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3화
서평은 하루하루가 지겨웠다.
늦은 나이에 수련도사가 된 터라 어릴 때 집에서 다 뗀 기초수련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저잣거리 파락호도 다 안다는 육합구궁검에, 한눈에 봐도 수준 낮아 보이는 오행매화보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숙소에서 왕처럼 지내지 않았다면 지루해서 죽었을지도 몰랐다.
서평이 숙소에서 왕처럼 지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서가장은 산서의 명문가로 삼십육로백뢰검(三十六路白雷劍)이라는 검공으로 유명했다.
특히 현 서가장주인 서운현은 절정경의 고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집안에서 오랫동안 상승의 무공을 배워 왔으니 보통의 수련도사들보다 강할 수밖에 없었다.
육합구궁검을 익힌 수련도사가 서평과 겨룬다는 것은 십사수매화검을 익힌 이대제자와 겨루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또 지루하디지루한 기초를 익히고 자기 숙소의 아이들과 함께 식당으로 온 서평은 낯익은 얼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서 뒹굴다 오는 건지 지저분한 행색에 머리카락은 너저분했다.
그런 주제에 저렇게 기쁜 얼굴로 밥을 먹는 꼬락서니라니…….
그러고 보니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때도 저렇게 더러운 꼴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괜히 주는 거 없이 미운 녀석이었다.
“저놈은 뭐야?”
힘에 눌려 서평을 따르게 된 아이들 중에 그래도 적응이 빠른 녀석이 있다.
육경이라는 녀석이었는데 꽤 정보통인지 설명이 자세했다.
“초운이라고 적운암에 사는 적오 사숙의 제자야.”
“녀석도 수련도사인가?”
“응, 하지만 우리들과는 달라.”
“뭐가?”
육경이 조금 부러운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 녀석은 개인적으로 수련을 받거든, 신분은 수련도사이지만 사실상 이대제자나 마찬가지야.”
서평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상당한 특혜인데…… 왜 저런 지저분한 녀석이 그런 특혜를 받는 거지?”
“우리 사부님 말로는 사 년 전에 청연 태사백조님이 직접 데려와 제자로 삼으려 하셨대.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서 일대제자인 적오 사숙님의 제자가 된 거지.”
“집이 잘 사나? 그렇지는 않아 보이는데…….”
“수련도사랑 이대제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가족들을 만나는 날이 있는데 저 녀석 가족이 오는 꼴은 본 적이 없어. 소문에 의하면 고아라고도 하던데…….”
서평은 불쾌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 같은 뛰어난 인재도 아닌 집도 절도 없는 고아에 너저분하기까지 한 녀석이 특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린 것이다.
안 그래도 서가장에서 나와 화산파에 온 것도 기분 나쁜데 저런 너저분한 녀석과 동일한 수련도사 신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자신을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선택받은 인간이라 자부하던 서평은 가슴속에 불길이 확 치솟는 것을 느꼈다.
“불공평하군.”
서평의 한마디에 육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뭐가 말이야?”
“아까 말했지. 녀석이 적오 사숙의 제자인 거.”
“응.”
“그 적오 사숙은 괴팍하고 수련이 무섭기로 소문난 분이시거든. 작년엔가 누가 우물가에서 저 녀석 등을 본 적이 있었는데 멍이랑 흉터로 가득했대.”
육경의 말을 듣던 주위 소년들 중 하나가 말했다.
“으, 난 적오 사숙 밑에선 하루도 못 견딜 거야.”
“넌 하루? 난 한 시진도 싫어.”
“난 반 시진!”
“난 일각!”
조금 소란스러워지자 서평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다시 육경에게 물었다.
“녀석의 몸에 정말로 흉터가 많아?”
“으, 응. 아마도…… 근데 왜?”
서평이 탁자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왜라니? 궁금하잖아. 그 흉터나 멍이 소문인지 아닌지.”
육경이 불안한 어조로 서평에게 물었다.
“뭐, 뭐 하려고 그래?”
“이왕 칼 뽑은 거 무는 잘라 봐야지. 너랑 너, 너.”
서평은 곁에 있던 아이들 중 몇몇을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육경이 걱정스런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부님이 그 애는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멀고 먼 매질보다 가까운 주먹이 더 무서운 법이라 육경은 아무런 제지도 할 수 없었다.
* * *
“이놈아, 잘생긴 얼굴을 대체 왜 그리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는 것이냐.”
“요즘 사부님이 어려운 걸 다시 시키셔서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초운이 우는 소릴 하자 곽호가 되물었다.
“뭘 하기에…….”
“완검(緩劍)이요.”
완검이라 함은 검초 하나를 아주 느리게 펼치는 수련법을 뜻했다.
보통 정확한 자세를 잡아주기 위해 시키는 수련인데, 문제는 초운이 양팔과 양다리를 모두 합쳐 삼백 근이 넘는 무쇠 고리를 찼다는 것이다.
“한 석 달 안 시키시다가 요즘에 갑자기 시키셔서……
그래서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요즘 제시간에 밥 먹으러 오는구나. 다른 때 같으면 다른 아이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리다 들어오는 녀석이.”
“헤헤헤.”
