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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3화 (3/217)

검향 3화

청연이 웃는 낯으로 초운을 달래자 적오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해치지 않아는 뭡니까. 해치지 않아는.”

초운은 미리 배운 바가 있었는지 적오의 앞에 서더니 청연의 눈치를 살피며 서서히 구배지례를 올렸다. 청연은 기특한 듯 초운을 바라보았다.

본래는 이런저런 예법에 맞춰야 하지만 초운의 경우는 특별했기 때문에 이렇듯 초라하게 예를 올리는 것이었다.

적오는 다소 차가운 얼굴로 그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구배지례가 계속되면서 그의 얼굴은 점점 더 구겨져만 갔다.

아이의 근골을 눈대중으로 살폈건만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하품(下品)중에서도 극하품이랄까?

괜찮은 곳이라곤 오직 눈빛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몸이 너무 허약하여 크게 돋보이지도 않았다.

적오는 고개를 돌려 청연에게 물었다.

“사백조께선 대체 이 아이의 무엇을 보고 제자로 들이려 하신 겁니까.”

“그러게 말했잖느냐. 꽤 괜찮은 도기라 데려왔다고.”

“그게 정말이었습니까?”

“그렇지.”

“요즘 세상에 도사가 무슨…….”

말을 하던 적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청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적오는 화산파가 무(武)에 집착하게 된 후에 들어왔다. 그 시기에는 도경을 공부하는 것보다 검결을 이해하는 게 더 중요했고 사부나 사형제들도 그런 것을 당연시 하고 묵인해 주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백조는 아니다. 도사들이 검로에서 도(道)를 찾았다는 시절의 사람인 것이다.

그야말로 마지막 정통이라 할 수 있는 부류였다.

청연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말이 너무 험하구나. 화산의 검(劍)이 향(香)을 잃고 무(武)가 정기를 잃은 것은 도(道)를 멀리했기 때문임을 왜 모르느냐.”

적오는 왠지 욱하는 심정이 들어 대들었다.

“그 잘난 도(道)를 좇다 타 문파에 밀려 도태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화산의 수백 년 역사 동안 다른 곳에 밀렸던 적이 한 번도 없었겠느냐. 정도를 잃지 않고 내려온 바대로 꾸준히 행한다면 언제나처럼 다시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오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반항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이 꼴인가. 일검쟁패조차 재패하지 못하면서…… 강하지 못하면, 지키지 못하면 도(道)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 이리 오거라.”

적오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초운을 향해서였다. 초운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적오의 앞으로 다가왔다.

적오는 시선을 다시 사백조인 청연을 향해 맞추며 초운에게 말했다.

“이 사부의 수련은 혹독하니 버티지 못하겠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그럼 무공은 관두고 학인을 시켜 주마. 적어도 그 잘난 도(道)에 관해서만큼은 지겹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청연이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초운은 두 사람 간의 기 싸움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곧 크게 대답했다.

“네에!”

“오호라, 꽤 자신 있나 보구나.”

적오의 물음에 초운은 잠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곧 청연에게 따듯한 시선을 보내며 답했다.

“네! 무공 열심히 배워서 청연 할아버지 업어 드려야 하거든요.”

초운의 대답에 적오의 눈썹 한쪽이 꿈틀댔다.

“할아버지? 항렬에 관해서 배우지 않았느냐?”

“항렬이 뭐예요?”

적오는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답했다.

“귀찮으니 설명은 됐고 다음부턴 청연 태사백조님이라 불러야 한다.”

“……그치만 할아버진 할아버지인데.”

화산파까지 오는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청연자와 초운은 친조손 간과 같은 깊은 정을 쌓았다. 그런 것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 만무했다.

“어허. 벌써부터 사부의 명을 어기는 게냐?”

“알았습니다아…….”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초운을 향해 청연자가 말했다.

“허허. 괜찮다. 언젠가 입에 배겠지.”

“저도 그럼 편하게 불러도 됩니까?”

“허험~”

적오의 물음에 청연자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셋만의 초라한 배사지례는 끝났다. 많은 이들에게 축하받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초운은 화산파의 문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도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수련도사의 신분이며 언제든 사문을 그만둬도 상관없는 시기였다.

보통 수련도사 기간은 오 년에서 팔 년이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수련도사들은 무공의 기초를 배우면서 속가로 남을지 세속의 연을 끊고 도사로 남을지 마음을 다잡는다.

즉 화산파의 정식도사(제자)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그만두지 않지만 초운의 경우는 달랐다.

바로 사부부터가 그를 꺼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으로 있을 초운의 수련은 남들에 비해 고달프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二章

“사백조인 청연자께서는 화산의 검이 향을 잃고 무(武)는 정기를 잃었다 하셨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검이 향을 잃었을지는 모르나 그 날카로움은 강호의 일절이며 무가 정기를 잃었다 하나 그 깊이는 소림이나 무당에 못지않다.”

푸른 도포를 입은 중년의 도사는 말이 끝나자 매화가 새겨진 한 자루 청강검을 들고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검(劍)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느릿하게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허공에 흐르는 바람과 만나 거센 질풍이 되어 공기를 찢었다.

검기(劍氣)가 차가운 바람이 되어 사방을 훑고 지나가자 남은 것은 흐릿한 검의 잔영…….

