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22화
악휘구는 자기 코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액체를 닦아 내며 말했다.
“…… 손이 보이지도 않습디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보군.”
황현의 차가운 어조에 미지근한 코피를 입에 잠시 머금다 뱉어 낸 악휘구가 말했다.
“퉤! 지금은 황현 사형이 나보다 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고 이 빚은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래, 귀재라 불리는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만큼 나도 앞서 갈 거란 것은 잊지 말아라.”
“흥.”
“초운을 건드릴 생각도 말고.”
피를 멈추기 위해 코를 틀어막던 악휘구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녀석은 재미있소.”
“재미?”
“앞으로 뭐가 될지 알 수 없어서 재미있단 말입니다.”
악휘구는 엄지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적어도 나 악휘구가, 이 싸움에 미친 투견이……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기 전까진 건드릴 일 없을 거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어주지. 그리고 내게 복수를 원한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기다리고 있으마.”
황현이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악휘구는 열불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황현이 이대제자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라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팽!
황현이 서 있는 쪽을 향해 코피가 나던 코를 크게 한 번 풀어버린 악휘구가 산 아래 쪽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홀로 남은 황현이 코피에 젖은 자신의 신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음번엔 쌍코피를 터뜨려 줘야겠군.”
* * *
언제부턴가 적운암엔 식구가 하나 늘어나 있었다.
적오자는 맨 처음엔 가만히 두고 보다가, 녀석이 초운을 귀찮게 하는 등, 수련을 방해하는 것 같자 물었다.
“저놈은 누구냐?”
“아! 악휘구 사형이세요.”
악휘구라는 이름은 적오도 몇 번 들어 본 일이 있었다. 물론 좋은 소문은 아니었던지라, 그런 놈과 알고 지내는 초운이 못마땅했다.
“내일부터 오지 말라고 해라.”
“하, 하지만.”
“하지만 뭐냐.”
초운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맞잡은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초운을 사 년이 넘게 키워 온 적오는 그러한 행동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바라는 것이 있을 때 하는 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적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말했다.
“그럼 수련에 방해 안 되게 조용히 있으라고 해.”
그러자 초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네! 네, 그럴게요!”
“빨리 수련이나 해라. 갈 길이 멀다.”
“네! 네! 사부님! 아! 잠깐만요. 악 사형한테 조용하라고 말하고 올게요.”
적오는 대답 대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느새 악휘구 앞까지 달려간 초운이 깡충깡충 뛰며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이 보였다.
지켜보던 적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九章
빠각!
“대체 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야! 벌써 한 달이 지났잖아.”
서평이 숙소에 있던 의자를 하나 박살 내며 말했다.
숙소에 있던 아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다.
서평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서평은 화산에 입문하기 전보다 성격이 많이 삐딱해져 있었다.
언제부턴가 누가 조금만 실수해도 몰아붙이기 일쑤였고 심하면 때리기까지 했다.
조그마한 숙소 안에서의 서평은 폭군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그런 서평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다들 조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평은 요새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본가에 서신을 보내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그저 삼십육로백뢰검의 완성을 위해 화산검의 ‘변화’를 어느 정도 익히기 전까진 돌아오지 말라는 말만 써 있었다.
그나마 이대제자가 되란 소리는 없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화는 모두 초운에게로 향했다.
속 시원하게 괴롭히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기별조차 없는 악휘구 때문에 서평은 더욱더 안달이 났다.
가끔 식당으로 내려오는 초운을 살펴보았지만 어디 하나 다친 데도 없고, 얼굴도 밝아 보였다.
그래도 참고 기다려 보았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본가에선 뭐든 자기 마음대로, 의도대로 흘러갔건만, 화산에선 어느 하나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화가 차올라 정신적으로 피곤해지자 옛 버릇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뭔가 궁리하던 서평은 곧 뭔가를 결심한 듯 숙소 바깥으로 나갔다.
서평이 사라지고 나자 숙소 안의 다른 수련도사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평이 너무 이상한 것 같지 않아?”
“그래, 그 괴짜한테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괴짜는 바로 초운이었다. 사부인 적오자의 악명 때문에 초운이 괴짜로 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큰 코 다칠지도 몰라.”
정보통이라는 육경이었다.
“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초운이는 천하절세광세무적의 신공을 전수받느라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던걸.”
소문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지만, 요즘 들어 그러한 소문이 도는 것만큼은 진짜였다.
“하긴 같은 수련도사인데 자기 사부한테 개인적으로 배우고…… 원래는 이대제자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응, 그러니까 신빙성이 있는 거지. 아마 서평은 그걸 몰라서 큰 코 다치게 될 거야.”
