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길(1)
121화. 길(1)
북경으로 향하는 길.
어스름한 새벽녘.
간밤에 꽤나 요상한 꿈을 꿨다.
흑구에게서 빼앗은 초상화를 보다 잠이 들었기 때문일까?
꿈엔 전생의 내가 나왔다.
정확히는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게 맞는 말일 테다.
금태산이란 몸을 처음 차지한 그날부터.
점점 과거로 시간이 흐르더니, 천마신교 뇌옥에 갇혔던 그 시절이 스쳐가고.
이윽고 매음굴에서 지낸 유년시절이 스쳐갔다.
동시에 처절하고 끔찍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끈적끈적한 기억들이 심장을 마구 옥죄어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눈앞에 깜깜해지더라.
곧 눈앞에 삼두육비의 마신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마신과 마주했던 기억들이라 하는 게 더 바람직한 표현일 테다.
봉황진검을 쥐었을 때, 마주한 환상들.
물론 꿈을 꾸고 있는 까닭인지,
과거 마신을 실제로 마주했던 그때와는 많은 부분에 괴리감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지금 나를 주시하고 있는 머리의 개수가 그랬다.
과거엔 세 개의 머리 중 두 개의 머리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나.
헌데 지금은 고작 하나의 머리만 나를 보고 있었다.
나머지 두 개의 머리는 깜깜한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순간 눈가가 침침해졌다.
얼마 후 세상이 암전하더니, 일전에 보았던 마신 강림의 사례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왜 마신이 영체(靈體)에 강림하여 세상을 멸하는 모습 있지 않나.
마신을 받은 영체가 황실 앞에서, 초승달 모양의 길쭉한 강기를 만들어, 하늘과 땅을 둘로 갈라내던 모습.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마인이 황실의 군대와 싸움을 벌이는 장면들.
쐐액- 촤악!
그런 모습들.
절로 온몸에서 땀이 났다.
보면 볼수록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힘을 원하느냐?]
헛숨을 삼키며 꿈에서 깨어났다.
*
'묘한 꿈이었지.'
그리고 지금은 북경으로 이동을 하며,
꿈에서 봤던 장면들을 더듬어보는 중이었다.
처음엔 마신이 내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고 싶어, 꿈을 통해 나타난 것 같단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건 고민해봐야 당장 큰 의미가 없어보이니···.'
대신 꿈에서 본 마신의 무공이나 고민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추후 그와 같은 무공을 직접 사용하거나.
그런 무공을 사용하는 누군가와 싸워야 할 지도 모르지 않나.
이윽고 가만히 천마신기를 움직여봤다.
스멀스멀.
선기와 사기를 머금은 채,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기운.
‘환상 속의 인물들은 이 기운을 이용해, 초승달 모양의 강기를 만들었었지?’
마신의 무공으로 추정되는 초승달 모양의 강기.
검을 한 자루 뽑은 뒤, 가볍게 횡으로 휘둘러 보았다.
쐐액-
그어진 검결이 새벽의 어스름을 반으로 갈라냈다.
다만···.
‘환상 속에서 본 초승달 모양의 강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군.’
마신의 힘을 받지 않아서일까?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강기를 만들기엔,
천마신기의 순간 출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보자.'
그래서 이번엔, 양손에 봉황진검을 각각 한 자루씩 쥔 채, 만지작거렸다.
발출하는 기운의 순간 출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
‘두 자루의 검으로 각각 기운을 발출한 뒤, 그걸 더하면 어떨까.’
물론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각각의 봉황진검에 담긴 기운이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으니···.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환상 속에서 보았던 마신의 강림을 받은 영체(靈體)들은 이 몸처럼 쌍검을 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으니.
그렇다면 검을 한 자루만 써야 하는 것일까?
그 대신 무언가 특별한 깨달음이 필요한 걸까?
그런데 그렇다면, 전에 머릿속에 떠오른 금귀검법과 금귀방탄공에 대한 깨달음은 뭐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환상 속에서 본 가공할 위력을 재현할 수만 있다면,
부교주를 상대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을 텐데···.