사부의 시연을 지켜보던 소동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가득했다.

긴 심호흡과 함께 사부의 시연이 멈추자 소동, 아니 초운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조금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마의 땀을 닦아 낸 사부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초운에게 말했다.

“가볍게 풀어 본 이십사수매화검법이다. 너는 아직 배울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사문의 검식을 미리 견식하여 개안(開眼)하는 것도 좋겠지.”

사부가 말하는 개안의 속뜻은 화산검의 드높은 벽을 깨닫고 일찍이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진하기 그지없는 초운에게 그러한 눈치가 있을 리 없었다.

“개안이 뭐예요?”

팅-!

사부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다 하마터면 자기 손을 벨 뻔 했다.

“……그냥 그런 게 있다면 있는 거다.”

“네!”

초운은 사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마치 하늘의 전언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그러한 초운의 태도가 적오에겐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

화산에서도 선택받은 소수만이 익힐 수 있다는 비전의 검공으로 극에 이른다면 검향경(劍香境)에 도달하고 오의(奧義)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劍)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검에서 매화향을 피워 낸 도사는 백 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과거 이십사수매화검의 극의에 달하여 칠절매화검을 얻은 이에게는 영광스런 매화검수의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매화검수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일대제자 중 특출 난 실력과 인품을 지닌 이들에게 매화검수의 칭호를 내리지만 검향경의 고수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 진짜 매화검수의 맥은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산파는 그 잃어버린 오의를 복원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그리고 초운의 사부인 적오도 그러한 노력을 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너는 다른 아이들처럼 단체 생활을 할 필요 없다. 물렁한 특혜 따위는 아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입문한 시기도, 재능도 뒤처지는 녀석이니 따라잡으려다 가랑이가 찢어질까 염려해서다.”

이미 입문 시기에서부터 적게는 일 년, 많게는 칠 년 이상 차이 나는 제자들이 수두룩하다.

초운 또래의 처음 입문한 제자들은 보통 단체 생활을 하지만 적오는 제자인 초운이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까 두려웠다.

초운이 창피를 당하면 스승인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염려 아닌 염려로 초운을 붙잡아 둔 것이다.

물론 타 제자들을 아예 만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지속적으로 내보여서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초운은 사부의 이런 속도 모른 채 감동하고 말았다.

‘사부님은 정말 나를 걱정해 주시는구나. 열심히 노력해서 사부님을 기쁘게 만들어야지.’

적오는 존경심이 가득 담긴 초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피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눈에서 곧 피눈물이 흐르게 될 것이다.’

적오가 말했다.

“무공의 기초는 탄탄한 하체. 다른 제자들도 다 하는 일이니 어렵다고 우는 소리는 하지 않기 바란다.

마보 한 시진이다. 한 시진을 채우지 못한다면 다음 날 못 채운 만큼 늘어나니 명심하도록.”

“네에! 열심히 할게요!”

초운이 소리치자 적오가 인상을 찌푸린 채 귀를 후비며 말했다.

“……그렇게 크게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네에!”

“……글쎄 조용하라니깐.”

* * *

사부의 검기(劍技)는 놀라왔다.

난생처음 보는 검술은 어린 초운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였다.

반 시진가량 계속된 마보로 다리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머릿속에선 사부의 검무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몸이 고통스러울수록 사부에게 배울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고 행운이라 생각했다.

무공이란 것의 개념이 아직 잡히지 않은 터라 강함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저 사부의 그 멋있는 검무에 취해 버린 것이다.

‘사부님처럼 하고 싶다.’

마보를 유지하며 사부가 그린 검의 궤적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보지만 검식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공에 문외한인 아이가 검식을 한 번 보았다 해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재능이 뛰어난 아이도 아니거니와 기억력이 좋은 편도 아니다. 초운의 머릿속의 검무는 그저 느낌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휘청.

“어?”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초운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초운의 체질상 마보 한 시진은 역시 무리였던 것이다.

일어서려 해 보지만 초운의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남의 다리인 듯했다. 시무룩한 얼굴로 허벅지를 두드리던 초운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주던 아비도, 어미도 더 이상 없다. 화산까지 오는 동안 보살펴 준 청연도 없었으며 사부인 적오 역시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혼자인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추운 것도 아닌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떤 초운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고 다시 일어섰다.

다리는 여전히 휘청거렸지만 젖 먹던 힘을 다해 버텨 냈다. 주위에 아무도 없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새 수많은 별들이 떠올라 있었다. 별들의 궤적은 한낮의 뭉게구름처럼 때론 엄마의 모습, 때론 아빠의 모습으로 변해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초운은 왠지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다시 마보를 시작했다.

* * *

“쳇!”

초운의 마보를 몰래 지켜보던 적오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앉아 있던 나뭇가지에서 소리 없이 내려와 거처로 돌아갔다.

* * *

멀리서 초운을 지켜보던 청연은 초운이 휘청대며 넘어지자 깜짝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앞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발을 잡은 것은 바로 멀리서 느껴지는 적오의 기척이었다.

‘젠장. 저놈은 아직도 안 갔군.’

하기야 아무리 제자를 싫어하는 인물이라지만 책임감만큼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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