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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28화 (28/217)

검향 28화

도림평에 산다고 해도 본산에 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초운은 엿새에 한 번 정도는 본산에 올라 악휘구나 곽호 등을 만났는데 다들 초운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때조차 초운은 목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길을 걸으면서도 검에 말을 걸고, 검신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게다가 그 좋던 자세들이 다 어디로 간 건지 생각 없이 대충대충 검을 펼치는 듯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자 사형제들 간에 초운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도림평에서 지내는 것에 대한 질투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 소문이 돌 때마다 악휘구가 화를 버럭 내며 그런 소문을 내뱉은 이를 찾아가 두들겨 패 줬지만, 소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체 요즘 왜 그러는 거야!”

악휘구가 오랜만에 만난 초운을 향해 짜증을 부렸다.

“에? 왜 그래요. 악 사형?”

“몰라서 묻냐! 그 지저분한 목검을 밥 먹을 때도 쥐고 있질 않나, 검식은 엉망이고 보법 또한 흉하기 그지없다.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말해 보라는 말이다.”

“아, 그랬어요? 헤헤헤.”

초운은 순박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그의 웃음에 마음이 조금 풀어진 악휘구가 초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는 일 년 사이에 몸도, 근육도 더욱 커져서 지금은 거의 칠 척에 달했다.

악휘구는 자신의 체형이 화산의 검법과는 어울리지 않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복호권 하나에만 열중하였는데, 그것만으로도 또래의 검수들은 물론 몇몇 이대제자들마저 능가했다.

괜히 귀재(鬼才)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이대로 도적에 이름을 올린다면 이십 년 뒤의 화산파에는 권왕이 하나 등장할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산동악가의 직계로 도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도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초운이 걱정되었다. 자신이 떠나면 초운을 지켜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잘 키워서 한번 겨뤄 보겠다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역시 세월이 정(情)이라고 초운을 친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다.

문득 지금이 말할 기회라 여겼는지,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 두었던 한 가지 계획을 초운에게 말하였다.

“이 사형이 본가로 돌아갈 때 함께 가지 않을래?”

“네?”

“이번 초청회 때 네 사정을 말했더니 마음 약한 우리 어머니 펑펑 우시면서 너 당장 데려오라시더라. 그러니 내가 속가제자로 하산할 때 함께 나가자.”

말이 따라가는 것이지 사실상 자기 집안의 양자가 되면 어떻겠느냐 하는 소리였다. 그것도 산동의 지배자이자 육대세가 최강이라 불리는 산동악가의 양자로 말이다.

초운은 처음엔 놀란 얼굴을 하다가 곧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악휘구는 그것을 허락의 의미로 알았으나 아니었다. 초운이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왜? 이곳에 있으면 떠난 사부 생각만 나 괴롭기만 하고, 괴짜라며 놀림이나 당할 뿐이잖아.”

“화산이 우리 집이니까요. 사부님은 안 계시지만 청연자 할아버지나 도림평의 장로 할아버지들이 있어요. 장문인께서도 친할아버지처럼 절 아껴 주세요. 식당의 곽호 아저씨는 삼촌 같아요. 그리고 악 사형도 저에겐 이미 형이에요.”

“바보야, 누가 집에서 미움을 받느냐?”

초운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전 이곳이 좋아요.”

악휘구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휴, 하는 수 없지. 그래도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우리 집에 오는 거다. 알았냐?”

“네. 사형. 그리고 고마워요.”

멋쩍었는지 얼굴을 붉히며 걸음을 옮기던 악휘구가 말했다.

“밥 먹으러 안 가? 안 가면 나 혼자 간다.”

“같이 가요 사형! 헤헤헤헤.”

“웃지 마. 이놈아, 정든다.”

“헤헤헤헤.”

초운이 더 크게 웃었다.

훈훈한 두 사형제가 식당으로 향할 무렵이었다.

“가을에 무슨 파리지.”

낮게 중얼거리던 곽호가 파리채를 한 번 휘두르자 파리가 여덟 조각으로 갈라지며 땅에 떨어졌다.

파리채를 휘두르는 솜씨에도 절학이 담겨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수련도사들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일수에 담긴 심오한 뜻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장로급이 와야 그나마 ‘뭔가 있구나…….’하고 깨달을 것이다.

곽호는 문득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에 파리 잡는 것을 멈추고 식당의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아저씨!”

“오, 초운이었구나.”

곽호가 일어서서 반겼다.

그러자 악휘구의 핀잔이 이어졌다.

“난 안 보이쇼?”

“응, 넌 안 보인다.”

“쳇.”

곽호가 한마디를 안 지자 악휘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잘못 보이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악휘구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수련도사들이 곽호를 좋아했다. 그만큼 그의 음식은 맛있고, 사람 됨됨이 또한 좋았다.

특히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수련도사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곽호는 언제나처럼 초운에게 식사를 차려 주었다.

“맛있느냐?”

“네, 맛있어요. 아저씨.”

“또 한 번 물어본다만, 아저씨 따라가지 않을래? 맛있는 거 매일 해 주마.”

악휘구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그런 유치한 수법을 쓰셨구만.”

“밥 다 먹었나 보지? 밥상 치워 줄까?”

