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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1화 (11/217)

검향 11화

“할아버지…….”

“응? 초운아, 왜 그러느냐?”

방금 전만 해도 눈에서 귀신같은 청광을 뿌리며 무서운 기세를 뿜어내던 사람이 한순간에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화 많이 났어요? 화내시면 안 돼요…….”

“언제 화를 냈다고 그러느냐. 이 할아비는 전혀 화나지 않았어요.”

그리 말한 청연자는 초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주었다.

‘거짓말!!’

‘화냈으면서!’

장로들의 얼굴이 경악을 넘어 짜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 같은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이는 없었다.

초운을 품에 안고 장로들을 바라보는 청연자의 얼굴이 그야말로 악귀야차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초운은 안겨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청연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청연자는 백송 진인을 향해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초운이는 도림평에 갈 것이다. 이곳에 있어서 이 아이에게 이득이 될 것이 무엇이냐. 기껏해야 사백, 사숙들에겐 재능이 없다 천대받고, 사형제들에겐 이유 없이 괴롭힘 당하고, 사부에겐 학대를 당한다. 그러니 도림평 장로들의 공동전인으로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잘 키워 잃어버린 화산의 도맥을 이을 제자로 만들겠다.”

백송 진인은 사백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그리고 상석에서 내려와 청연자를 향해…… 아니, 정확히는 그 품에 안겨 있는 초운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청연자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초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초운아, 우선 사과하고 싶구나.”

“…….”

“적오 저 아이는 어려서부터 사람 대하는 것을 어려워했지…… 자길 귀여워하는 사형들도, 따르는 사제들도 밀어내기 바빴느니라. 다 커서도 오직 사부인 내게만 마음을 열었지, 어느 누구 하나 다가오지 못하게 하였다.”

백송은 분명 초운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청연자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 너를 그 애의 제자로 보냈을 땐, 아주 나쁜 의도였단다. 그 아이의 남을 밀어내는 성정을 이용해, 널 쫓아내려 한 것이지.”

“흐흠!”

청연자의 불쾌한 헛기침이 대답처럼 흘러나왔으나 백송 진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놀랐다. 저 마음을 열지 않던 아이가…… 제자를 들이는 족족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하던 아이가…… 너를 계속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운의 상식을 뛰어넘는 근성에 대해 모르는 백송 진인은 당연히 적오가 마음을 열어서 데리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데 저 아이가 널 이리 만들었다니…… 휴…… 이 사조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구나. 이 사조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초운은 뭘 생각하는지 백송 진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백송 진인은 그 나름대로 초운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여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로들 또한 왜인지 몰라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초운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초운이 청연자의 귀에다 귓속말로 뭐라고 하자 청연자는 초운을 품에서 내려 주었다.

초운은 백송 진인의 앞으로 다가와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백송 진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사조님.”

백송 진인은 왠지 가슴 한편이 울컥했다.

“용서해 주는 것이더냐……? 적오를? 그리고 나를?”

초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용서라는 건 제가 힘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를 미워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힘들어 한 적도, 미워한 적도 없어요.”

“…….”

백송 진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문득 언젠가 청연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초운이는 훌륭한 도사가 될 게야. 무공의 재질은 타고나는 것이나, 도사는 재질이 아닌 그릇을 보고 가는 법이다.’

그때야 그저 흘려들었다.

힘이 전부인 세상에서 어찌 도(道) 타령이나 하겠냐며…… 옳은 말인 줄 알면서도 흘려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청연자가 본 것이 바로 이 한없이 맑은 순수함이었음을. 어떠한 집착도, 미움도 없는 맑고 맑은 현기.

말 그대로 도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지 않은가.

항상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것이 이제는 선명했다.

어느 순간 마음속의 무거운 덩어리가 하나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에 백송 진인은 눈을 감았다.

청연자가 놀란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주변의 장로들을 돌아보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가 댔다.

조용하라는 뜻이었다.

눈치가 좀 있는 장로들은 입으로 손을 가져갔고 행동이 빠른 장로들은 회의장의 문 앞을 막아섰다.

누군가 문으로 들어와 장문인의 각성을 방해할까 봐 그런 것이다.

반각이 조금 부족한 시간…… 장문인은 눈을 떴다.

보통 강호의 무인들이 벽을 넘었을 때 겪는 각성은 천차만별 다르지만 길면 열흘 짧아도 사흘 이상은 명상에 든다.

그러나 백송 진인은 겨우 반각…… 찰나라면 찰나라 할 수 있는 시간임에도 청연자와 비슷한 절정경의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도사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뜬 그의 눈빛은 현기로 가득했다.

특이하게도 초운의 눈빛과 아주 비슷했다.

그가 청연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이 사백님께서 보시는 세상이군요.”

청연자가 조금은 풀린 얼굴로 말했다. 그 역시 사질의 각성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인의 절정경과 무인의 절정경은 다른 법이지. 좀 전까지의 너는 도사의 껍데기를 쓴 무사였으나 이젠 진짜 도사가 되었다…… 정진하여 득도할 수 있도록 하여라.”

