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26화
수련도사들의 증언을 모두 들어,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적오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려 했구나.”
“……너무 화가 났어요.”
“만약 그때 그 아저씨가 저를 때리지 않았다면 저는 분명…… 팔꿈치를 내려쳤을지도 몰라요.”
“…….”
“그게…… 그게 자꾸 머리에서 떠올라요. 떠나질 않아요. 그때의 난…… 엄마 아빠에게 돌을 던진 마을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랬다. 그들도 멈추지 않았다.
당시의 어린 초운이 바랐던 건 아주 작은 자비심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 돌을 던지는 것을 멈추는 이는 없었다.
초운은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그 순간…… 망설임 없이 팔꿈치를 내려찍으려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
“너는 다르다.”
사부의 음성이 한 줄기 빛처럼 초운의 앞을 밝혀 주었다. 물론 진짜 빛은 아니다. 그저 목소리만으로도 초운의 혼란스런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따뜻한 손이 초운의 등을 어루만졌다. 단 한 번도 먼저 안아 준 적 없던 적오가 처음으로 초운을 안아주었다.
적오가 다시 말했다.
“너는 다르다…….”
초운이 사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울먹였다.
“사부님…… 사부님. 사부님. 사부님…….”
“또 우는구나…… 또 내 옷에다 코를 풀면 안 된다.”
적오가 부드럽게 웃으며 초운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금 그의 얼굴은, 그를 아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처음 볼 만큼 자애로 가득했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던 두 사제…….
하지만 적오는 그리 오래 있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초운을 몸에서 떼어 내고 얼굴을 마주하던 적오가 물었다.
“사부가 없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사부님…… 어디 가요?”
적오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시진 전에 끝난 장로회의를 떠올리고 있었다.
* * *
“저는…… 일검쟁패를 포기하고 하산하겠습니다.”
제자의 선언에 백송 진인의 눈이 감기었다.
역시나 장로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일검쟁패를 포기하다니……!”
“육 년 뒤의 일검쟁패가 네 인생에서 마지막임을 알고는 있는 것이냐!”
오십 세 이하로 출전이 가능한 일검쟁패. 그 세대의 천하제일검을 뽑는 영광된 자리다.
그곳에 대표로 출전할 수 있는 것은 화산 내에서 단 삼 인…… 현재 아홉의 후보가 있으나 그중 가장 유력한 이가 바로 적오였다.
가장 유리한 적오가 그 자격을 포기한다니 놀랄 수밖에…… 우승 여하에 상관없이 다음 대의 화산제일검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그 삼 인의 대표 자리였다.
그런데 그것을 겨우 수련도사 아이 하나 때문에 포기하다니…… 장로들은 믿기지 않았다.
“쯧쯧. 이런 모자란 놈들을 봤나. 내 사질들이기는 하나 정말 아둔하구나. 지금 누가 너희를 두고 도사라 할 것이냐.”
그때 늙은 도사 하나가 혀를 차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커헉! 사백…….”
“누가 부른 겁니까! 누구……!?”
“설마 장문 사형께서 부르신 겁니까?”
백송 진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늙은 도사, 청연자가 장로들을 향해 일갈했다.
“시끄럽다! 이놈들!”
역시나 장로들은 모조리 입을 다물었다.
청연자가 다시 한 번 혀를 차더니 적오를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누가 도인이 무정하다 하였는가. 정이 없으면 도인이 아닌 것을…….”
불현듯 그가 중얼거렸고, 그 중얼거림은 모두의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모든 장로들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도사로서의 윤리 정도는 깨닫게 되었는지 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느새 상석에서 내려온 백송 진인이 적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도사다운 얼굴이 되었구나.”
적오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만져 보았다. 하지만 만진다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알게 될 날이 올 게야. 헌데 일검쟁패를 포기하는 걸로 모자라 하산까지 하겠다고?”
도문의 제자가 하산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으나 적오가 행하려는 것은 일종에 처벌이었다.
“네, 무림맹에 가겠습니다.”
“음…….”
무림맹에선 늘 구파를 향해 손을 벌린다.
스스로 자생할 수 있을 만큼 컸음에도 그들은 어미나 마찬가지인 구파의 피를 빨아먹고 싶어 한다.
때문에 구파에선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파견하는데, 그들 대부분 도구 취급을 당하고 혹사당한다.
화산이 무림맹에 사람을 파견하지 않은 지 꽤 되었으니 적오가 이번에 하산한다면 그동안의 무심함을 보상하듯 십 년은 잡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구파와 무림맹 사이의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백송 진인은 제자의 뜻이 확고함을 알았다.
“무림맹에 서신을 넣어주마. 단, 화산의 매화검수(梅花劍手)가 가는 것으로 해 놓겠다.”
“사부님!”
매화검수가 지금은 명예직이긴 하나 과거에는 화산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화산 내부에서야 이름뿐인 직책이나 밖에서는 그 명성이 여전했다.
만약 매화검수가 무림맹에 파견된다고 하면 꽤 소란스러워질 것이 분명하고, 적오에 대한 대우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적오는 새삼 사부의 배려에 감사했다.
* * *
“안 가시면 안 돼요?”
초운의 물음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적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미 약속을 해 버렸구나.”
