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21화
아직도 답답했는지 말끝에 기침이 섞여 있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린다든가, 입가에서 피를 흘린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이를 확인한 악휘구의 얼굴이 더욱더 굳어졌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초운도 조심했다.
방심했다가 복부와 명치를 그대로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를 괴롭히시는 건가요. 사형…… 제가 뭔가 잘못했다면 말씀해 주세요.”
초운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이들에겐 무조건 사형이라 부른다.
때문에 눈앞의 악휘구도 그리 부른 것이다.
이를 듣던 악휘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그를 사형, 혹은 사제라 불렀던 수련도사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늘 혼자 다니고, 어쩌다 말을 붙여도 근육 자랑을 하거나 비무니 싸움이니 하며 덤벼드는데, 사형 대접 사제 대접을 제대로 해 줄 리 없다.
그는 잠시였지만 초운에게 호감을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서평과의 거래를 잊지 않고 있었다.
비록 악동 소리는 듣고 살지만, 절대 ‘약속’을 저버리는 일은 없는 악휘구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부우웅!
바람의 저항력을 뚫고 악휘구의 일권이 창처럼 뻗어 나갔다.
준비하고 있던 초운은 전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대로 손을 교차하여 솥뚜껑과 같은 악휘구의 주먹을 막아 냈다.
하지만 양발이 땅에 긴 도랑을 만들고 말았다.
주먹질 한 방에 일 장이나 뒤로 물러난 초운을 보고 놀란 것은 바로 악휘구였다.
방금의 일권은 막은 팔의 뼈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악휘구의 타고난 신력이 담긴 일격이었다.
헌데 그것을 열두 살 소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낸 것이다.
“이런 미친…….”
이번엔 초운의 머리통보다 큰 무릎이 얼굴을 노리고 들어왔다.
풍압으로 인해 초운은 얼굴의 피부가 쓸려 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집중했다. 단 직접 막지는 않고 무릎을 밟고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했다.
악휘구가 굳은 표정으로 초운을 불렀다.
“야, 꼬맹이…….”
“네?”
“너 말이야…….”
악휘구의 입꼬리가 찢어지듯 쭉 올라갔다. 반쯤 장난 삼아 시작했던 일인데 진지해진 것이다.
투견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악휘구가 말을 이었다.
“아주 재밌어.”
팟.
악휘구의 거대한 동체가 사라졌다.
초운이 급히 돌아보니 어느새 등 뒤에서 나타나 팔꿈치를 정수리에 찍으려 하는 중이었다.
초운은 양손을 올려 팔꿈치를 막았으나 악휘구의 타고난 신력에 내공까지 섞였는지 충격이 그대로 전해져 와 무릎이 굽혀졌다.
공격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무릎이 명치를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초운은 피하기 어려움을 알고 몸을 뒤로 날리며 가슴에 힘을 주었다.
파악!
이번에도 역시 견디자 악휘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더 진해졌다.
충격을 분산시켜 버린 초운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악휘구의 눈에는 기쁨이 넘쳤고 표정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이는 싸움을 좋아하는 투견의 모습일 뿐이다. 언뜻 광기마저 엿보였다.
악휘구의 주먹이 또 한 번 창(槍)처럼 직선으로 튀어 나갔다.
이는 화산 복호권의 망산태호(網山殆虎)라는 초식에 악가 창식의 극섬일(極殲一)이라는 초식을 더해 응용한 것이었다.
사람을 꿰뚫어 죽일 듯한 일권(一拳)에는 살기마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초운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천 길 낭떠러지 끝에서 엄지발가락 하나에 의지한 채 광풍을 이겨 내던 아이 아니던가.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 냉정했다.
“하압!”
뒤로 일 보를 급히 물러선 초운이 고함과도 같은 기합을 질렀다.
그러자 주먹이 초운의 얼굴 한 치 앞에서 멈추며 그 기세가 사그라졌다.
이에 놀란 악휘구가 말했다.
“기합으로 내 기운을 상쇄해?”
그랬다.
초운이 뒤로 일 보 물러선 것은 악휘구의 팔 길이를 알고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기 위해서였으며 기합을 지른 것은 주먹에 실린 공력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격공장처럼 허공을 격해 사람을 쓰러뜨릴 수준은 아니나, 주먹엔 분명 공력이 실려 있었고, 때문에 맞지 않는다 해서 문제가 끝난 건 아니었다.
공력은 곧 싸움의 기세이므로 상대방의 다음 공격을 위한 흐름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초운은 기합을 내질러 일시적으로 악휘구의 공력을 흐트러뜨린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알고 했다기보다 본능적인 행위였다.
순간 공력이 흐트러진 악휘구가 다음 일격을 내지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며 웃던 악휘구가 이윽고 가슴을 활짝 펴며 큰 소리로 웃어 재꼈다.
“하하하하하!!!”
“에……?”
영문을 모르는 초운으로서는 그의 웃음이 수상할 뿐이었다. 또 방심시켜 놓고 때리는 게 아닌가 해서.
초운은 긴장을 유지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악휘구가 양손을 펼치며 말했다.
“싸울 맛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만두마. 그러니 긴장 풀어라.”
“……정말요?”
“그래. 이 악휘구, 다른 건 몰라도 내 입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순진하게도 초운은 그 말을 믿었는지 곧바로 기세를 풀었다.
