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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9화 (19/217)

검향 19화

八章

산동악가 출신인 악휘구(岳輝具)는 소문이 무척이나 안 좋았다.

오죽하면 화산의 기재가 아닌 귀재(鬼才)라 불리고 있겠는가.

그는 산동악가에서도 포기한 망나니로 사실 스스로 오고 싶어 화산에 온 것이 아니었다.

워낙 사고 치길 좋아하는 악동이라 청정한 도문에서 심성을 가다듬으라고 집안에서 강제로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들의 바람은 아무 소용없었다.

입문한 지 삼 년이 흘렀음에도 악휘구는 여전히 악동이었고 특히 싸움을 좋아했다.

게다가 악가 출신답게 덩치도 크고 힘이 세서 열여섯의 어린 나이임에도 수련도사들 중에 당할 이가 없었다.

서평이 소문의 악휘구를 찾은 것은 초청회가 끝나고 두 달이 흐른 후였다.

상책에서 실패했으니 남은 것은 중책과 하책인데, 하책은 자존심상 쓸 수 없었고, 중책은 너무 위험하여 꺼려졌다.

때문에 중책을 쓰기로 결심하는 데까지 두 달이나 고심하여야 했다.

악휘구는 이번 계책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사람이었다.

팽호나 남현기 같은 이들은 다루기가 쉬웠다.

하지만 악휘구는 제어가 불가능하고 아주 위험한 종자였다.

열두 살 때 삼촌의 친우에게 싸움을 걸어 귀룰 물어뜯었다던가?

게다가 그 친우라는 자는 일류의 고수였다.

단순히 무공 수준을 봤을 때 악휘구는 팽호 등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악휘구는 괴물이 따로 없다.

자신보다 무공이 높은 이들을 픽픽 쓰러뜨리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악휘구의 별명은 귀재였다.

“그래, 네가 왔다는 소식은 들었지…….”

자그마한 소도로 사과를 잘라 먹던 거대한 덩치의 소년, 악휘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네가 여기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내심을 숨긴 서평이 악휘구를 향해 다시 말했다.

“한 가지 거래를 하고 싶은데…….”

“사형이라 불러라.”

“에?”

악휘구의 난데없는 사형 소리에 서평은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뭐…… 라고?”

“사형이라 부르라 했다. 음흉한 놈아.”

으득!

서평이 이를 갈았다. 저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 때문에 만나기 싫었다. 그런데 역시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서평은 일그러진 얼굴을 애써 감추었다.

“하하하. 음흉…… 하다니요. 악. 사. 형.”

“잔머리 굴리는 놈들은 원래 다 음흉해. 지금도 그래, 다른 녀석들이라면 그 소리 듣자마자 덤벼들거나 꼬리를 내렸을 텐데, 넌 곧 바로 사형이라며 말부터 올리잖아? 음흉해…… 음흉해…….”

“…….”

앙상해진 사과를 버리고 칼을 소매에 슥슥 닦아 품에 넣은 악휘구가 화를 삭이는 중인 서평을 향해 물었다.

“그래, 거래하고 싶은 게 뭐야? 서. 사. 제.”

서평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 놈 정리해 줬으면 해서 말이죠.”

“네 손으로 직접 하지 왜? 서가장 막내의 검이 제법 매섭다는 소리 들었는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손에 때를 묻히나요.”

“킥. 그럼 나는 때를 묻혀도 된다는 거야?”

악휘구가 서평을 노려보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번들거렸다.

“사형께도 좋은 일입니다. 보통 놈이 아니거든요.”

“그래? 재밌는 놈인가 보지?”

“남현기는 경공에서, 팽호는 힘에서 밀렸습니다.”

서평의 말을 듣던 악휘구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계속 읊어 봐.”

“게다가 그 적오 사숙의 수련을 사 년간이나 버티는 중이라더군요.”

“아, 그 녀석인가? 언젠가 들은 적 있지. 마주친 적은 없지만…….”

갑자기 악휘구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줄어들었다. 서평이 당혹하여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너무 어려서 재미가 없을 것 같군. 그놈이 정말 팽호를 힘으로 눌렀어?”

서평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압도적이었지요.”

“열두어 살밖에 안 되었을 텐데?”

“제가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수염도 나지 않은 턱을 쓰다듬던 악휘구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네가 내거는 조건은 뭔데?”

“천…… 혜지입니다.”

악휘구의 귀가 꿈틀댔다.

“천혜지?”

“그렇습니다. 집안끼리 친하기 때문에 저와도 친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소개시켜 드리죠.”

육대세가의 자제들이 천혜지를 좋아한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특히나 눈앞의 악휘구는 천혜지와 같은 산동 출신이다. 천혜지를 마다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휘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서평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다야?”

“…….”

“천혜지 따위 우리 집의 바보 형님들이나 좋아하지, 난 별로야. 애가 가슴만 무지 컸지, 하는 짓은 멍청하니까.”

서평은 놀랐다. 아니, 잠시지만 악휘구를 경외 섞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볼 때마다 숨이 막힐 만큼 엄청난 미모를 지닌 천혜지를 두고 가슴만 큰 멍청이라니…… 악휘구의 저 대담함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네가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악휘구의 느릿한 음성에 거의 포기 상태이던 서평이 고개를 번쩍 들며 되물었다.

“뭡니까? 그게…….”

“천혜지의 호위 중에 백룡이라는 녀석이 있지.”

