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향-10화 (10/217)

검향 10화

“적 자배 일대제자 적오. 그대는 할 말이 있는가?”

누군가 적오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적오는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네, 이놈! 아직도 네 죄를 알지 못하느냐?”

회의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집법원의 백선 진인이었다.

그는 도사답지 않게 아주 호탕한 인물로 집법원주를 맡기에는 다소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그런 인물을 집법원주로 삼은 장문인 백송 진인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지금의 그는 제법 집법원주 역할을 잘 처리하고 있는 편이다.

장문인과 청연자를 통해 전후 사정을 미리 알게된 백선 진인은 오늘 이 자리에서 적오를 추궁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백선 진인의 추궁이 계속되자 적오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났고,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오후 무렵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제자는 보이지 않았으며, 갑자기 사형들에 의해 회의실로 오게 되었을 뿐입니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지극히 차분한 어조에 그를 지켜보던 장로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대다수의 장로들은 아직도 적오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아는 이들은 장문인인 백송 진인과 집법원주 백선 진인, 그리고 청연자뿐이었다.

그의 말에 백선 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죄를 지은 자는 자기 죄를 모르는 경우도 있지. 그럼 내 직접 너에게 보여 주마.”

말을 마친 백선 진인은 청연자의 앞까지 다가가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했고, 청연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했다.

그러자 백선 진인이 초운의 앞에 서서 말했다.

“아까 이 사숙조와 했던 얘기가 기억날 거라 믿는다.”

“……네.”

적오가 오기 전 백선 진인은 따로 초운의 상처를 보았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주로 초운이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초운은 여과 없이 말해 주었지만 그것이 잘못된 수련이라 생각하고 말해 준 것이 아니라, 그저 물어보기에 대답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백선 진인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나. 부디 다른 장로님들 앞에서도 똑같이 얘기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백선 진인은 초운의 상의를 벗겨 냈다.

그러자 어린 소년의 몸이 장로들의 눈에 들어왔다.

장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운의 온몸에는 피멍이 가득했다. 상반신뿐이었지만 아마 다른 곳도 비슷한 수준일 것임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피멍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멍이 들었던 부위들이 몇 차례 터지고 아물기를 반복하여 흉터가 되어 있기도 했다.

장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허…… 어찌 화산에서 이런 일이.”

“대화산파의 제자가 사파 놈들이나 할 짓을…….”

초운도 귀가 있으니 지금 장로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미안한 마음에 사부의 얼굴을 돌아보았지만 사부인 적오는 초운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저 상석의 백송 진인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로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결국 누군가 한마디 했다. 집법원의 부원주인 백기자였다.

그는 규율을 어긴 제자가 정말로 규율을 어겼는지 사실 여부와 증거를 확인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네 제자를 이리 만든 이유가 무엇이냐.”

“…….”

“설마 무공수련 때문이라 답할 생각은 아니겠지?

적오는 여전히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조금 답답해진 백기자가 언성을 살짝 높였다.

“이대로 가면 너에게 상당히 불리하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러자 적오가 처음으로 백기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허허…….”

“저런…… 저. 저. 쯧쯧.”

장로들이 여기저기서 혀를 차 댔다.

이럴 때일수록 변명이라도 해야 할 텐데 적오는 자물쇠라도 채운 듯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백송 진인만은 알고 있었다.

그의 제자의 눈이 자신에게 묻고자 하는 것을.

‘정말…… 정말 저를 못 믿으십니까?’

분명 그리 묻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사부인 백송 진인만은 알 수 있었다.

적오는 옆에서 누가 뭐라 하던 상관없었다.

그저…… 그저 사부인 백송 진인의 의중이 중요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더라도 백송 진인만 믿어 준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송 진인은 이렇다 할 대답을 주지 않았다.

확고한 믿음이 서린 눈빛 하나면 되는데, 그는 무심함으로 일관했다.

자신의 제자가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굶어 죽은 아비의 시신 곁에서 울고 있는 네 살짜리를 자신이 데려왔다.

본인은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재질 때문에 선택되어 화산에 온 것으로 알고 있을 테지만…….

결코 재질 때문에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살고자 자신의 도포자락을 쥔 작은 손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적오에게 숨겨진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건 직접 만든 장난감 목검을 쥐어주었을 때였다.

그는 재질을 넘어선 재능이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재질이 떨어지는 초운을 쉽게 내치지 못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초운에게서 어린 시절의 적오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아이를 적오에게 붙여 준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왠지 우스웠던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적오를 잠시 혼란스럽게 했다.

사부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오는 더욱더 마음의 빗장을 잠갔다.

