 심장 맛을 볼 수 있나 했는데.
하지만 저것이 날 돕지 않으면 복수도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다.’
“축시에 오르도록 해요. 그때가 가장 어둡고, 경계가 허술하니까요.”
“네 말에 따르도록 하지. 아 그런데 식사 좀 주지 않겠어? 나도 가끔은 사.람.다.운.음.식을 먹어 줘야 한다고.”
영교의 고운 아미가 일그러졌다. 그가 주로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마인들은 강해지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이용한다.
인간의 체액이나 정기(精氣) 같은 것은 아주 기본 적인 재료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공이란 본래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많은 생명이 필요한 법. 상승의 마공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마공을 마공이라 부르고 마인을 마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인간의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원해 명부마도(冥府魔道)를 선택한 자들에게 양심이나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고 힘의 논리아래 있을 뿐이다.
만약 그녀의 주인 곽호가 마인들을 지배할 운명을 지닌 등천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마인들이 그 힘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등천의 금제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그때의 혁련수는 동지가 아니라 적일 것이다.
‘반드시 죽여야겠어.’
그녀는 등천의 숭고한 뜻을 이은 자신과 자신이 주인이 이러한 버러지와 함께한다는 것이 너무도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 * *
초운은 약당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바로 사백인 적륭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다친 상태로 도림평에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초운은 어린 시절 적오자에게 수련 받으며 이런 상처쯤은 대수롭지 않게 달고 살았고, 최근에는 청풍자와 함께하며 생명의 위협을 여러 차례 받아 왔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적륭의 이런 걱정이 싫지 않았기에 약당에 계속 있기로 하였다.
더구나 내일까지 자신의 수발을 들어 주기로 한 유기라는 사형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루는 사천에서 말이야…….”
그는 그의 사부와 함께 많은 곳을 다녔던 터라 초운에게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가난한 화전민 촌에서 태어나 청연자의 손에 의해 화산에 오기까지 산을 벗어나 본 일이 거의 없는 초운으로서는 유기의 이야기들이 신기할 뿐이었다.
유기 또한 다른 수련도사들처럼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좋아해 주는 초운이 좋았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유기는 문득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함, 초운아. 이 사형이 좀 자야겠다. 옆으로 좀 가 봐라.”
“네? 근데 약당에 남는 침상 많은걸요.”
“시끄러! 난 옆에 누가 없으면 못 잔단 말이야. 게다가 침상도 넓잖아.”
“그래도…….”
“아, 그리고 이 사형께서 몽유병이 약간 있으니 이해하도록.”
“몽유병이요?”
“응,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데, 절세미남의 유일한 약점이지. 이런 거 보면 하늘은 참 공평한 거 같단 말이야. 나 같은 절세미남자에게 이런 결함을 내리다니.”
“…….”
초운은 맞장구를 쳐주는 대신 등을 돌리고 누워 버렸다. 하지만 유기의 수다는 그 상태에서 반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초운은 해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적막이 흐르는 밤.
약당의 제자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가고 당직을 서는 이들만 몇 남아 등잔불 밑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이었다.
축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초운은 잠결의 몽롱함 가운데 또 한 번 향(香)을 맡았다.
얼마 전 유기의 등에 업혔을 때 맡았던 바로 그 향기였다.
그 향은 이전보다 더 진하고 향기로웠으나, 나타남과 동시에 더 빨리 사라졌다.
왠지 온몸이 나른해진 초운은 그 향기 또한 꿈이라 여기고 다시 잠들었다. 하지만 몰랐다. 자신의 곁에서 자고 있어야 할 백발의 소년이 사라지고 없음을…….
* * *
영교와 혁련수가 화산파의 약당 인근에 나타난 것은 축시가 한참 지나고 인시를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영교는 온몸에 특유의 무공을 이용한 그림자를 두르고 있었으며 혁련수는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알았죠? 다른 이들은 건드리지 말아요.”
“그래, 알았다. 빨리 끝내고 내빼는 게 나에게도 이로울 테니까.”
