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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2화 (12/217)

검향 12화

초운에게 있어서 지난 열흘은 아주 즐거운 나날이었다.

사부에게 맞을 필요도 없었고, 밥 먹다 사형제들이 올까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도림평에서의 꿀 같은 휴가는 너무 행복했다.

청연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할아버지들과 마음껏 낚시하고 목마도 타고 놀았다.

도림평엔 맛있는 복숭아가 지천에 널려 있었는데 할아버지들이 틈만 나면 복숭아를 따 주어 질릴 만큼 먹었다.

특이하게도 복숭아를 먹으면 수련 중에 생긴 상처들이 하나 둘 씩 사라져갔다.

그리고 언젠가 만난 적 있던 청명자 할아버지는 가끔씩 목검을 쥐어주며 말했다.

“검에서 도(道)를 구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란다.”

“하지만 청연 할아버지는 구도검이라 하셨는걸요?”

“그리되면 검은 그저 도를 얻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단다…… 그러니 그보다는 먼저 검과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겠지.”

초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친구요?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렇지, 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게 친구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아, 친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렵지는 않다. 항상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어주면 되지.”

청명자의 말에 초운은 하얀 볼을 부풀리며 칭얼거렸다.

“너무 어려워요. 청명 할아버지.”

“허허허. 언젠가 자연스레 알게 될 날이 올 게다.”

‘그때가 되면 검과 매화가 다르지 않게 될 테지.’

시간은 유수와 같아서 어느덧 열흘이 지나 버렸다.

아니, 사실은 닷새가 더 흘러 보름째였다.

너무 재밌게 놀다 보니 초운도, 도림평의 다른 장로들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초운이 도림평을 나가던 날 장로들은 친손자를 떠나보내듯 아주 슬퍼했다.

“아쉽구나. 아쉬워. 또 언제 보게 될꼬.”

“나중에 또 올게요. 청인 할아버지.”

나이에 맞지 않게 눈시울을 붉히는 도사는 청인자라고 집법원주인 백선자의 사부였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너라. 이 할아비가 도와주마.”

“도림평 오는 길은 알지?”

서른 명의 노인들은 초운을 둘러싼 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작별 인사가 너무 길어지자 이들의 대사형인 청연자가 버럭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이놈들아! 날 새겠다!”

당연하지만 불만이 속출했다.

“쳇! 자기는 자주 나가서 본다 이거군.”

“불공평하다!!!”

청연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불공평하다? 마지막 놈 누구야?! 누가 반말하래!?”

청연자의 성질을 잘 알고 있는 고(古)장로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와 같은 작은 중얼거림이 청연자의 귀를 긁어 댔다.

버릇처럼 한숨을 내쉰 청연자가 초운을 등에 업었다.

초운이 장로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초운이 나중에 또 놀러 올게요!”

그렇게 초운은 다시 사문으로 돌아갔다.

* * *

적운암까지 초운을 업고 온 청연자는 적오에게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오는 여전히 딱딱하고 버릇없는 태도로 그의 경고를 흘려들었다.

하지만 왜인지 초운을 대하는 적오의 태도가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는 것 같았다.

청연자의 경고가 먹힌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백송 진인이 찾아온 것 같지도 않았다.

청연자가 떠난 직후 적오는 초운에게 오행매화보를 시켰다.

노는 동안 얼마나 퇴보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초운이 도림평에서 놀고만 온 것은 아니었다.

꼭 하루에 한 시진 이상은 육합구궁검과 오행매화보를 연습하였고 많은 고(古)장로들이…… 특히 전전대의 화산제일검이자 속세에서는 아직도 반선검왕(半仙劍王)이라 불리는 청명자가 직접 살펴 주었다.

물론 무인으로서의 재질은 모자라니 가르침들을 다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자세가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무릎이 너무 튀어 나온다.”

“아! 아, 네!”

초운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또 회초리에 맞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질은 없었다. 무쇠 고리도 차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지금은 그저 얼마나 퇴보했는지만 살피려 한 것이기 때문에 매를 들어 추궁과혈을 하지 않은 것이다.

적오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수백, 수천 번을 말했다. 그 자세에서 무릎이 나오면 행동이 둔해진다 하지 않았더냐. 너무 아둔하구나. 아둔해.”

“죄송합니다아. 사부님.”

초운이 힘없는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돌아오자마자 사부에게 실망을 안긴 것 같아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되었다. 당장 무쇠 고리를 차고 오행매화보를 해질 때까지 오십 번 시전하여라. 못하면 저녁은 굶는다.”

“네!”

사부의 평소 말투였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편했다.

초운은 곧바로 거처로 달려가 무쇠 고리를 찾았다.

초운은 양팔과 양 발목에 고리를 차고 나오더니 적오에게 다가와 말했다.

“공력을 경맥으로 돌려주세요.”

오 할의 공력을 경맥으로 돌려 경맥을 튼튼하게 만드는 수련법을 뜻했다.

여기에는 적오 특유의 매질이 필요했지만 이 수련법으로 인해 청연자의 분노를 사 장로들 앞에 불려 가고 말았다.

적오가 아무리 고집이 세다지만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당분간은 금제하지 않는다. 대신 무쇠 고리와 철심이 박힌 목검을 더 무거운 것으로 바꿔 놨으니 그리 알거라.”

