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9화
물론 적오의 경우는 다르다.
적오는 사감이 없이 오직 무공을 가르치기 위해 때리는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역병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때문에 그러했다.
초운 역시 그것을 알고는 있으나 자꾸 옛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육합구궁검과 오행매화보를 끝맺었다.
하지만 초운의 전신에는 뱀처럼 가느다란 피멍으로 가득했다.
이에 적오는 회초리로 쓰던 매화 가지를 땅에 던지며 말했다.
“난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좀 더 수련하도록 해라.”
초운은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적오가 사라지자 초운은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았다.
회초리 자국 때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왠지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흘렀다.
사부와 함께한 일 년 반의 시간…….
그 기간 동안 눈물을 흘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사부의 그 무감정한 눈을 본 후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분명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응석도 부리고 큰 소리로 울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소리 내어 우는 법을 잊고 말았다.
애써 눈물을 그친 초운은 곧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육합구궁검을 펼치고 오행매화보를 밟기 시작했다.
시간은 늘 아깝다.
눈물을 흘리는 시간까지도…….
늦은 밤.
피곤에 찌든 소년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아직은 가냘프다 할 수 있는 어린 소년의 몸은 날마다 새로 새겨진 상처로 가득했다.
때문에 소년이 제대로 잠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갑자기 방문이 슬며시 열렸다.
그리고 한 사내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로 소년의 무뚝뚝한 스승인 적오자였다.
그는 울다 지쳐 잠든 초운의 얼굴을 씁쓸히 바라보다 곧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은 색 통이었는데 그 안에는 외상에 좋은 약이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의 마개를 뜯더니 초운의 새로 생긴 상처에 부었다.
“아야…….”
쓰라렸는지 초운이 잠결에 살짝 비명을 질렀다.
적오는 제자가 혹시나 깰까봐 조심하면서도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근육통이라도 남아 있으면 내일 힘들어 할까봐 미리 풀어주는 것이었다.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엎드려 있는 초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어이쿠, 우리 초운이 수련 중이었나 보구나.”
청연자가 갑자기 나타나자 초운은 팔꿈치까지 걷었던 소매를 서둘러 내렸다.
소매를 내리던 초운의 얼굴에는 뭔가를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놓칠 청연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청연자는 모르는 척 웃으며 다가와 초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땀으로 범벅이로구나.”
“헤헤헤.”
쑥스러운 듯 웃는 초운의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다른 수련도사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무공을 열심히 배우면서도 깔끔하다.
이렇게 지저분하지는 않은 것이다.
괜히 마음이 아린 청연자가 초운에게 물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물가에 가서 좀 씻어야겠다.”
“이따가 씻을게요.”
“어허……!”
청연자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근엄한 목소리를 내며 나무라자, 초운이 어린아이답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청연자는 초운이 방심한 틈을 타 강제로 등에 업고 경공을 펼쳤다.
초운은 사물이 휙휙 지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과거에도 청연자의 등에 업혀 경공을 펼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빨랐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행매화보를 경공의 형태로 바꾸어 펼친 것으로 청연자와 같은 절정고수쯤 되면 한 번에 일이십 장을 건너뛰듯 달리는 것이 가능했다.
때문에 초운의 발걸음으로 반 시진은 족히 걸리는 우물가까지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청연자는 초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초운아…….”
우물가에까지 왔고 청연자의 심상치 않은 목소리를 들으니 초운도 뭔가를 느꼈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내 너를 나무라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옷에도, 몸에도 땟국물이 꼈으니 씻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 도사라 함은 청결해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말코 소리나 듣게 되거든.”
“……정말 그것뿐인가요?”
청연자는 도사 신분이지만 때론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함을 알았다.
“그럼…… 그렇고말고.”
“네, 그럼 알았어요. 근데 청연 할아버지.”
“응? 말해 보거라.”
“초운이는 무공수련이 좋아요.”
“헌데?”
“웅…… 그냥 그렇다구요.”
그리 대답한 초운은 자신의 몸에 걸친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 놓기 시작했다.
먼저 양 팔목에 찬 무쇠 고리를 빼냈다.
턱!
무쇠 고리가 땅에 떨어지며 내는 묵직한 소리였다.
청연자의 눈썹이 들썩였다.
소리도 소리였지만 무쇠 고리가 사라진 팔목의 살갗이 파랗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쇠 고리는 꽤 넉넉했다. 분명 팔을 자유롭게 빼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검을 수련하면서 일어나는 잦은 마찰 때문에 살갗이 문드러져 있었다.