“그럼 먼저 가 봐요. 전 천천히 따라가며 망을 볼게요. 초운이란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숙지하고 있을 거라 믿어요.”
“물론이지.”
사실 숙지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열대엿 살 정도의 아이만 골라 죽이면 되는 일이다.
그녀에겐 한 명만 죽인다고 했으나, 약당에 누가 있든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라면 시간 되는 대로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일각 안에만 나오면 되는 일 아닌가.
일각 안에 어린애 몇 명 더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레 약당 앞으로 다가갔다.
가는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교가 잘 따라오는지 몇 차례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영교의 그림자는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가 약당의 공터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한 소년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응? 너는…… 뭐지?’
하얀 백발을 지닌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년은 시커먼 밤의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듯했다.
그 성스러움에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혁련수는 마인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취해 버렸다.
“……련 ……수.”
‘……응? 무슨 소리…… 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혁련수가 살짝 반응했다.
“혁…… 수……!!”
‘누가 날 부르는 거냐?’
“혁련수!”
영교가 그를 향해 외쳤다. 백발의 소년이 시퍼런 검날을 뽑아 드는데도 그는 바보같이 무방비로 서 있었다.
여기서 죽어버려도 상관없는 사내였지만, 저 소년은 뭔가 이상했다.
아니, 무서웠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마치…… 마치 마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부른 것이다.
그녀가 내공을 모아 다시 외쳤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공포감이 이곳이 화산파라는 것을 잊게 했다.
내력이 빠져나가며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혁련수!!”
그녀의 내력이 오 할이나 실린 외침에 결국 그가 깨어났다.
“어? 뭐, 뭐냐?”
하지만 이미 상황은 늦었다. 백발의 소년의 손끝에서 느리게 뻗어 나온 검날이 그의 목을 잘라 내고 있었으니까.
“어…… 억…… 케…… 케헥.”
검(劍)은 너무도 느렸다. 그런데도 혁련수의 목은 아주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그것마저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검날이 목을 반쯤 갈랐을 때 이미 혁련수의 눈은 뒤로 돌아가 있었고, 역겨운 신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더욱 놀라웠다.
몸과 완전히 분리된 머리통에선 검붉은 피 대신 하얗게 빛나는 꽃잎이 흘러나와 허공으로 퍼지고 있었다.
머리는 땅을 향해 아주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는데 빛나는 꽃잎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그 수를 불려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피부와 근육, 뼈까지 모조리 꽃잎으로 화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땅에는 머리카락 하나 남은 것이 없었다.
몸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꽃잎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꽃잎 모양의 불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거랄까?
몸통 또한 순식간에 타 없어지더니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사, 삼매진화(三昧眞火).”
영교가 몸을 떨며 부르짖었다.
전설 속의 무공, 아니 무공이 아니다. 저것은 일종의 능력이었다. 특정 경지를 넘기면 얻을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주인인 곽호도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물을 태우거나 뜨겁게 하는 정도이지, 검으로 사람을 베어 허공에 흩어버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저 능력을 알고 있었다. 저 능력을 지니고 있던 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영교는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아니 당신은.”
어느새 다가온 백발의 악마가 섬뜩한 미소와 함께 검지를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쉿. 조용히…….”
영교는 눈도 껌뻑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전신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백발의 악마가 그녀에게 말했다.
“나 알지?”
그녀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네 주인의 목숨이 중하다면 날 본 적 없는 거야. 알았니?”
“…….”
백발의 악마는 그녀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며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아쉽네. 인피면구 같은 걸 하다니…….”
치이이익.
영교의 눈이 질끈 감겼다. 인피면구의 표면이 꽃잎으로 화해 타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러면서도 면구 안의 본래 살결은 전혀 다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결 보기 좋구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그 목소리에 얼마나 많은 마인이 절망을 빠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는지 말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난 이만 가보겠다. 덕분에 즐거웠으니 상을 주마.”
딱!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몸이 움직여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포에 질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는데 그가 흐트러진 몸의 기맥을 바로잡아준 것이다.
눈을 떠보니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홀로 남은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