서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천화호위(天花護衛) 백룡이라면 산동에서든 그 너머에서든, 적어도 천혜지를 아는 이들 중에는 모르는 이가 없다.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근접 거리에서 비밀리에 그녀를 보호하는 최고의 보표.

나이 미상. 성별 미상. 하지만 보표로서의 실력만큼은 최상위라는 일류무인.

그것이 바로 백룡이었다.

그런 자의 이름이 어찌 악휘구의 입에서 나오는 건지 서평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자식과는 안 좋은 기억이 있거든. 내가 귀를 깨물어버렸지.”

“아…… 그렇다면.”

악휘구가 독종으로 이름을 날린 데에는 어린 나이에 산동악가 소가주의 친우에게 싸움을 걸고 급기야 귀를 물어뜯은 일 때문이었다.

헌데 그게 바로 백룡이었단 말인가? 서평은 처음 듣는 비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 소문의 그놈이 바로 그놈이다.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으니 넘어가고, 네가 천혜지를 부르면 백룡은 반드시 온다. 두 달 전의 초청회에 천혜지가 온 줄 알았다면 진작 마을에 내려가 볼 것을…… 나도 멍청했었어.”

“백룡 님은 오시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놈은 원래 귀신같아. 천혜지 편하라고 절대 먼저 모습을 보이지 않지. 모습을 보이는 건 오로지 천혜지의 목숨이 위험할 때뿐이야.”

“헉!”

그런 이유였던 건가. 천혜지가 그리 무방비로 다녀도 여태 아무 일이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런 이유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악휘구가 백룡을 끌어내기 위해 천혜지의 목숨을 노리고도 남을 놈이라는 데에 있었다.

‘여, 역시…… 미친놈.’

순간 후회의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천혜지는 서가장의 중요한 거래처인 천일상가의 금지옥엽…… 무슨 일이 생기면 서평 자신에게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것이다.

“그러다 천혜지가 다치기라도 하면…….”

서평이 당황해서 말하자 어느새 다가온 악휘구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설마 내가 그 애를 다치게 하기라도 하겠어? 서. 사. 제?”

“음…….”

싸움에 미친 투견이 속삭이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무섭다거나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악휘구 특유의 광기가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서평은 잠시 머릿속에서 저울질을 해 보았다.

악휘구를 이용해 초운을 손봐 주는 일…….

과연 천혜지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였다.

결론은 쉽게 나왔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지. 특히 추악한 광견과는…….’

서평은 악휘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기로 했다.

악휘구가 자기 또래에서 괴물처럼 강하다지만 서가장의 무공을 익힌 자신도 그리 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천혜지를 불러내 보죠. 하지만 백룡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악 사형께 달려 있습니다.”

“말이 잘 통하는데? 거래 성립이로군.”

악휘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서평은 왠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싸움 직전의 투견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 * *

“……사부님. 배고파요.”

수련에 이골이 나서 어지간해서는 지치지도 않는 초운이 모처럼 우는 소리를 했다. 아침도 거른 채 수련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오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시끄러우니 일각 더하거라.”

“네에?”

“이각 더 추가다.”

“…….”

초운은 지금 무쇠 고리를 모두 벗어 놓은 상태였다.

대신 눈을 가리고 높은 절벽 끝에 서서 엄지발가락 하나로 몸을 지탱하는 중이었다.

조금만 헛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테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초운은 계속해서 징징대는 중이었다.

이 수련은 보법에서 가장 중요한 균형 감각과 공력을 일으키는 호흡의 세밀한 조절, 그리고 정신의 단련을 위해서였지만 이미 초운의 정신은 천 길 낭떠러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두꺼워졌으며, 균형 감각은 보법을 어떤 자세에서든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호흡 또한 충분히 길어서 이미 소주천을 이룬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이러한 수련을 계속 시키는 것은 이 또한 공(功)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내공심법을 통해 진기를 늘리는 것은 공력이 아니다.

같은 동작을 무한히 반복하여 하나의 동작에도 ‘깊이’가 실릴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기와는 상관없는 공력이며 내공이다.

적오자는 초운의 몸에 일종의 탑을 쌓는 중이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언젠가 그 끝이 하늘에 닿을, 거대하고 높은 탑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기초를 튼튼히 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다 보면 똑같은 초식을 똑같은 공력으로 펼쳐도 남들보다 강한, 완성된 무인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이미 재능이나 재질의 차이는 그 의미를 잃게 되리라.

재능도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이’로 인해 큰 깨달음 없이도 일검에 태산이 실리고, 일보에 바다의 변덕과 강물의 흐름을 담게 될 터인데 재능이 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일류임에도 절정의 고수와 능히 겨룰 수 있는 무인.

그것이 바로 적오자가 원하는 무인의 완성형이며 절대경의 길에 이르는, 가장 멀고도 가까운 지름길이었다.

만약 노력과 성실을 재능이라 부를 수 있다면 초운은 천재나 다름없었다.

적오자가 말리지 않는 한, 힘들고 아파도 절대 수련을 멈춘 적이 없다. 수련 받다 죽는다 해도 포기하지 않을 그 우직함.

그것은 적오가 무엇보다 더 원하던 것이었다.

이각이 더 흐르는 동안 명상을 하는 척 눈을 감았다가 실눈을 뜨고 초운을 살피던 적오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흐흠. 그만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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