사실 이 년 반 전의 그 사건 이후로 초운을 괴롭히는 사형제들은 사라졌다.
장로들로부터 그 아래 제자들에게 엄명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청연자의 무서움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장로들 입장에선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도림평의 전대 장로들이 귀여워하고 장문인의 사손이기까지 한 아이를 건드렸다가는 청연자가 나타나 시원한 칼춤을 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운 또한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음을 체감하여 알고 있었지만 버릇이 되어버렸는지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산속에서 홀로 검을 수련할 때 기분이 좋았다.
식량만 해결된다면 영원히 검만 수련하며 살고 싶었다.
청연자의 말대로 평생 산에서 살 팔자인 도사 체질임이 분명했다.
밥을 다 먹은 초운이 손을 흔들며 날쌔게 사라졌다.
초운의 신형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쯤.
곽호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의 신형이 해질녁의 그림자처럼 쭉 늘어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가 보았다면 이형환위을 보았다며 감탄 하였을 것이나 다행히 이를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얼마 후.
곽호는 적운암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바로 초운이 머무는 수련처였다.
오행매화보를 수십 회씩 펼치고도 모자라 체력훈련을 한다.
끝나고나면 괴상한 향의 약탕에 몸을 담그고, 다시 나와 체력훈련을 하길 네 번을 더 반복.
그 후에는 검법 수련이었다.
육합구궁검, 구궁육합검이라고도 불리는 속가제자와 수련도사들 전용검법을 아주 천천히 정확한 자세로 펼친다.
그 무식한 체력훈련을 끝낸 뒤였는데도 초운은 제법 자세를 잘 잡았다.
이를 지켜보던 곽호의 얼굴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때 그런 그의 등 뒤로 한 여인의 그림자가 귀신처럼 떠올랐다.
오랜만에 주인을 찾은 그녀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았다.
그녀 입장에선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미소였다.
“뭐가 그리 좋으신 건가요……?”
“글쎄…….”
곽호는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는 중이었다.
붉은 색의 용이 수놓아진 장포…… 그 장포를 입고 있는 인자한 미소의 중년인…….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과거에서 벗어난 곽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영교.”
“네, 주인님.”
“저 아이에 대해 알고 싶군. 모조리.”
“알겠습니다. 헌데 누군가 오는 것 같군요.”
“알고 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서평은 본래 타인을 괴롭히는 성격이 아니다. 오만하고 고집이 세긴 하지만, 아버지를 많이 닮아 호탕한 구석이 있었다.
실제로 숙소를 장악할 때를 제외하곤 아이들을 심하게 다룬 적이 없었다.
그런 서평이 초운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지루하고 짜증나는 산중 생활 때문이었다.
열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들어와 배우는 것은 언제나 기초뿐.
그나마도 어린 시절 이미 배운 것들을 다시 하는 꼴이다.
산중 생활의 지루함과 이런 곳에 설명도 없이 강제로 보낸 부모에 대한 원망이 버무려져 가슴속에 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발견한 초운의 존재는 그 같은 화를 발산할 만한 일종의 활력소랄까?
그렇다고 서평이 직접 괴롭힐 마음은 없었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문의 어른들에게 찍힐 만큼 머리가 없진 않다.
그래서 자기 숙소의 아이들을 시키기로 한 것이다.
“야!”
육경이라는 이름의 소심해 뵈는 소년은 자기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이는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지저분해 보이는 이 소년은 적운암에 사는 수련도사로 이름은 초운이라 했다.
육경은 이각 전에 끝난 마음속의 저울질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사부님이나 사백, 사숙들이 엄명을 내렸다.
지금 자신을 순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초운이라는 녀석을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사부님의 회초리도 무섭지만, 사부님은 정식으로 이대제자가 되기 전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옥허공의 진도를 확인할 때, 아니면 단체수련을 하는 날 교관처럼 단상 앞에 나와 가르칠 때만 볼 수 있었다.
그나마 교관 역할도 일대제자들이 돌아가며 하는 것이라 자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숙소에서는 서평을 매일 봐야 한다.
첫날 기선을 잡는다고 덤볐다가 한 방에 기절했던 일이 떠오른 육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부보다는 서평의 주먹이 더 가깝다.
다시 한 번 저울질을 끝낸 육경은 함께 초운을 품(品)자 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명의 소년이 초운을 붙잡으려 했다.
그런데…….
“어?”
“어어?”
초운은 어느새 빠져나가 그들의 뒤, 이 장 밖에 서 있었다.
‘빠르다.’
약간 떨어진 곳에 숨어 지켜보던 서평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초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형들 무슨 일이세요?”
“시, 시끄러워…… 모두 뭐해? 어서 잡지 않고.”
육경이 소리쳤다.
그러자 멍하니 서 있던 두 명의 소년이 정신을 차렸는지 초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서평도 무서웠지만 나중에 떨어질 사부의 불호령도 무서웠기에 때리지는 않고 그저 잡아서 옷을 벗기려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목적은 초운의 몸에 새겨진 흉터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불필요한 폭력은 줄이는 게 좋다는 것이 육경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초운의 몸놀림은 보통을 넘어섰다.
특히 밥 먹으러 올 때는 무쇠 고리를 전부 빼놓고 오기 때문에 날쌔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