육경의 말에 갑자기 옆에서 듣고 있던 숙소에서 가장 어린 소년이 말했다.
“근데 서평은 코 안 큰데.”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치 없는 소년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코 확 다쳐 버렸음 좋겠다. 그치?”
아이들의 침묵이 깨지며 여기저기서 경쟁적인 동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코도 깨지고 이빨도 빠지면 좋겠어.”
“난 이마.”
“난 눈탱이.”
“난 거시기!”
마지막 단어에 짜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말했다.
“그래도 거시기는 좀…….”
“그래, 그건 좀 아니다.”
“…….”
“…….”
* * *
“으아! 이런 미친 썅! 으아아아!!”
악휘구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적오자는 욕설을 듣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초운의 귀를 막고 있었다. 그가 무심한 얼굴로 외쳤다.
“초운이는 그 상태로 잠까지 잔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온몸이 묶인 채, 낭떠러지 끝에서 엄지발가락 하나로 버티며 산의 광풍을 이겨 내는 일은 내공을 사용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두 눈을 가리고 균형 감각을 흐트러뜨린 상태에선 더욱 그러하다.
초운이 단련되어 쉽게 해낸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거짓말을 나보고 믿으라고요오오오?”
악휘구의 절규에 적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믿든가 말든가.”
악휘구는 악가의 창술을 접목하여 만든 새로운 복호권을 초운에게 가르쳐 준다며 명목으로 자주 찾아왔다.
그러다 초운이 행하는 수련들을 보고 하나둘씩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적오 또한 그것을 그리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공을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고 싸움을 여자보다 즐긴다는 귀재 악휘구조차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구르자 비명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욕심을 내어 초운과 같이 삼백 근에 달하는 무쇠 고리를 양팔과 발목에 찼을 때는 다음 날 숙소에서 기어 다녀야 했다.
그건 좀 무리다 싶어, 고리를 포기하고 초운이 쓰던 칠십 근짜리 철심이 박힌 목검으로 검을 휘둘러 보았는데 어떤 검식도 펼쳐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내공금제 후 이어지는 추궁과혈을 빙자한 구타…… 초운도 요즘엔 아주 가끔만 하는 것인데, 그걸 두꺼운 근육으로 버티겠다며 고집스레 맞다가 네 번이나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에 도전한 것이 바로 이 낭떠러지 수련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결국 제대로 버텨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사숙님! 이 말도 안 되는 수련들을 정말 초운이 해낸 거 맞습니까? 무슨 약 먹인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있음 내가 먹지 왜 초운이를 주겠냐?”
“…….”
하긴…… 보름간 겪어 본 적오자는 분명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사람을 사부랍시고 존경하는 초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초운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든가 말든가, 새로운 무공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바로 악휘구가 임의로 변형한 복호권이었는데, 어차피 정식제자도 아닌 수련도사일 때고 권법의 근원이 화산의 복호권인지라 배우는 데 하자는 없었다.
복호권은 유(柔)와 변(變)을 기본으로 하는 화산의 다른 무공들과 달리 오로지 전진 일색의 강권(强拳).
거기에 악가창법 특유의 공격력을 추가하니 꽤 괜찮은 무공이 나왔다.
내공심법이 아닌 비슷한 성향의 초식을 융합한 것이기에 창안하기 간단한 편이었지만 누구도 생각 못한 것을 생각해 내고 실행에 옮겨 성공했다는 것은, 악휘구의 재능이 보통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실제로 적오 또한 악휘구가 만든 복호권을 보고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악휘구는 자신조차 만들어 놓고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악가복호권을 초운이 완벽하게 익혀 내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살펴본 결과 초운은 분명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은 몸에는 범인은 상상도 못할 엄청 기초가 쌓여 있었다. 그 기초는 곧 공력이라 부를 수 있다.
내공심법으로 얻은 진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단전이 아닌 육신 자체에 쌓인 힘이라고 봐야 했다.
때문에 진각을 한 번 밟아도 깊이가 있고, 주먹을 한 번 질러도 거력이 느껴진다.
물론 바로 위의 이대제자들에 비하면 아직 손색은 있으나 적어도 수련도사들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비무 경험까지 쌓인다면……?
꿀꺽.
목젖이 꿈틀대며 침이 넘어갔다.
장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기대되어서였다.
큰 적수로 키워 잡아먹고 싶은 욕망. 바로 싸움터의 투견으로서의 욕망이 꿈틀대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은 잠시 동안이지만 서평과의 거래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잠시뿐이었다. 얼마 안 있어 서평이 직접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