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30화
청풍자라는 존재는 그로서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괴짜였다.
그런 이가 초운을 넘보고 있었다니 청명자로서는 의외였다.
청연자는 평소 존경하던 사숙인 천우 도장의 제자, 청풍자를 어릴 때부터 귀여워했었다.
하지만 매화검수이던 천우 도장이 등천마교와의 싸움에서 돌아가신 이후부터 어딘지 모르게 삐뚤어져서 다루기 힘들었던 사제였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에 걸쳐 검향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청풍자는 다른 것에 집착 중이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청연자의 물음에 청명자는 초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초운이 검식을 펼치며 밟는 오행매화보였다.
어찌 보아도 엉성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미 어설프게나마 검 끝에 달린 뜻[意]이 매화보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청명자가 말했다.
“얼마 안 있으면 현단선공이 완전히 자리 잡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리 되면 자신만의 매화보에 갇히게 될 테지요.”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사형께선 그걸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청연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보내는 것이 낫다는 거겠지.”
“청풍이 비록 꽉 막힌 이라고는 하나, 이론만큼은 사형이나 저보다 더 앞서 있습니다.”
청명자의 말에 청연자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고(古)장로들 중에 딱 하나 천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청풍자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경공과 보법에 한해서였지만…….
그런 이가 초운을 원한다는 건 어떠한 가능성을 봤다는 뜻일 것이다.
생각이 이르자 결정은 쉬었다.
그는 초운에게 다가갔다.
“청풍 할아버지요?”
초운이 특유의 순진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고, 도림평에 살고 나서부터는 몇 번 보기도 했었다.
어쩐 일인지 청연 할아버지가 꺼려하는 듯했지만, 자신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배운 걸 단련하는 것도,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아주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 녀석이 너의 보법을 좀 봐주겠다는구나. 그러니 내일부턴 천비동에 가 보거라.”
천비동이라면 도림평의 서쪽 끝에 있는 동굴이었다.
자연 동굴은 아니고 누군가 거주를 위해 인위적으로 파 놓은 곳이었는데 꽤 높은 절벽 중간에 있어 어지간한 경공 실력이 아니면 오르기 힘든 곳이었다.
“알았어요. 할아버지.”
초운은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이젠 제법 의젓해 보였다.
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성품이 어딜 간 게 아니라서 청연은 걱정이 많았다.
“청풍은 젊은 시절부터 좀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 그러니 견디지 못하겠거든 얼른 돌아오너라.”
초운이 활짝 웃으며 팔뚝을 걷어 올려 보였다. 팔뚝에는 잔 근육이 아주 근사하게 박혀 있었다.
“걱정 마세요. 저 이제 아주 튼튼한걸요.”
“그게 걱정이란 말이다.”
* * *
다음 날 오전.
초운은 천비동으로 향했다.
그곳은 초운이 수련하던 곳에서 반 시진도 걸리지 않은 작은 절벽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경사가 아주 심한 절벽이라 올라가려면 아주 조심해야 했다.
초운은 천비동의 바로 아래에서 양손을 입에 모아 외쳤다.
“청풍 할아버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초운은 다시 불러 보기로 했다.
“청풍 할아……!”
“그만해라, 이놈아. 귀 썩는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산발 머리의 한 노도인이 초운의 등 뒤에서 투덜댔다.
초운은 노도인이 언제 나타났는지 알아채지 못했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와! 언제 오신 거예요? 하나도 몰랐어요!”
“별걸 다 놀라는구나. 시끄러우니 올라가기나 해라.”
거의 직각이나 다름없는 경사였고, 올라가는 곳엔 발 딛을 틈 하나 없었다.
그 높이 또한 동굴까지 무려 십 장.
초운의 오행매화보의 경지가 제법 높다 하지만 무리였다.
“늦게 오면 저녁은 없다.”
“어?”
그 말을 남긴 노도인, 청풍이 바람처럼 빠르게 절벽을 밟더니 단 두 걸음 만에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가시면 어떡해요.”
초운이 소리 지르자 청풍이 동굴 밖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이것도 다 수련이다. 조금 전에 내가 어떻게 다리를 움직였는지 기억한다면 충분히 올라올 수 있을 게다.”
“아!”
“다시 말하는데, 곧 해 떨어진다. 빨리 안 오면 저녁은 안 준다. 더불어 잠도 거기서 자야 할 거다.”
그 말을 남긴 청풍은 얄밉게도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볼을 살짝 부풀린 초운이 눈에 오기를 실었다.
중간에 밟을 곳 하나 없이 십 장을 뛰어오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초운에겐 그러했다.
사부인 적오자는 이런 경우 방법을 하나하나 알려 주고 나서 시켰다. 그런데 청풍자는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초운의 입장에선 이대로 청연자에게 돌아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오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궁리할 뿐이었다.
팍!
오행매화보의 적매보(赤梅步)였다. 하지만 내력이 없어 삼 장이 한계였다.
“으…… 으아아아!”
쿵 소리와 함께 엉덩이부터 떨어진 초운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평소 삼 장 높이면 착지하기 어렵지 않은 높이인데 잠시 방심했더니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동굴 쪽을 올려다보았지만 청풍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옷을 털고 일어난 초운은 다시 한 번 도전했다.
하지만 이번엔 사 장 정도 뛰어올랐을 뿐, 또다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착지는 제대로 했다는 것이다.