악휘구는 말없이 밥그릇을 들고 허겁지겁 해치웠다. 그런 악휘구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곽호의 귀에 초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갈 수가 없어요. 사부님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곽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시 부엌에 다녀오겠다고 한 곽호는 부엌에 들어가자마자 벽을 잡고 쥐어뜯었다.

단단한 돌벽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그것도 모자라 손에 담긴 돌조각이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영교.”

곽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한 여인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어둠으로 덮여 있어 그 모습은 알 수 없었으나, 윤곽만 보았을 땐 상당히 아름다운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네, 주공.

“적오자가 지금 어디 있다 했지?”

-귀주성입니다.

“그곳에 혁련수를 보내어 뒤흔들어라.”

-하지만 주공…… 련주께서 허락하시지…….

영교의 걱정에 곽호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시끄럽다. 련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유람이나 다니는 바보 따위 신경 쓸 것 없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혁련수에겐 반드시 적오자의 숨통을 끊으라는 명을 전하도록.”

영교는 초운이라는 아이에게 너무 집착하는 주공이 걱정되었다.

화산에서 얻은 여덟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애정은 보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대답과 함께 그림자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곽호는 얼굴을 매만지며 다시 표정을 만들었다.

초운에게 찡그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즐거웠던 시간이 지나고 도림평으로 돌아온 초운은 목검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너는 왜 대답이 없는 걸까?”

검을 슬쩍 휘두르자 십사수매화검의 매류통천(梅流通天)이 쉽게 튀어나온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저 숨 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이제 겨우 너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방법을, 내 이야기를 듣게 하는 법을 알았을 뿐이야.”

초운은 쉽게 얘기했으나 이는 상승의 무리였다. 일대제자나 되어서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해서 일대제자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초운은 일대제자들에 비해 공력도, 경험도 무공에 대한 이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는 그저 지름길을 미리 견식한 것에 불과했다.

머리는 알고 있으나 몸은 반도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이미 어지간한 이대제자들을 뛰어넘는 실력이었다.

요즘 초운의 자세가 이상해진 것도 그래서였다. 검리의 이해를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초운의 기초가 탄탄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화산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환검(幻劍)의 입문이란 그러했다.

그러나 적오자가 쌓아 올려 준 견고한 기초가 아무 소용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 열셋에 환검에 입문한 제자는 화산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도 찾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극도로 단련된 육신은 이미 상승의 무리에 입문하기에 적합했고,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아마 몸이 머리의 이해를 따라잡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으리라.

초운이 다시 검을 휘두른다.

매영만천에 이어 냉매섬개가 쏟아지는데 여전히 자세는 엉망이나 그 기세는 놀랍도록 매서웠다.

자신의 자세가 이상하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도림평의 장로 할아버지들 중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검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으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반개한 눈을 들어 이젠 너덜너덜해진 목검을 바라보던 초운이 완전히 눈을 감았다.

환검에 입문한 순간 오성의 경지에 이른 십사수매화검이 순차적으로 펼쳐졌다.

검(劍)은 느리나 느리지 않고 빠르나 빠르지 않았다.

바람과 어울려 춤을 추다가도 땅에 진 그림자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흐릿한 검기가 빠져나와 매화의 문양을 이룬다.

물론 이는 진짜 매화가 아니었으며 검기를 이용해 강제로 모양을 이룬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대제자들은 물론이고 실세인 장로들도 대부분 높은 공력을 이용해 매화를 만들어 낸다.

뜻[意]을 담아 내력의 소모 없이 검 끝에서 매화를 피어 내는 이들은 도림평의 은거장로들과 장문인인 백송 진인뿐이다.

“이건…… 아닌가?”

초운은 잠시 검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뭔가 떠올랐는지 밝게 웃으며 다시 검식을 펼쳤다.

그러자 선명한 검기가 자연스레 떠올라 허공에 다섯 송이의 매화꽃이 피었다가 꽃잎이 되어 흩날린다.

꽃잎 하나하나는 날을 잘 들인 검과 같아 뭐든 닿는 순간 찢어발기기 충분할 것이다.

아직은 이 정도가 한계인 오매쟁속(五梅爭速)이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이미 고(古)장로들의 것과 같은지라 내공의 소모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조금 만족하였는지 초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진 칠매쟁수(七梅爭秀), 노매미려(老梅美麗) 또한 그 형태는 엉성하면서도 결과는 놀랍도록 깔끔했다.

열세 번째 초식인 선매청고까지 마친 초운은 열네 번째에 들어서서는 검을 거두었다.

그 이후는 검의 이야기를 들어야 펼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젠 다시 숙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명자를 향해 물었다.

“할아버지, 그리움 또한 욕심일까요?”

청명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욕심이지.”

“역시…… 도사가 욕심이 많으면 나쁜 거겠죠?”

초운이 다시 묻자 청명자는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도사 또한 사람인데 욕심이 없을 수 있겠느냐. 도사란 그저 지고한 일념으로 도(道)를 구하고 자신의 욕심을 다스릴 줄 알면 되는 것이다.”

“저는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겠어요.”

“너는 이미 잘하고 있다.”

그러자 칭찬에 즐거웠던지 초운의 얼굴이 환해졌다. 청명자 역시 환한 미소로 답했다.

十二章

혁련수가 발호했다!

단 한마디였으나 무림맹은 물론이요, 그 산하의 모든 문파들에게 불안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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