어쩐지 좀 더 무겁다고 생각했었다.

초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언제나 오행매화보를 펼치던 자리로 가서 수련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적오는 곧 구석에 있는 거처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문 앞에 도착하여 잠시 멈칫하더니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얼마나 그랬을까? 결국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돌린 그가 초운을 향해 약간 큰 소리로 물었다.

“왜, 돌아왔느냐?”

초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사부를 쳐다보았다.

적오가 다시 물었다.

“도림평에서 왜 돌아왔느냔 말이다. 나를 한 번 떠났던 아이들 중에 돌아온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제야 그의 질문을 이해한 초운이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애초에 떠난 적이 없는걸요.”

“…….”

대답을 들은 적오는 조용히 몸을 돌려 다시 거처로 향했다.

그때 그 찰나의 순간, 사부가 몸을 돌리던 그 짧은 순간, 초운은 보았다.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보았다.

적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 담긴 진짜 미소였다.

六章

화산파의 심처에는 적운암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일대제자인 적오자의 거처이자 수련처였는데 괴팍하기로 소문난 그의 성격 탓에 이곳을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한 곳에 지금 한 소년이 열심히 목검을 놀리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소년은 양 팔목에 아주 두터운 무쇠 고리를 차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양 발목에도 역시 두꺼운 무쇠 고리를 달고 있었는데 그 굵기가 팔목에 달린 고리의 세 배는 되어 보였다.

소년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한 살에서 열두 살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무거워 보이는 무쇠 고리들을 매달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검을 휘두르고 보법을 밟았다.

한참 동안 연공에 매달리던 소년은 갑자기 하늘을 보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 외쳤다.

“이크! 밥! 밥! 밥!!”

소년은 후다닥 산길을 내달렸다. 아니, 내달리려 했다.

하지만 이내 팔목과 발목에 차여 있는 무쇠 고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부님이 밥 먹으러 갈 땐 풀라고 하셨지?”

소년은 그 즉시 거처로 들어가더니 무쇠 고리들을 풀어 두고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뛰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날쌘 비호와도 같아서 험한 산길이 마치 제 집처럼 보였다.

소년의 이름은 초운.

화산파의 수련도사이다.

한참을 뛰어 내려가던 초운은 우물가를 지나치다 말고 멈춰 섰다.

그러곤 자신의 지저분한 옷과 머리 등을 매만졌다.

“곽 아저씨가 밥 먹기 전에 씻고 오라고 했는데…….”

잠시 갈등하던 초운은 뱃속에서 들리는 천둥소리에 다시 달렸다.

밥 먹고 나서 씻으면 된다고 자기 자신과 타협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바로 코앞이 식당이었다.

“곽 아저씨! 아저씨이이이!”

곽호는 야채를 썰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미소 지었다.

“왔느냐.”

“헤헤! 밥 주세요! 밥!”

곽호가 웃는 낯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요즘 들어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냐?”

“모르겠어요. 그냥 배가 고파요.”

“하긴 열두 살이면 돌도 씹어 먹을 나이지.”

“네? 돌이요? 돌은 못 먹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다, 말이. 하여간 앉아라. 오늘은 재료가 많으니 푸짐하게 주마.”

“와아아! 맛있겠다아!”

초운이 양손을 번쩍 들며 기뻐했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는 소년이 있었다.

초운보다 한 서너 살 정도 더 들어 보이는 소년이었는데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 잘생긴 얼굴을 찡그린 채 투덜거렸다.

“화산에선 저런 종놈과도 함께 밥을 먹는가 보군.”

그러자 소년의 옆에서 함께 식사하던 청년이 말했다.

“그러지 말거라. 사람 차별하는 거 아니다.”

“엽성 형님. 그래도…… 저런 거지같은 놈이…….”

“그만하래도. 서평.”

엽성이라는 청년에게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소년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청년은 그의 친형인 서일의 친우로 친형 다음으로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무공도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아주 고강해서 앞으로 무림을 이끌 일곱 명의 후기지수라는 칠룡오봉에 이름이 올라 있을 정도였다.

엽성이 친우의 동생인 서평과 함께 화산을 오른 이유는 서가장의 요청을 받고 서평을 수련도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금 늦은 나이이긴 했으나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라서 어려울 것이 없었기에 일단은 장문인에게 구두로 허락받고 화산 곳곳을 견학 중이었다.

본래는 친형이자 엽성과 같은 칠룡오봉인 서일이 왔어야 했지만 그는 엽성이 얽혀 있는 개인적인 은원을 해결해 주느라 올 수 없었고, 대신 엽성이 몸도 피할 겸 함께 온 것이다.

“나는 당분간 접객원에서 머물 것이고, 너는 수련도사가 되어 다른 아이들과 숙소에서 함께 지낼 것이다. 이곳은 서가장이 아니니 부디 예의를 지키도록 해라.”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저도…….”

뚱한 얼굴로 대답하는 서평은 사실 화산파에 오고 싶지 않았다.

서가장의 무공만으로 훌륭한 고수가 된 아버지도 있고, 형도 있다. 그런데 어찌 자신만 홀로 떨어져 다른 무공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한 채 반 강제로 화산에 오게 되었던 터라 가슴 속에는 불만이 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불만과는 별개로 서평이 수련도사들로 가득한 숙소를 장악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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