초운이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저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제가 서 사형을 그렇게 만들어서 사부님이 저 떠나시는 거예요?”
초운이 손을 모아 비비며 애원했다.
“가지 마세요. 사부님. 초운이 버리지 마세요. 흑흑. 이렇게 빌게요. 네?”
적오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항상 딱딱하기만 하던 그의 마음이, 항상 남을 향해 벽을 세워 두던 얼음장 같던 마음이…….
제자를 위한 희생을 결심하고 나자 완전히 녹아버렸다.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마음을 적시는 중이었다.
적오는 다시 한 번 초운을 꼭 안았다.
“이 사부는 널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 길이 널 구하는 것임을 알기에 가는 것이다.”
초운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오히려 네가 날 버리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아니에요! 절대 안 그래요! 초운이는 안 그럴 거예요!”
초운이 울다 말고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적오가 그런 초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었다.
“초운아, 이 사부의 평생 소원이 무엇이지?”
“훌쩍. 훌쩍. 검향(劍香)에 이르는 거요.”
“그래, 맞다. 검향이지…… 이 사부의 평생 숙원이란다. 그리고 그것을 너를 통해 이루길 꿈꾸었다.”
적오가 처음으로 밝히는 진심이었다. 한 번도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초운을 자신의 유일한 전인으로 여겨 왔다.
적오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초운은 아쉬워했으나 사부가 뭔가 보여 주려 함을 알고 꾹 참았다.
“이젠 내 대신 이루라는 소리는 않겠다. 나 역시 어렴풋이나마 뭔가를 보았으니까.”
챙!
검을 뽑아 들자 맑은 검명이 주위에 울렸다. 달빛에 반사되어 그림자로만 보이는 사부의 모습은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초운은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있었다.
사부가 다시 말했다.
“앞으로 너와 내가 함께 이루었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매화를 닮은 검무(劍舞)가 사부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검의 환영은 하늘에 닿을 듯했고 그 잔영이 천지를 뒤덮었다.
이어서 느릿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느림의 변화는 그대로 이어져, 무엇보다 뚜렷한 검의 잔상이 되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검의 환영은 이윽고 매화꽃으로 변하여 세상 모든 것을 막아 내었다.
일곱의 매화 잎이 스스로를 뽐내나 늙은 매화는 노련하여 일곱의 매화를 제압했으며 또 그 늙은 매화는 다가오는 봄에 의해 가려졌다.
검무를 멈춘 적오가 초운을 향해 말했다.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이구나.”
초운은 지쳤는지 언제부턴가 새근대며 자고 있었다. 적오는 그런 초운을 조심히 들어 등에 업었다.
그리고 천천히 적운암을 내려가며 말했다.
“언제고 너는 너만의 검향을…… 나는 나만의 검향을…… 다시 만나는 날 서로에게 보여 주었으면 좋겠구나.”
“으으음. 사부니임, 가지 마요.”
초운의 칭얼거리는 듯한 잠꼬대에 적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청연자가 보였다. 이제 진정 떠날 시간이었다.
청연자가 가까워지자 적오는 초운이 깰세라 조심스레 안아서 넘겼다.
청연자는 그런 초운을 받아 들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잘 맡아 기르마.”
적오는 청연자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청연자가 웃으며 말했다.
“내 오래 살았더니 네놈에게 큰절을 받아 보는 날이 오는구나.”
“초운이에게 매화검류를 전수해 주십시오.”
매화검류란 이대제자부터 익힐 수 있는 십사수매화검과 선택된 이들만이 익힐 수 있다는 이십사수매화검을 뜻했다.
“걱정 마라.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러려 했다. 지금 보니 아주 괴물을 한 마리 만들어 놓았구나.”
청연자는 절정의 끝자락에 선 고수.
초운의 몸이 어떻게 단련되어 있는지 이미 한 번 안아 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사백조님.”
“걱정 말고 가거라.”
적오는 그렇게 화산을 떠나 무림맹으로 향했다.
그가 몸에 지닌 것은 장문인이 적어 준 서찰 한 통과 약간의 노자. 그리고 애검뿐이었다.
* * *
“사부님……? 사부님?! 사부님!! 사부니임!!!”
아침에 일어난 초운은 제 사부를 찾기 시작했다. 어젯밤 꾸었던 꿈들이 거짓이 아닌 진짜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덜컹!
급히 밖으로 나가 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복숭아나무뿐이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털썩 주저앉은 초운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도림평이야. 내가 도림평에 왔어. 그렇다면 사부님은 정말 떠나신 거로구나.”
“들어가 더 누워 있거라, 내상도 다 낫지 않았는데 너무 무리했더구나.”
어느새 다가온 청연자가 초운을 일으키며 말했다.
초운이 그런 청연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사부님은 가신 거죠?”
“그래.”
“그게 꿈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
초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더욱더 많아졌다. 하지만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초운이 동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부님. 꼭 보여 드릴게요. 꼭 맡게 해 드릴게요. 저만의 매화향을…… 저만의 검향(劍香)을…….”
어디선가 흘러온 차가운 바람이 초운의 전신을 어루만졌다. 그 바람을 타고 하얀 눈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눈이 마치 매화 잎처럼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