서른 명이나 되는 장로들의 빗발치는 추궁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그는 여전히 백송 진인만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이는 오직 사부뿐이었고, 그 외에는 없었다.

의술이나 약학에 관심을 보이면 묻기도 전에 배울 수 있게 해 주었고, 검이 아닌 다른 무기에 관심을 보여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사부는 다 해 주었다.

자신은 화산의 문하가 아니라 사부인 백송 진인의 문하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태도 때문에 건방지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처음의 기억은 사부의 푸르른 도포였다. 그 도포자락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도포자락을 쥐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부터 자신의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때문에 사부가 믿어주면 되었다.

믿어주면 그 믿음에 기뻐하며 벌을 받을 것이고 믿어주지 않는다면 절망하며 벌을 받을 것이다. 해서 그는 백송 진인의 눈을…… 그리고 입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였다.

“벌은 되었다. 스스로가 죄 없다 부정하고, 제자인 초운이도 크게 개의치 않으니…… 벌은 되었다.”

청연자였다.

그는 적오를 추궁하는 대신 주변의 장로들을 쭉 한 번 돌아보더니 백송 진인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대신 이 아이를 도림평으로 데려가겠다.”

쿠쿵!!

청연자의 선언에 회의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백송 진인만을 바라보던 적오까지 놀라 청연자를 쳐다보았다.

“사…… 사백님.”

경악한 백송 진인이 더듬거리며 그를 부르자 청연자가 다시 말했다.

“이대로 이 아이를 적오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내 말이 틀렸느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내가 데려온 아이 내가 거두겠다. 나와…… 도림평의 고(古)장로들이 직접 기르며 가르칠 것이니라.”

여기저기서 장로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사백님, 말도 안 됩니다. 어찌하여 화산의 배분을 뒤흔드는 겁니까!”

“저 아이에게 육십이 넘은 우리가 사제라 부르는 건…….”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청연자가 얼굴에 노기를 띠며 소리쳤다.

“시끄럽다!”

“헉.”

“허헙!!”

팔순이 다 된 청연자의 한마디에 서른명이나 되는 장로들이 모조리 입을 다물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적오조차 청연자의 박력에 위압되어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과거…… 그러니까 지금의 적 자배 일대제자들이 이대제자이던 시절에 청연자의 별명은 허허할아버지였다.

뭘 해도 허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정말 인자한 사백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오는 이러한 청연자의 모습이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 자배의 장로들은 달랐다.

그들은 청연자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었다.

수십 년 전의 마인사냥 때 마공을 익힌 마인들에게 귀선검자(鬼仙劍子)라 불리며 피의 길을 걸었던 공포의 대명사…… 당연하지만 사문 내에서도 무서운 사백으로 악명이 높았다.

‘자…… 잠시 잊고 있었다.’

‘한 이십 년 유(柔)하게 지내셔서 사백님의 성정을 까먹고 있었군.’

침묵에 휩싸인 회의장 여기저기에선 간혹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적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사부를 돌아보았지만 사부의 표정 역시 다른 장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연자가 무서운 기세를 쭉쭉 뿜어내자 적오는 팔뚝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절정경의 끝에 도달하여 절대경의 영역을 넘보는 고수인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청 자배의 고(古)장로들의 대부분이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성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죽했으면 저 목청 큰 장로들이 모조리 벙어리가 되어버렸을까.

적오가 계속 놀라고 있을 때 청연자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이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해도 참았다. 이제 너희들 세상이라 생각하였으니까. 나의 사부님도, 그 전의 사조님들도 모두 그리하셨으니까…….”

청연자는 장로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도(道)를 멀리하고 검(劍)에 집착하여도 참았다. 이 역시 언젠가 순리대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도문의 검(劍)은 구도검(求道劍). 도를 모르는 자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언젠가 깨달을 거라 여겼다.”

청연자의 눈에 시퍼런 청광이 피어올랐다.

이는 화산 동공(動功)의 비의인 현단선공(現端仙功)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이십사수매화검의 팔성에 이르러야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청연자의 언성이 다시 높아졌다.

“그런데…… 너희들이 감히 내 앞에서 전통을 입에 올리느냐? 화산검의 빈껍데기만을 추구하는 너희가 감히 전통을 입에 올려?”

우르르르…….

청연자의 기세에 회의장의 대들보가 흔들리며 먼지가 떨어졌다.

“사백님, 진정하십시오!”

“시끄럽다 하지 않았느냐!”

그가 더욱 기세를 피어올리자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청연자의 화를 내리누른 사람은 뜻밖에도 이제 아홉 살이 조금 넘은 소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