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길(6)
126화. 길(6)
무림맹 앞.
적군들의 사이를 누비며, 마인들을 처리했다.
양손에 한 자루씩 검을 쥔 채, 추는 칼춤.
넘실거리는 화기와 냉기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쐐액- 쐐액!
공간을 누비는 12자루의 비도는 또 어떤가.
각기 하나의 별똥별처럼 날아다녔으니···.
순식간에 마인들을 정리한 뒤, 이번엔 검명을 일으켰다.
지잉-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봉황진검을 타고 다양한 음률이 뿜어져 나왔다.
기이할 정도로 이목을 끄는 몽환적인 음색.
그리고 머지않아···.
척! 척! 척!
일대의 강시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후엔 과거 북경에서 모산파 도사들을 구출할 때 그랬던 것처럼, 강시들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푹! 푹! 푹!
강시들의 머리통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끈적한 핏물이 강처럼 흘렀다.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됐다.
근처에 있던 아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덧 그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내 신위에 감탄을 보내고 있었다.
금태강을 비롯한 측근들은 숫제 감격을 한 것과 같은 표정도 짓고 있었다.
“역시 무사했구나, 태산아.”
금태강의 말이었다.
싱긋 웃어줬다.
이제 보니 금태천도 금태강의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곧 "내가 뭐라고 했어. 둘째형은 분명 멀쩡하게 일어날 거라고 했지? 무려 호북황성이 인정한 사람인데···." 라는 말을 주변에 속삭이며 어깨를 으쓱 하더라.
다만 내게 직접 그런 말을 하긴 부끄러운지, 애써 시선을 피하는 것도 같았다.
살포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후엔 좌호법과 신녀를 향해서도 눈인사를 보냈고.
금화표국의 표사들과 살궁의 무사들을 향해서도 가볍게 묵례를 보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무림맹 소속 무사들에게 그간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두가 날 반겨주었다.
당연히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정신을 잃었던 기간이 확실히 길었던 것 같긴 하군.’
기분이 좋다고 상황까지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전쟁이 오래도록 지속된 탓에 아군의 얼굴엔 하나같이 그림자가 내려 있었으니···.
하물며 나 또한 워낙 오래 병상에 누워있던 탓인지,
골격이 종종 삐거덕거렸다.
뭐, 그래도 골격이 삐거덕거리는 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테니.
지금 이 순간에도 몸속을 흐르고 있는 요상결의 기운들이 혈관 곳곳을 누비며, 육신을 최상의 상태로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 흡수했던 대환단의 기운이 노란 물고기의 형상을 한 채, 몸 구석구석을 보듬고 있었고.
금귀방탄공의 구결을 입은 선기는 하얀 물고기의 형상을 한 채, 대환단의 기운을 보조하고 있었다.
그렇게 회복된 육신을 이용해, 죽은 척 강시의 시체들 사이에 숨어 있던 몇몇 마인들의 목을 친히 베어내고.
무림맹 정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핏물이 신발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작금엔 오히려 핏물이 없는 곳이 더 적었으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근처에 있던 하오문도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까 소령이 내게 건넨 말을 반복하더라.
무림맹 내에 배신자가 있었던 탓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고.
호북성에 있는 여러 무력 단체들이 황군과 마인들의 협공을 당해 점령을 당했거나, 점령을 당하기 일보직전이라는 것 같았다.
실제로 제갈세가 또한 현재 마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
"제갈세가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일대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가 흐릿해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강시들이 넘쳐납니다."
중간중간 나와 친분이 있던 무림맹 무사들도 끼어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교주 그놈이 관을 이용해 이상한 풍문을 내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다 보면, 곧 인세에 구원의 손길이 내릴 거라나 뭐라나. 구체적인 사정은 안에서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어느덧 자연스레 회의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장의 문을 열었다.
끼익- 철컥.
일전에도 몇 차례 들어와 본 적 있는 그곳.
내부를 둘러봤다.
과거와 달리, 현재 회의장엔 정말 다양한 종류의 무인들이 있었다.
통상 구파일방으로 통하는 곳의 장문인들은 물론이요,
오대세가의 수뇌부들도 거의 다 모인 것 같았다.
그만큼 현재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맹주님과 군사님 두 분 다 계시지 않는군.'
아까 얼핏 듣기론 맹주는 얼마 전 강불해와의 싸움으로 인해,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 같았다.
'초승달 모양의 강기를 정면에서 받아냈다고 했지?'
