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7화
없다. 없었다. 아버지가 상행에서 돌아오던 날 선물해 준 은장도였다.
너무나 예쁘고 아름다워서 그녀가 가진 어떠한 것들보다 소중히 여기던 것이었다.
그런 은장도가 사라졌다.
“왜 그러십니까, 소저.”
남현기가 그녀의 안색이 변한 것을 눈치채고 말을 걸어 왔다.
“은장도가 없어요. 사라졌어요.”
그녀의 대답에 남현기 또한 안색이 변했다. 천혜지가 그 은장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오랫동안 지켜봐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팽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
팽호가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자신과 남현기는 분명 천혜지와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하듯 서 있었다.
그 거리는 불과 반 장도 되지 않는다.
저 초운이라는 수련도사 꼬맹이가 부럽고 불쾌하긴 했으나 자신보다 어린 소년에게 질투하는 것은 되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반 장의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던 것이다.
때문에 남현기와 팽호의 눈을 피해 은장도를 훔쳐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혹 어딘가 떨어뜨리진 않았는지 찾아보지요.”
남현기였다. 그러나 천혜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리춤에 달려 있던 끈을 보여 주었다.
“은장도를 매달았던 가죽끈이에요.”
팽호가 가까이 다가와 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확인했는지 그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이건…….”
“왜? 뭐가 문제인데?”
“누군가 베어 간 자국이다.”
팽호의 답에 남현기가 분노했다.
“어떤 놈이 감히!!”
그때 때마침 서평이 돌아왔다. 곁에는 황현이 함께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넌 대체 어디 다녀온 거야?”
남현기가 까칠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자 서평이 어깨를 으쓱하며 황현을 소개했다.
“여긴 이대제자이신 황현 사형이셔. 우연히 만나서 담소를 나누느라 늦었지.”
완벽한 핑곗거리였다.
서평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은장도를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웃었다.
남현기는 눈앞의 황현이라는 사내가 이대제자라는 소리에 곧바로 포권했다.
황현 역시 남현기 등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소란이 있는 듯하군요.”
남현기와 팽호는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여기 천혜지 소저의 물건이 도난당한 듯합니다.”
그러자 질문자인 황현 대신 서평이 나섰다.
“도난? 그 무슨 황당한…… 너희들이 안 보고 있었어?”
“……그래서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게 분명 팽호와 내가 반 장 앞에서 지키고 있었건만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사실 천혜지와 두 소년 간의 반 장 거리…….
그 사이를 지나친 인원은 꽤 많았다. 워낙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두 소년은 천혜지에게만 집중하였지 그녀가 지닌 노리개까지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소년 모두 상승의 무공을 배운 인재들…….
그런 자신들의 눈을 피해 은장도를 훔쳐 갔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서평이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말했다.
“분명 너희의 눈을 피해 훔쳐 가는 것은 불가능할 거야.”
“그렇지.”
“하지만 아주 근접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한 시진 가까이 계속 붙어 있던 사람이었다면?”
서평의 질문 아닌 질문에 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쩌면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지.”
팽호의 대답이 신호라도 된다는 듯 서평은 한 소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을 따라 팽호와 남현기, 그리고 천혜지의 시선이 함께 움직였다.
시선의 끝에 있던 것은 바로 초운이었다.
초운이 눈을 껌뻑거리며 그들을 마주 바라보았다. 남현기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조금…… 수상하긴 했었지.”
팽호도 초운을 향해 말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은 너뿐이로구나. 네가 가지고 갔느냐?”
이에 초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걸요.”
이번엔 서평이 추궁했다.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도 태연하구나.”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오해를 받는다면 누가 되었든 당황하게 마련이지.”
초운은 자신을 추궁하는 서평의 얼굴을 보자 왠지 불쾌해졌다.
해서 언성이 조금 높아지고 말았다.
“정말 저는 훔치지 않았어요!”
“혹시 지금 나에게 화내는 것이냐? 정곡을 찔린 건가?”
서평은 초운이 어떤 반응을 하던 도둑으로 몰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래도 저래도 의심을 받으니 초운으로서는 억울할 뿐이었다.
초운은 자신의 곁에 있던 천혜지를 올려다보았다.
“누나도 저를 도둑이라 여기시나요?”
“…….”
천혜지는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만난 지 불과 한 시진이 흘렀을 뿐이지만 분명 초운이 맑고 바른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평이나 남현기, 팽호 등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 그게.”
그녀가 대답 못하고 뜸을 들이자, 초운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누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군요. 초운이가 도둑이라구요…….”
실망한 낯빛의 초운이 떠나려 하자 이에 남현기가 외쳤다.
“어딜 가려 하느냐!”
“저는 잘못이 없어요. 저를 믿지 못하는 형들이 더 이상해요. 제가 훔친 걸 직접 보신 분들 있나요?”
고개를 돌리고 당당히 말하는 초운을 향해 남현기가 실소를 흘렸다.
“허허. 이런 어처구니없는…….”
“저는 산에 올라갈 거예요. 그래도 누나가 노리개 잃어버린 건 안타까워요. 꼭 찾기를 바랄게요.”