악휘구는 초운의 그러한 순진함마저도 새로웠다.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심지어 가문의 형님들 중에서도 없었다.
악휘구가 다시 말했다.
“좀 전에 왜 공격하지 않은 거지?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말이야.”
공력이 흐트러졌던 그 순간은 초운에게 있어서 절호의 기회였다.
적어도 악휘구 자신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직접 손을 맞대 본 초운 또한 그 틈을 노릴 만한 눈썰미와 저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초운의 대답은 아주 단순했다.
“사형이잖아요.”
“……응?”
“사형인데 어떻게 때려요?”
이날 이때껏 누군가를 때려 본 적도 없는 초운이었다.
남현기나 팽호와의 일도 오직 방어했을 뿐이지 때린 것은 아니었다.
팽호와 힘겨루기를 할 때조차 내공을 방어에만 사용하지 않았던가.
초운에게 있어서 사문의 사형을 때리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악휘구는 살짝 오해하고 말았다.
“사형이라 봐준 거라 이거냐?”
“……아닌데.”
초운이 답답한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악휘구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비무는 해본 적이 있고?”
설마 하며 물었다.
자신의 공격을 그리 멋지게 막아 낸 아이가 비무 한 번 한 적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없는데요?”
초운이 고개를 젓자 악휘구가 헛웃음을 내며 말했다.
“허, 기가 차는구만. 내가 이런 애송이한테…….”
“근데요. 사형?”
“뭐.”
“사형, 그 주먹질은 뭐예요? 우리 화산파 무공인가요?”
“주먹질? 너 설마 복호권도 모르는 거야? 적오 사숙에게 대체 뭘 배우는 거지?”
“옥허공이랑 오행매화보랑 육합구궁검이요.”
“……꼴랑 세 개?”
그럼 기본적인 박투술도 모르는 아이가 자신의 권격을 막아 냈다는 뜻이다. 그러자 틈이 있는데도 공격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때리는 법도 모르고 비무도 해본 적이 없으니 뭘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악휘구의 입장에선 결국 순진한 어린애 괴롭히다 실패한 꼴이 되어버렸으니 쪽팔릴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크게 와 닿진 않았다.
그저 지금은 이 어린 사제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사제…… 아! 사제라 불러도 되겠지?”
“그럼요. 악 사형.”
악휘구는 초운이 불러 주는 사형이라는 소리가 더없이 달콤했다.
다른 이들은 마지못해 사형 취급을 해 주는데 그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운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는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사막에서 찾은 감로수와 같은 것이었다.
악휘구는 생소한 감정의 여운을 즐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적오 사숙에게 배우고 있지 아마?”
“네에!”
“흠. 그럼 적운암이겠군. 조만간 내 복호권을 가르치러 찾아가마.”
“네?”
“왜? 싫어?”
초운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건 아니구…… 사부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해서…….”
악휘구가 호탕하게 웃으며 초운의 등을 두들겼다.
“하하하. 그건 걱정 마라. 사형이 사제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분명 허락하실 거야.”
“네, 알았어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악휘구는 초운을 다시 올려 보냈다.
초운은 시간이 꽤 흐른 것을 알고, 서둘러 산을 올랐다.
그래도 올라가는 동안 몇 번이고 등을 돌려 악휘구를 향해 손 흔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악휘구 역시 그런 초운에게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초운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등 뒤로 은밀한 기척이 느껴지자 악휘구가 그대로 뒤돌아서며 주먹을 내질렀다. 역시 특기인 극섬일의 일권이었다.
팡!
옅은 파공음이 허공을 찢었으나 주먹 끝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주먹이 향하는 곳의 끝에 한 청년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악휘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 악동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로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얼굴 표정 말이다.
“이게 누구십니까? 남의 등 뒤로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게 누군가 했더니. 잘나신 이대제자 황현 사형 아닙니까.”
그는 바로 곽호의 식당에서부터 초운을 뒤따라온 황현이었다. 황현은 악휘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사형제끼리의 비무치고 손속이 너무 과하더구나.”
“그래서…… 집법원에 이르시기라도 할 겁니까?”
황현은 집법원의 차기 원주라 할 수 있는 적리자의 제자, 악휘구는 그 점을 두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하지만 황현은 대수롭지 않은지 그저 피식 웃고 말 뿐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악휘구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뿌드득.
주먹에서 뼈 부딪히는 소리가 낮게 흐른다.
삼 장…… 이 장. 일 장.
이윽고 황현의 신형이 지척에 이르자 악휘구는 어금니를 꽉 물며 진각을 밟았다.
꽝!
굉음과 함께 흙바닥이 한 자나 파였다. 그리고 이어진 일격.
초운과의 일전에서 보여 준 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르고 강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주먹이 황현의 얼굴에 채 닿기도 전에 악휘구의 고개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주먹을 제대로 뻗지도 못한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악휘구를 향해 황현이 말했다.
“그 짧은 순간에 급소를 피하다니 제법이구나.”
“제길, 역시 이대제자인가?”
같은 상승무공이라 해도 악가의 것은 화산의 것에 비해 그 깊이가 낮다.
하지만 적어도 악휘구가 황현과 비슷한 또래였다면 지금처럼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악휘구의 성격상 그 나이에 걸맞은 수련을 쌓아 왔을 테고, 그만큼 강해져 있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결국 지게 된다 하더라도 상당한 공방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악휘구는 고작 열여섯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게 너무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