때문에 현재는 남궁세가에서 요양을 취하는 중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군사 제갈천소는···.
'제갈세가 근처에 유독 강시가 많다고 하더니, 그쪽에 있는 건가.'
현재 제갈세가 근방에서 마인들과 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 같았다.
자리에 고쳐 앉으며 주변을 향해 물었다.
"헌데. 중원의 상황이 대체 어느 정도까지 좋지 못한 겁니까? 아까 얼핏 듣기론 제갈세가는 강시들에 아예 포위를 당했다지요?"
내 물음에 회의장에 모여 있던 무림맹 수뇌부들 중 몇몇이 헛기침을 했다.
이에 근처에 있던 소림사의 고승이 대표로 대답을 해주었다.
"비단 제갈세가만 그런 건 아닙니다."
이후 몇 마디 말이 더 이어졌다.
신출귀몰한 강불해.
중원 전역에 퍼진 강시 떼.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황군.
이런 말이었다.
고승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무림맹 수뇌부들이 헛기침을 했던 까닭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문파들도 마찬가지로 고초를 겪고 있는데, 굳이 콕 집어 제갈세가부터 지목을 하니 불편했던 모양.
"실제로 중원 전역에 있는 거의 모든 문파들이 현재 마인들의 공격에 고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금화표국 본점도 황군에 점령을 당했다는 말씀 들으셨는지요?"
물론 들었다마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만 내가 제갈세가의 소식에 특히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곳 보고에 있던 봉황진검은 무사한지 모르겠군.'
비록 피 딱지가 눌러앉아, 검으로써 효용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무기이지만.
심지어 과거 만졌을 때, 환상도 보여주지 않았던 조금 특이한 봉황진검이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 봉황진검이었다.
그 때문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아까 유독 제갈세가 근처에 강시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명확한 이유는 모르나, 놈들도 그 검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적군의 의도를 방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하물며 직감도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검을 절대 사수해야 한다고.
물론 이곳에 봉황진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다.
제갈세가의 보고에 들어가 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물며 설사 들어가 봤다고 하더라도, 피 딱지가 눌러앉은 무기에 관심을 보였을 사람은 몇이나 있겠는가.
그러니 굳이 이 이야긴 지금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렇군요. 그리고 맹 내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일단 다른 문제들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제갈세가로 향해 봉황진검을 취하는 것만큼이나, 내겐 정보를 취하는 것도 중요했으니.
"진주언가를 비롯한 군문에서 저흴 배신했습니다."
"그렇군요. 애초에 군문은 황군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미리 대비를 했어야 하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 후회한들 무엇하겠습니까."
이후엔 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래서 앞으론 어쩔 계획이십니까?"
이곳에 이들이 모여 있단 건, 그걸 논의하기 위함일 테니.
다만.
'분위기가 왜 이러지?'
내 질문 이후로 회의장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식어버렸다.
다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양새.
마침 회의석에 총해무관의 권사얼이 있었기에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체 다들 왜 이러는 겁니까?]
그는 나와 각별한 사이이니. 가감없이 대답을 해줄 터.
아니나 다를까,
[맹주님과 군사님의 부재 때문인 것 같네.]
그가 진솔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말씀은,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란 말입니까?]
[그러네.]
그의 말은 아까 소림사의 고승의 말과도 닿아 있었다.
'결국 다들 자신들의 문파 근처로 출정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군.'
하긴. 이들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중원 각지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을 테니.
다들 어쩌다 보니 이곳에 모여있지만,
아니 어쩌면,
무림맹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일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여 어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나 잠깐 고민을 할 때였다.
옆에 있던 소림의 고승이 말을 붙였다.
"헌데. 허리에 있는 그건 무엇입니까? 제 미욱한 식견에 따르면 분명 맹주령인 것 같은데···."
대답을 하기 전, 잠시 그의 눈을 바라봤다.
호기심과 기대가 반반씩 섞인 눈빛.
그의 의도는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가 전면에 나서서 이 혼란을 수습해주길 바라는 것 같군.'
맹주령을 지니고 있다는 건, 차기 맹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란 말일 테니.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까 내게 중원의 상황과 이곳에 있는 무림맹 수뇌부들이 서로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이유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를 해줬던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았다.
내가 상황을 중재하길 바랐던 모양.
일면식도 없는 내게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굳이 피하진 않았다.
"맞습니다. 맹주령입니다."