청연자는 비록 사질이었으나 존경의 의미를 담아 포권하였다.

백송 진인 역시 마주 보고 읍하더니 초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도맥을 이을 아이로군요.”

“무인으로서는 이르나 도사로서의 마음은 너나 나와 다르지 않다.”

둘의 대화를 듣던 한 장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날 때부터 도사가 있다더니…….”

백송 진인은 다시 초운을 향해 말했다.

“초운아, 여기 이 청연자 할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으냐?”

초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장로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이에 청연자가 이마에 핏줄을 돋으며 언성을 높였다.

“이놈들아. 언젠 안 된다고 난리더니 뭐 하는 짓거리들이냐.”

장로들이 동요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도림평의 장로들은 전대의 화산 장로들로 개개인이 절정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고수들이었다.

도림평에 간다는 것은 그런 이들의 공동전인이 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어리다 하나 그런 기회를 뻥 차 버리니 놀랄 수밖에.

장로들에게 호통치던 청연자는 내심 서운했다.

초운이 따라가겠다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가 다시 초운에게 물었다.

“도림평에 가면 좋은 할아버지들이 많다. 함께 낚시도 하며 무공도 배우고 재밌는 일들이 아주 많을 게야.”

“그래도 안 돼요.”

“대체 왜냐?”

초운은 잠시 고개를 돌려 적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에겐 장문인의 각성이나 제자를 빼앗아 가려는 청연자의 고집도 남의 일인 듯했다.

초운이 다시 청연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제가 그곳에 따라가면 사부님이 혼자가 되니까요.”

정면을 향해 있던 적오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백송 진인은 눈을 감으며 원시천존을 읊조렸다

청연자는 마음속을 떠돌던 서운함이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인자한 미소로 물었다.

“사부가 그리도 좋으냐?”

“네!”

초운이 크게 외쳤다.

그러자 적오의 부릅뜬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했다.

청연이 다시 물었다.

“그리도 심하게 매를 맞는데도?”

“네!”

또 한 번의 우렁찬 대답에 적오의 몸이 작게 떨렸다.

백송 진인은 그러한 제자의 반응을 살피며 살며시 웃었다.

청연자가 멋쩍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구나. 네가 그리 원한다면…….”

그가 포기하는 듯하자 초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적오를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청연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뭔데요. 할아버지?”

청연자는 곁눈질로 적오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이 할아비랑 도림평에서 한 열흘만 놀다 오자.”

그의 말에 적오가 곁눈질로 청연자를 흘겨보았다.

“니놈 제자 안 뺏어 가니 흘겨보지 마라, 이놈아.”

“…….”

적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집스럽게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청연자가 피식 웃으며 초운을 향해 말했다.

“도림평의 늙은이들에게 네 자랑을 실컷 해 놨는데 얼굴도 안 보여 주면 할아버지가 욕을 먹을 게 아니냐.”

“아, 그렇군요. 그치만 사부님이…….”

초운이 고개를 돌려 다시 적오를 바라보았다.

적오는 곁눈질로 몰래 청연자와 초운을 바라보다가 초운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등을 돌렸다.

초운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저기 사부님…….”

“……뭐.”

“저기 청연자 할아버지가…….”

“뭘 나에게 물어보느냐. 가고 싶으면 가 버려라. 흥! 귀찮았는데, 잘되었군.”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만 버릇처럼 까칠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초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청연자와 백송 진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녀석도 참 솔직하지 못하구나.’

백송 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청연자는 어찌 되었든 허락을 받았다 생각하고 초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회의장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때였다. 울상인 채 끌려가며 스승을 바라보던 초운을 향해 적오가 말했다.

“아직 못 끝낸 수련이 많다.”

까칠한 한마디였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이 분명했다.

초운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네에!

청연자와 초운이 사라지자 백송 진인이 박수를 두 번 치며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자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 사형제들은 이만 제자리로 돌아가십시다.”

“저기…… 적오의 처벌은 어찌합니까. 장문 사형.”

누군가가 묻자 백송 진인이 눈알을 굴리며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뭔가 떠올랐는지 손바닥에 주먹을 내리치며 말했다.

“아까 분명 청연 사백께서 벌을 내리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야 하지만…….”

“그러면 된 걸세. 좀 전에도 말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네, 뭐…… 그럼 된 겁니다만…….”

장로는 왠지 장문인이 변한 것 같았다. 어딘지 여유로워 보인다고 할까? 항상 화산의 모든 짐을 어깨 위에 올려놓은 듯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편해 보였다.

각성하여 절정경의 끝자락을 보고 도사가 되었네, 어쩌네 하더니 맞는 듯했다.

“사형.”

장로 중 한 명이 집법원주인 백선 진인을 향해 귓속말을 걸었다.

“이렇게 될 거…… 청연 사백과 장문인께선 대체 우릴 왜 부르신 겁니까.”

“낸들 아냐……?”

“…….”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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