뇌리에 자리잡은 불명확한 생각들이 터질 것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그런데 그때였다.
"···공자님. ···공자님!"
번쩍 정신이 들었다.
"어?"
문득 옆에서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인지 저도 몰래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소령이 커다란 눈망울에 걱정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서요."
"그래?"
대체 얼마나 몰입을 하고 있었기에.
"···네. 아침부터 계속 표정도 안 좋으시고."
한 차례 고개를 휘휘 저은 뒤 대답했다.
"괜찮아."
다가온 소령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걱정해줘서 고맙다 대답해줬다.
소령 덕분인지, 그래도 심란했던 머릿속은 대번 쾌청하게 변해 있었다.
소령을 보는 얼굴에 포근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윽고 소령과 가볍게 눈이 마주쳤고.
소령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괜히 시선을 피하더라.
"괘,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꽤나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주변에 있는 다른 일행들도 내색은 않지만,
'내심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고 있었군.'
다들 이 몸을 주시하고 있었다.
괜히 가슴이 찡- 했다.
'정신 단단히 차리자.'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이처럼 많으니.
하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별다른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나를 돕기 위해 북경으로 향하고 있는 것 아닌가.
꿈에서 본 장면들 대신, 당장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은 우선, 북경 인근에 있는 사서 어르신부터 찾아가는 게 맞을 것 같군.'
기사로 더듬어보니,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대략 반나절 거리?
아, 물론. 이게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것뿐.
'당장은 이동을 하며 남는 시간에, 현재 익히고 있는 무공들을 점검해보는 걸로 족할 테지.'
쌍검술이라든지.
비도술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아수라파천권이라든지.
'생각해 보니, 아직 아수라파천권도 2초식까지밖에 쓰지 못하는군.'
아수라파천권은 총 세 개의 초식으로 구성된 무공.
새로운 무공에 손을 대기 이전에, 가지고 있는 것들부터 철저히 익혀야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말 위에서 차분히 무공들을 정리할 때였다.
갑작스레 기감에 걸리기 시작한 미약한 소란이 있었으니.
소령이 아니었으면, 자칫 상념에 잠겨 이러한 소란도 느끼지 못할 뻔했다.
다시 한 번 소령에게 고맙단 생각을 하며, 소란의 정체에 대해 고민했다.
'싸움이라도 난 건가? 하긴. 이제 곧 북경에 도착하니.'
황제를 비롯한 관인들이 부교주의 편이고.
부교주는 마신이 강림하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강시들을 부쩍 많이 많들어대고 있었으니.
강시 있는 곳엔 당연히 소란이 있을 수밖에.
'다만 그래도 예상보다 소란이 너무 큰데?'
말을 몰아 소란이 일어나는 곳으로 빠르게 향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표두님, 앞쪽에 습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두에서 정찰병 역할을 하던 무사들이 급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일단 말을 멈추고 물었다.
"습격? 선발대가 당했다는 말입니까."
"그, 그건."
근데 왜인지, 그들은 옆에 있는 좌호법의 눈치를 보더라.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뭘까.
뭐, 마침 좌호법도 그들과 함께 선발대로 나갔다 오는 길이었으니.
'좌호법에게 물으라는 말인가?'
바로 좌호법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에 좌호법이 그러더라.
"앞에서 황군과 마인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황군과 마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좌호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심상치 않은 문제였다.
갑자기 황군과 마인이라니.
"황실의 군대인 황군과 천마신교의 교도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부교주가 황실과 한 편인 마당인데···.
하물며 지금 좌호법은 내 옆에 있지 않나.
그런데 그때였다.
별안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잠깐. 설마.'
곧 좌호법이 슬쩍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추측에 확신이 더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천마신교의 지도부가 부교주와 좌호법만은 아니지.'
아니나 다를까, 좌호법이 곧 전음을 보내왔다.
[···구도자, 신녀의 일행이 황실의 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긴.
그러고 보면,
그녀는 일전에 내게 사람을 보내 감숙성이 아닌, 북경으로 향하라는 말까지 건넸던 사람 아닌가.