이에 일대가 기이할 만큼 고요해졌다.
다행히 어느 누구도 맹주령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진 않았다.
물론 종종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대체로 사천당가나 개방처럼 나와 면식이 없는 문파들이 그랬다.
그러나.
"그럼 적린휘성께서 이 회의를 주도해주시면 되겠군요."
소림사 고승의 말에 그들도 대놓고 반대를 표현하진 못했다.
아무래도 이 고승이 무척이나 발언권이 강한 사람인 모양.
다만 이전까진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무슨 상관이랴.
슬쩍 고승을 본 뒤, 주변을 둘러봤다.
고승의 반응에 힘을 입었는지.
총해무관의 권사얼이 주변을 설득하고 있었다.
익히 나와 인연이 있던 종남파나 화산파도 내게 힘을 실어주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심지어 맹주 남궁벽이 소속된 남궁세가도 그랬다.
'차라리 잘되었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현재 중원이 처한 위기는 분명 힘을 모아 극복해야 할 터.
더욱이 이번 사태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사서 어르신을 비롯한 모산 도사님들은 어디 계시지?'
물론 모산파 도사들 또한 나만큼 정보를 쥐고 있을 테지만.
그들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강불해 일행과 맞서는 중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이 포권을 취해보였다.
"그럼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이후 회의장 구성원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렇게 암묵적인 동의를 구한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
"···현재 시산혈귀의 위치가 특정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일단 가까운 곳에 있는 적들의 전력부터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게 순리일 것 같습니다."
아까 소림사 고승이 분명 강불해 그놈이 신출귀몰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시산혈귀의 위치가 특정되지 않는다는 말 아닌가.
"그러니 우선 가까이 있는 제갈세가부터 지원을 했으면 합니다."
다만 그리 많은 논거를 펼치진 않았다.
또한 구체적인 계획도 풀어놓지 않았다.
"···그럼 그 다음은 어딥니까?"
"그건 제갈세가를 무사히 지원한 뒤, 다시 논의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록 임시 맹주와 비슷한 직을 얻게 됐고.
상당수의 문파들이 내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가급적 분란을 일으켜선 안 될 테니.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제안을 건네는 선에서 그친 것이라 보면 되었다.
"제갈세가라. 알겠습니다. 그곳에 가면 군사님도 있을 테니, 나쁘지 않은 의견인 것 같습니다."
다음 행선지를 선택하는 과업의 무게는 제갈천소에게 전가하기로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당연히 내게도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어쨌든 제갈세가를 돕는 과정에서, 그곳에 있는 '봉황진검' 또한 취할 수 있을 테니.
'더욱이 이렇게 되면, 제갈세가에 도착한 이후엔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고.'
이후 우리는 대략 반 시진 이후에 출정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함께 회의를 진행한 수뇌부들은 출정 소식을 알리기 위해,
각자 휘하의 무사들을 향해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내 휘하의 인물들을 마주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절을 한 뒤, 어쩌다 이리로 옮겨졌는지는 구체적으로 묻지 못했군.'
모산파 도사들에 대한 것 또한 마찬가지.
정신을 차린 뒤, 너무 정신없이 움직인 것 같았다.
출정까지 남은 반 시진이란 시간은 그런 걸 파악하는 데 쓰면 될 듯.
막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저분은?'
아까 내게 힘을 실어주던 소림사 고승이었다.
더욱이 옆에 권사얼도 함께 있었다.
'무슨 일이지?'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
이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라.
그때 옆에 있던 권사얼이 고승의 소개를 대신 해주었다.
"이분은 소림사의 태상장문인일세."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것 같더라니.
다만 대체 그런 사람이 내게 왜 따로 찾아온 걸까, 그것도 권사얼을 대동하고.
'하긴. 아까부터 내게 은근히 힘을 실어주는 것도 그렇고···.'
막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제게 말인가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내게 다가와 곧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 내밀더라.
다만 그건 상당히 익숙한 글자가 쓰여진 목함이었다.
"이건. 소림의 대환단이 아닙니까?"
소림사의 대환단.
절로 동공이 팽창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듣기론 구도자와 천인을 겸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습니다."
"정녕 그렇다면, 이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반면 목함을 내미는 그의 눈동자엔 상당한 이채가 깃들어 있었다.
···일단 그걸 받으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곧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환단은 구도자가 성취를 이루는 데에, 꼭 필요한 물건이거든요."
어느덧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