적오가 자주 약초를 발라 주어서 상태는 괜찮았지만 청연자가 그것을 알 리 만무했다.
발목 역시 팔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연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눌렀다.
하지만 초운이 도포의 상의를 벗었을 땐 참기가 힘들었다.
상체 가득히 가느다란 피멍으로 가득했다. 피멍이 얼마나 많은지 다치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마치 어린아이의 몸에 수십, 수백 가닥의 금을 그어 놓은 것 같다고 할까?
촤아아!
초운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우물물을 퍼 올리더니 자기 머리 위로 부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청연은 초운을 대충 씻기더니 서둘러 옷을 입힌 후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했다.
“할아버지, 우리 어디 가요?”
청연자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기분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가 보면 아느니라.”
“……네.”
초운은 우직하긴 하나 눈치 또한 빠른 아이다.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이 문제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초운은 그 문제를 설명하려 했다.
“저기 할아버지. 여기 이거는요…….”
“그만! 그만! 그만하거라. 초운아…….”
청연자는 초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시켰다.
지금 그의 마음속은 적오에 대한 분노보다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려고…… 이 꼴을 보려 데려온 것이 아니었건만…….’
청연자는 처음으로 후회하는 중이었다.
초운을 화산으로 데려온 것을…….
그리고 데려와서 자신의 제자로 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 장문인에게 우겼다면…….
존장의 권위를 내세워 끝까지 우겼다면 초운이는 자신의 제자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하다못해 자주 찾아와 수련하는 모습이라도 지켜봤다면 이런 꼴로 지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제인 청명자의 말에 혹하여 내버려 둔 것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초운은 초운 나름대로 당황스러워 하는 중이었다.
할아버지가 슬퍼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저 좋아하는 무공을 익혔을 뿐인데 다른 이를 슬프게 해 버렸다.
초운은 청연자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직 어렸으나 청연의 슬픔에 깊은 책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연자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장문인이 기거하는 자하각이었다.
초운은 처음 화산에 도착하였을 때 외에는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문득 청연자를 올려다본 초운은 점점 더 불안해져만 갔다.
쾅쾅쾅!
자하각 내에 있는 집무실 문을 거칠게 두드린 청연자는 장문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이윽고 안쪽에서 장문인인 백송 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지요.”
미리 기별이 있었는지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청연자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백송 진인이 일어서서 맞으며 자리를 권했다.
청연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긴 말 않으마. 장로회의를 열고 백 자배 장로 놈들을 모조리 모아라.”
“사백……?”
백송 진인이 놀란 얼굴로 청연자를 불렀다.
그가 장문인에 오른 이후로 청연자는 늘 반존대를 해 왔다.
친히 젖동냥을 나가 키운 아들과도 같은 존재이건만 그는 장문인 대우를 해 주었다.
이는 비단 장문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 자배의 다른 장로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지금의 청연자에게선 그러한 배려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 하던 백송 진인을 향해 청연자가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마 백송아…….”
“…….”
“적오 그 아이가 어떤 식으로 제자를 대하는지 알고 있었느냐?”
“……음.”
백송 진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직접 확인은 못했고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연자가 조용히 재촉했다.
“알고 있었느냐?”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래? 무슨 소문이더냐……?”
“…….”
백송 진인은 답하지 못했다.
소문이라 해 봐야 ‘조금 힘든 수련을 시켜서 제자들이 두 달도 버티지 못한다.’ 정도였지만 지금 사백의 반응을 봐서는 문제가 보통이 아닌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청연자가 다시 말했다.
그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자신을 올려 보던 초운을 살짝 잡아끌어 장문인 앞에 데려다 놓더니 상의를 벗겼다.
“사백, 이게…… 무슨……?”
백송 진인은 갑작스런 사백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려 했지만 초운의 몸 상태를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법 단련되어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가녀린 아이의 몸이다.
헌데 그 몸에는 지금 무수히 많은 학대의 증거가 새겨져 있었다.
“사백의 말씀대로…… 장로회의를 소집해야겠습니다.”
초운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백송 진인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五章
장로회의는 주로 매달 한 번씩만 열린다. 장로들은 화산의 주요 보직에 앉아 있는 실세들로 약 삼십여 명에 달한다.
간혹 사문의 큰일이 터지거나 하면 임시로 회의가 소집되기도 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장로들은 장문인을 중심으로 양편으로 나뉘어 쭉 서 있었으며, 그들 사이의 중간에는 지금 두 명의 도사와 한 아이가 있었다.
이들은 청연자와 적오 그리고 초운으로 이번 회의는 청연자의 요청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