충분히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움직이며 듣겠습니다.]
***
말을 몰아 소란이 일어난 장소로 향하며, 좌호법에게 물었다.
[헌데 어째서 바로 신녀를 돕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겁니까.]
적들의 규모나 신녀 일행의 규모에 대한 질문을 모두 마친 뒤, 문득 든 궁금증이었다.
그렇지 않나.
얼핏 들으니, 신녀는 부상을 입고 구석에 빠져 있다고 하던데.
그런 그녀를 두고 그냥 내게 오다니.
그러자 곧 좌호법이 그러더라.
[···저는 신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신녀는 내게 이래저래 많은 정보를 숨기고 있었다.
하물며 태천이를 구하러 가려고 할 때도 내가 안 가도 무사할 거라며 어깃장을 놓았었다.
아마 그런 것에 대한 말일 테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명확치 않다는 말.
그래도 일단 지금은 신녀의 편에 서서 황군을 몰아내자고 대답해주었다.
물론 나 또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다만.
'최소한 답변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나.'
이게 내 생각이었다.
이윽고 마주한 황군과 마인들의 싸움.
챙! 챙!
검명이 평야를 울리는 가운데.
빠르게 검을 휘둘러 황군과 마인들 사이에 얼음벽을 만들었다.
촤르륵-
마인들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보이는 까닭에, 일단 전선을 분리하기 위함이었다.
노란갑주를 입은 황군과 까만 옷을 입은 마인들 사이에, 거대한 얼음벽이 솟아났다.
이에 의도대로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마인들이 우릴 알아보고 기뻐하더라.
그리고 그 틈에,
[빠르게 끝내지요, 좌호법.]
좌호법과 함께 노란갑주를 입은 황군들에게 달려갔다.
좌호법이 새까만 부채를 꺼내 강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양손에 봉황진검을 든 채, 연신 칼춤을 췄다.
촤악- 촤악!
뜨끈한 핏물이 흠뻑 옷을 적셨다.
마침 익히고 있던 무공들을 차분히 점검해보자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금귀검법과 금귀수, 아수라파천권도 적절히 분배해 사용을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너무도 당연하게 황군들을 전부 제압할 수 있었다.
가벼운 몸풀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윽고는 부상을 입고 한 쪽에 뉘여 있는 신녀에게 다가갔다.
저벅저벅.
"부상이 심한 겁니까?"
근처에 있던 시녀에게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원래 몸이 약하신데, 무리를 하신 터라, 기혈이 뒤틀리신 거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얼굴은 창백했지만, 신녀 또한 괜찮다고 하는 걸 보니,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구도자."
여차하면 나중에 진희원에게 치료를 부탁하면 되리라.
물론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깊은 날숨이 세어나왔다.
심사가 상당히 복잡했다.
무엇부터 물을까 하다 일단 그들의 목적부터 듣기로 했다.
"헌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곧 그녀가 그러더라.
"구도자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나를 돕기 위해 왔다라.
또 구체적인 말 대신, 애둘러 말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믿음이 가질 않았다.
어떤 식으로 말을 이어갈까 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그게 더 좋아보였다.
신녀의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울 테고.
당황은 종종 실수를 부르지 않나.
"절 돕겠다는 말, 정녕 사실입니까?"
형형한 눈빛으로 신녀를 봤다.
신녀는 예상대로 적잖이 당황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계속 말을 했다.
"저는 당신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네?"
"아시지 않습니까. 제 동생 일만 해도 그렇지요."
"···그, 그건."
"천마에 대한 것도 의도적으로 감추신 것 같더군요."
"···들으셨습니까?"
"그러니 증명해보이시죠."
"···증명 말입니까."
"만약 당신이 적이라 판단되면, 가차없이 이 자리에서 정리하고 움직일 겁니다."
곧 신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반응이 본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리라.
물론 나는 그런 신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연신 대답을 종용했다.
일대에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이는 내가 신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물론 그녀 또한, 충분히 인지한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전부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일단 바라마지 않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