한편 위에서 몰래 초운을 지켜보던 청풍자는 혀를 찼다.
“아둔하고 아둔하도다. 왜 그걸 모르지? 내 분명 친히 보여 주기까지 하였는데 말이야. 기초가 뛰어난 아이이니 분명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청풍자야 천재이니 할 수 있는 말이다.
천재가 보는 것을 초운 같은 노력파가 같은 선상에서 보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가 지났다.
새벽녘에 잠이 든 청풍자는 누군가의 끙끙대는 신음에 눈을 떴다.
동굴 입구 쪽을 보니 지저분한 손 하나가 아래쪽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뭐, 뭐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동굴 바닥을 짚고 그다음 머리와 상체가 올라오더니 동굴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헥헥헥. 헤헤헤헤! 성공!”
숨을 헐떡이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웃으며 성공을 외치는 소년은 바로 초운이었다.
겨우 십 장 올라오는 데 무슨 힘이 들었겠느냐마는 그걸 경공만으로 올라오는 데는 제아무리 체력이 막강한 초운이라도 힘들었다.
처음 삼 장에서 시작한 것이 사 장, 오 장 조금씩 늘려 가다가 마지막에 겨우 동굴 입구 바로 아래까지 뛸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 올라와서 떨어지면 더 이상 힘이 없기에 팔 한쪽을 동굴 바닥 쪽에 걸치고 겨우 올라올 수 있었다.
청풍은 그제야 초운을 알아보고 혀를 찼다.
“올라오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렸냐? 이놈아.”
“응? 벌써 아침이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헤헤헤헤.”
‘설마…… 어제 저녁부터 계속 뛰었다는 건가?’
청풍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초운이 행한 일이 보통 체력이 필요한 게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청연 사형에게 듣기로는 내공마저 금제 중이라 하지 않던가.
현단선공의 공력이 있다 하나, 내공이 금제된 상태라면 검식을 펼칠 때 외엔 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외공만으로 경공을 펼쳐 올라왔다는 뜻이 된다.
청풍은 순진해 뵈는 초운의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쓸 만할지도 모르겠군.’
자신이 선택했으니 당연하긴 하다.
그 엄청난 기초 공부를 확인하고 얼마나 놀랐던지…… 게다가 저 나이 대의 아이들 중 누가 있어 오행매화보에 뜻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어쩌면 완성시켜 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청풍 또한 이론만 완성하고 익힐 수 없었던 바로 ‘그것’을…….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청풍의 으스스한 미소가 흘러나왔지만 초운은 아무런 편견 없이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러자 오히려 청풍이 흠칫했다.
‘이놈은 대체…….’
“하, 하여간 수련은 내일부터다. 오늘은 일단 쉬어 둬. 그래야 굴려 먹지. 허험.”
“네, 알았어요. 청풍 할아버지.”
“하, 할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간지러우니까!”
그렇게 천비동에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입에서 단내가 나 본 건 오랜만이었다.
“으…… 으…….”
청풍자의 수련은 결코 적오자에 못지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선 더 심했다.
예를 들어 발가락 힘만으로 동굴 천장에 거꾸로 서 있는 행위 같은 것들 말이다.
천장에 대못을 하나 박아 놓은 청풍은 초운으로 하여금 그 못을 발가락으로 잡고 네 시진을 버티게 하였다.
그걸로 모자라 어디서 가져온 건지 펄펄 끓는 물이 가득한 무쇠 솥을 머리 아래에 두었다.
만약 발가락에 힘이 다 되면 솥에 빠져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말 것이다.
적오자도 이런 악독한 짓은 안 했다.
물론 초운이 우직하고 성실하게 꾀부리지 않고 수련했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이런 악독한 짓이 하루하루 계속되자 그 순수한 초운마저도 조금은 화를 내게 되었다.
악에 받쳤다고나 할까?
“청! 풍! 할! 아! 버! 지!”
“으응?”
꾸벅꾸벅 졸던 청풍이 번쩍 깨어났다. 입 주변의 침을 닦던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초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벌써 네 시진이 지났느냐?”
“네!”
초운의 대답에 청풍이 아쉬운 듯 무쇠 솥을 치워 주자 초운이 발가락에 힘을 풀고 스스로 내려왔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에 초운이 물었다.
“이렇게 해서 경공이 빨라지는 것 맞아요?”
“나도 모른다.”
“……네?”
“너한테 시키는 모든 수련은 나도 안 해 본 거다. 그저 이론뿐이지.”
“…….”
이런 무책임한 인간이…… 하지만 화내지는 않았다. 왠지 적오자와 함께하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 힘내서 이번엔 세 시진이다.”
화내지 않는 거 잠시 취소할까 생각하는 초운이었다.
“경공이든 보법이든 기본은 발가락이지. 넌 기초는 꽤 되어 있다만 경공이나 보법만을 보았을 땐 아직 멀었다. 발가락 다음은 발목이고 발목 다음은 무릎, 무릎 다음은 허리…… 그다음이 전신이지. 앞으로 차근차근 만들어 가 주마.”
청풍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자 초운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경공과 보법의 연구에 바친 사람이다. 당연히 뭔가 얻었어도 얻을 나이인 것이다.
초운은 다시 천장에 매달렸다.
상쾌한 매화향이 바람을 타고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실려 온 향기처럼 빨라질 수 있을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찌 사람이 바람만큼…… 향기만큼 빨라진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