천혜지는 초운의 맑은 눈동자에서 진심을 읽었다. 초운은 분명 노리개를 찾길 바라는 듯했다. 뒤늦게 후회한 그녀가 초운을 부르려 할 때였다.
“초, 초운아…….”
“이 거지 같은 게 감히 날 무시해?!”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는 남현기의 고함에 묻히고 말았다.
남현기의 신형이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 나가며 초운의 뒷목을 잡아챘다. 아니 잡아채려 했다.
팟!
초운의 신형이 땅으로 꺼지듯 갑자기 사라지며 남현기의 손짓은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뒤편에서 팽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좌측이다. 현기.”
급히 좌측을 바라보니 초운은 여전히 등을 보이며 걷고 있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진 남현기가 다시 한 번 몸을 날렸다.
섬서남가(陝西湳家) 급풍섬(及風閃).
비의(秘意). 백예(白預).
남현기의 몸이 길게 죽 늘어지는 듯하더니 초운을 지나쳐 정면에 안착했다.
하지만 초운은 그러한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행매화보의 천매보(千梅步)를 자연스레 펼치며 상대의 무릎을 밟고 어깨를 밟은 뒤 머리를 타고 넘어갔다.
“이…… 이게!!”
이젠 뭐 은장도고 천혜지고 잊어버렸다.
하수로 생각하던 녀석에게…… 그것도 자신 있는 경공과 보법으로 당하고 나니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초운이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쫓아오지 마세요. 저는 정말 훔치지 않았어요.”
가뜩이나 상해 있던 자존심이었다. 한데 초운의 말은 남현기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끄러워!!”
바람도 불지 않는데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근처에서 팽호와 함께 지켜보던 서평이 그 모습에 놀라 중얼거렸다.
“그것까지 꺼낸다고?”
혼자 팔짱을 끼고 무게 있게 지켜보던 팽호 역시 팔짱을 풀며 중얼거렸다.
“설마…….”
제아무리 섬서남가의 자제라고는 하나 열다섯의 나이라면 아직 진짜 급풍섬을 맛보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상승의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아직 낮고 공력 또한 일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현기는 금풍섬의 모든 걸 익혔으나 그 수준은 겨우 삼성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 정도만으로도 또래에서 그를 잡을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물론 가문의 비슷한 나이 대의 아이들 중에서 급풍섬의 모든 것을 익힌 이는 없었기 때문에 남현기는 천재 소리를 듣고 떠받들어지며 살았다.
헌데 그런 그의 경공을 여유롭게 피하고 더구나 어깨를 타고 넘어버렸다. 그것도……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
처음엔 방심했다 쳐도 두 번째 백예를 사용했을 땐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를 사용하는 것은 더욱더 진심이었다.
“이것마저 깬다면 인정해 주지.”
초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렸다. 남현기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남현기가 처음으로 외쳤다.
“급풍섬! 잔영(潺影)!”
“여, 역시나!”
남현기의 외침에 친우가 무엇을 쓸지 알게 된 팽호가 급히 달려 나갔다.
가느다란 연검 한 자루와 급풍섬은 궁합이 좋았다.
섬서남가의 검식이 상승의 검리를 담고 있지 않음에도 강호일절이 된 데에는 급풍섬의 도움이 컸다고 볼 수 있었다.
먼 옛날 섬서남가에 찾아온 신선이 전해 주었다고 하는 걷는 법과 뛰는 법…… 그것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급풍섬이 된 것이다.
잔영(潺影)은 급풍섬의 아홉 가지 ‘걷는 법’ 중 하나로 걷고 난 자리에 소리의 그림자만 남는다는 절기 중의 절기였다.
하지만 엄청난 공력이 필요하기에, 남현기는 이것을 익히고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사실상 좀 전에 썼던 백예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절기였다고나 할까?
때문에 지금 남현기의 코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승의 절예란 몸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하면 양날의 칼이나 다름없는 법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남현기는 어떻게 해서든 초운을 잡고 싶었다.
남현기의 몸이 흐릿해지며 귀신처럼 다가오더니 초운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다.
처음으로 등이 아닌 전면을 보여 준 초운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눈엔 느려 터진 움직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옷자락조차 잡혀 줄 생각이 없었다.
오행매화보의 매행비(梅行飛)를 펼친 초운의 신형이 갈지자 형태로 이동하며 남현기의 신형을 간단히 피해 버렸다.
동시에 남현기가 쓰러졌다. 진기를 너무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운의 위험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매행비가 끝날 지점에 미리 와 있던 팽호가 그 빠른 손놀림으로 초운을 잡으려 했다.
방심하고 있던 초운은 하는 수 없이 팽호의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
팽호는 열다섯 소년이긴 하나 패도적인 힘으로 유명한 하북팽가의 자손이었다.
당연히 그의 덩치도 상당해서 육 척에 이르렀고, 몸뚱이 역시 근육질이었다.
반면에 열두 살인 초운은 오 척에도 겨우 이르는 단구였다.
물론 그 또래의 아이 중에선 그래도 큰 편에 속했지만 몸이 호리호리해서 근육질로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팽호가 쉽게 제압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인상을 잔뜩 쓰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건 팽호였지 초운이 아니었다.
‘이놈…… 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