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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4화 (14/217)

검향 14화

똑같은 오행매화보를 배웠고 똑같이 펼치는데도 그 수준이 엄청나게 달랐다.

심지어 초운은 공력도 거의 쓰지 않고 있었다.

세 명이 달려드는데도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만지려 하면 이미 바람을 타고 노니는 나비처럼 혹은 매화 잎처럼 닿을 듯 닿지 않게 스르륵 빠져나가 버린다.

이는 이십사수매화검의 매화접무(梅花蝶舞)와도 닮아 있다.

하지만 초운이 그 같은 점을 알고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행매화보는 그 경지에 따라 수준이 다르다.

보통의 수련도사들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엄청난 훈련을 사 년 동안 매일같이 소화해 내고 있는 초운의 경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미 육경이나 다른 두 소년들은 사단공에 이른 옥허공의 공력을 모두 동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초운을 잡지 못했다.

게다가 초운은 자기 공력을 일 할도 채 쓰지 않고 있었다.

초운은 어찌하여 사형들이 훤히 다 보이는 짓을 하는지 몰랐다.

그들이 펼치는 오행매화보는 너무 느리고 여기저기 틀린 부분이 많아 조잡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초운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분명 자신을 잡으려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위협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혹시 놀자는 건가요?”

초운은 자신을 잡으려다 놓친 육경의 품에 파고들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히이익?”

육경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전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초운이 코앞에 나타났다.

육경은 급히 물러섰지만 물러서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초운이 가로막았다.

“으…… 으아아아!! 너 대체 뭐야!”

육경의 비명이 더욱 커졌다. 놀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빠른 속도는 이대제자들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몰라! 나 안 해! 안 할 거야!”

육경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울먹이며 먼저 도망치자 다른 두 명도 당황한 얼굴로 함께 도망쳤다.

“놀자는 건 아니었군요…….”

도망치는 사형들을 바라보던 초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발끝으로 땅을 툭툭 파던 초운은 자신이 만들어 낸 그림자의 방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서평은 직접 보고서도 왠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입문 시기도 빠른 사형 셋을 손도 대지 않고 쫓아내기란 불가능했으니까.

자신도 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초운의 나이로 돌아가서 방금 전의 삼인방을 피해야 한다면?

불가능했다. 아니, 그 당시에도 상승의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격퇴는 가능하지만 저렇게 잡히지 않고 깔끔한 움직임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서평이 아는 강호의 상식과는 상당히 어긋나 있었다.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서평은 멀리 사라져 가는 초운의 등을 슬쩍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경공이 제법 빠른 듯한데…… 두고 보자.”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생기니 화가 났다. 비천한 놈이 운 좋게 무공을 배웠을 뿐이면서 너무 건방졌다.

신분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들에겐 호된 교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반드시 알려줄 생각이었다.

곽호는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딜 가든 저런 놈이 하나 둘씩은 있지.”

영교가 물었다.

“거슬리시면 솎아 낼까요?”

“됐어, 저런 놈이 화산에 있다면 우리에게는 좋아. 타락의 신호이니까 말이야.”

* * *

산동에 악씨 가문이 있다면 산서에는 서가장이 있다.

다만 산동악가는 무림의 신생 육대세가의 한 곳이었고 서가장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서가장이 악가와 같은 선상에서 언급되는 것은 서가장의 힘이 단순히 무력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 데에 있었다.

그들은 산서의 상권을 독점할 정도의 금력을 갖고 있었고 그 같은 힘은 산동악가나 다른 육대세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돈의 힘으로 무력을 사고 돈의 힘으로 사람을 산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 있을 미래에도, 돈의 힘은 세상을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가장의 일족인 서평의 힘이기도 했다.

속세의 욕망에 물들지 말아야 할 도문이건만, 그게 수련도사들에게까지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육경 등의 아이들이 초운을 잡지 못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때문에 서평의 생각과는 달리 이제는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으려 했다.

해서 서평이 사용한 것이 바로 금력.

바로 돈의 힘이었다.

수련도사들은 어릴 때부터 산중에서 생활하는 터라 금전 개념이 미약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그들의 부모였다.

서평은 서가장의 둘째 공자로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금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정보를 모았다.

어렵지는 않았다.

산에서 내려가지는 못하더라도 서신은 언제든지 주고받을 수 있었으니까.

단지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었다.

먼저 서가장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는 집안 출신의 제자들을 찾았다.

이후 자신을 귀여워하는 서가장의 총관과 어머니 쪽 상단의 행수들에게 압력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결과 서평에겐 말 잘 듣는 부하들이 아홉이나 생겼다.

그중엔 뜻밖의 인물도 있었다.

“후후후. 서가장을 나가고 소식이 없더니. 이런 곳에 있었던 거야? 그것도 이대제자로?”

“…….”

키가 크고 선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푸른 도포를 입고 있는 이 청년의 이름, 아니 도명은 황현이었다.

황현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서평은 수련도사의 신분으로 이대제자인 황현에게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사부는 다르다 할지라도 사문의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현이 지금 분노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부모님을 겁박하였다지?”

“하하하.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장 총관님이지. 나는 네가 이곳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장 총관은 서가장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일종의 집사 같은 자였다.

황현은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을 서가장에 고용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으드득.

이를 너무 갈았던지 어금니 쪽 볼 근육이 꿈틀거렸다.

장 총관이 직접 보내온 서신의 내용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내쫓겨 거지가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둘째 공자를 잘 모시라는 내용이었다.

황현이 비록 도문에 이름을 올린 도사라 하나, 속세와의 인연마저 끊은 것은 아니었다.

화산파라는 곳이 도문이면서도 그런 쪽으로는 상당히 관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끔이긴 하지만 육식을 행하는 것도 용납할 정도랄까.

그리고 수련도사들이나 아직 젊은 이대제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가족이나 친우들을 한꺼번에 초청할 수 있기도 했다.

‘죽일까?’

순간 황현의 머릿속에 도사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살의가 번뜩였다.

하지만 그 같은 살의는 문득 떠오르는 어떤 이의 얼굴 때문에 가라앉아야 했다.

은인인 그의 허락도 없이 진체(眞體)를 내보이는 것은 배신이나 마찬가지.

아니, 은인의 성품상 그리 생각지 않겠지만 황현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그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년에게 말했다.

“뭘 원하십니까, 공자님.”

황현의 태도가 급변하자 서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직은, 아직은…… 가만두겠다…….’

황현의 이런 살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평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정말 잘 생각했어. 정환…… 아니지 이제 황현이라 불러야 하나?”

“…….”

“아! 그래도 남들 앞에선 꼬박꼬박 사형이라고 불러 줄게. 안 그러면 나도 혼날 테니까.”

서평은 그의 체면을 세워 주는 척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손해를 볼까 봐 그런 것이다.

이는 황현 또한 잘 아는 사실이었다.

서평은 무려 이대제자인 황현을 부릴 수 있게 되어 일이 수월해질 거라 확신했다

“내가 조금 걸리는 녀석이 있어.”

‘역시…… 그런 건가?’

아이들 간의 치졸한 감정싸움에 동원되는 것이라 짐작한 황현은 실망한 낯빛을 애써 거두며 서평에게 물었다.

“누구…… 입니까.”

“응. 적운암에 산다는 초운이라는 놈.”

“……누구요?”

“초운. 너도 오가다 한 번쯤 봤을 걸? 그 꾀죄죄하고 더러운 차림새의 녀석.”

황현은 잠시 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 건들 사람이 없어서 적오자의 제자를…….

“모르시는 듯한데……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장로님들로부터 명이 내려왔었습니다.”

“장로들?”

“네.”

“아! 그래서 육경이 힘들어 했군.”

서평은 작은 오해를 했다.

당시 육경과 아이들은 아주 빠른 움직임으로 초운에게 덤벼들었었다.

누가 봐도 초운 같은 어린아이 하나 잡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그렇군. 잔머리 굴리는 걸 좋아한 육경이 사부가 무서워 일부러 놓아 준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왠지 근 두 달이 넘게 돈을 들여 정보를 모으고 사람을 구한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왕 뽑은 칼, 무라도 쑤셔야 한다는 개인적인 신념답게 황현을 잔뜩 써먹어주기로 결심했다.

문득 상당히 지독한 장난이 떠오르고 만 서평이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번 초청회 때, 재밌는 계획이 생각나 버렸는데…… 도와주겠지. 황현?”

七章

수련도사와 이대제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속세의 가족들과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어릴 때 가족과 떨어진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나 할까?

화산파에서는 가족들을 불러 모으는 행사를 초청회라고 불렀지만 아이들의 부모 형제가 모두 몰려오는 터라 일종에 축제같이 되어버렸다.

초청회 자체는 화산에서 열려도 축제는 청정한 도문인 화산이 아닌, 아랫마을에서 열렸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이 시기에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다.

화산파의 속가제자와 수련도사 그리고 이대제자의 가족들을 모두 합하면 약 육백여 명 정도 된다.

물론 매년 약간씩 그 숫자가 달라지긴 하지만 그 차이가 크지는 않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단 사흘의 만남을 위해 쓰고 가는 돈은 어마어마했다.

당연히 마을 곳곳에서 풍악이 울리고 각지에서 찾아온 상인들로 마을은 넘쳐 났다.

어두운 밤에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본래 칠흑같이 어둡다. 그러나 산 아래는 지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왠지 힘없는 얼굴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초운은 가끔씩 어깨를 들썩이며 코를 훌쩍이거나 소매로 눈을 비볐다.

그저 일 년에 한 번 있는 날일 뿐이지만 이 사흘 동안 초운은 늘 울적했다.

항상 우직하고 근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인지라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초운의 이런 행동은 적오자의 신경을 긁기에 충분했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신경 쓰는 일에 매우 서툴렀던 그는 초운이 저럴 때마다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겉으로는 티가 안 났지만 마음속으론 불안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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