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목적(2)
120화. 목적(2)
"어? 그, 글쎄? 이 일을 시작할 때 건네 받았으니까···."
초상화를 건넨 사람이 누구냐는 내 물음에 대한 흑구의 대답.
"그래?"
"아마 관아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데···요."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저 이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
이 그림이 존재한다는 건, 누군가 전생의 이 몸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 아닌가.
잠깐이지만, '설마 현생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현생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이 몸을 얻게 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이런저런 조사를 해보지 않았나.
대표적으로 전생의 이 몸이 유년을 보낸 음양굴이란 매음굴을 조사했을 때.
전생의 이 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지 않나.
물론 그럼에도···.
'그럼 대체 어떻게 이 그림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지 않나.
오죽하면 정말 하기 싫은 가정이지만,
'만약 전생의 내가 음양굴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실존하고 있었다면?'
이런 생각도 머릿속에 떠오를 정도.
'그래서 강불해가 그를 납치하여 가둬두고 남들 몰래 천마신공을 해석하게 시키고 있다면?'
종남산에서 잡았던 마졸들이 부교주를 천인이라고 믿고 있던 건,
부교주가 몰래 배운 천마신공을 자신이 직접 익혔다고 거짓말을 쳤기 때문일 수 있었다.
모산에서 대호법이 내 천마신기를 보고, 부교주가 사용하는 기운과 비슷하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고 보니, 마신이 [이 시대엔 마신을 원하는 자가 또 있다.]라고 한 것도···.
그러나 이내 상상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으니.'
그럼에도 혼란스러웠다.
이번엔 그 가설이 말이 되지 않는 이유를 떠올렸다.
대표적으로···.
'흑구가 여전히 이 초상화를 지낸 채 찾아다는다는 게 말이 되질 않으니.'
이미 납치하여 가둬두고 있으면, 굳이 이처럼 찾아다닐 필요가 무에 있겠나.
더욱이 초상화 속 인물을 특정하여 찾는 게 아니라, 무공을 익힌 아이들을 뭉텅이로 납치하는 것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확실한 건, 놈이 마신을 불러낼 수 있는 당위에 전생의 내가 엮여 있다는 걸 테다.
일단 마구 날뛰던 감정을 차분히 추슬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감정적이 된 것 같다.
이윽고 흑구를 향해 물었다.
"일단, 네가 여전히 그 그림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아직 그림 속의 인물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겠지?"
일종의 확인사살이었다.
곧 흑구가 그러더라.
"아마도? 아마도 못 찾았을 걸? ···요."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아마 내 말이 맞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동안 납치를 했던 아이들은 어디에 있느냐."
이후엔 흑구에게서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납치된 아이들이 본디 향하려 했던 곳으로 향했다.
면양에 있는 어느 고풍스러운 장원 내부.
얼핏 보기에도 고관대직이 소유로 보이는 곳이었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그곳의 내부를 감돌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곳곳에서 얼음 꽃이 쉴 새 없이 몽우리를 터뜨렸다.
빙공과 비도를 이용해, 내부에 있는 병사들을 전부 꽁꽁 얼려버린 것.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손도 빠르게 움직였으니, 그야 말로 일사천리였다.
그곳에 있던 수뇌부들을 잡아 흑구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심문을 했다.
개량한 분골착근으로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을 선사해준 것.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혹여 이 그림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나?"
눈앞에 초상화를 들이밀었다.
"크윽! 사, 살려줘!"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다만 애석하게도···.
"모, 모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림의 출처에 대해선 쉬이 밝혀낼 수 없었다.
그저···.
"네, 네놈. 이러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황제 폐하께서 아시는 날엔 분명 네 놈을 단죄하실 것이다."
이런 저주의 말만 반복해서 들었을 뿐.
단박에 죽일까 하다, 일단 마혈을 짚은 뒤 한 데에 모아두었다.
계속 심문을 하다 보면, 작은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몰랐으니.
그렇게 몇 군데를 더 돌아다녔다.
알아 보니, 흑구와 같은 일을 하는 놈들이 꽤나 많았다.
'천하에 몹쓸 놈들 천지로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일행들은 내 행동에 적잖이 감격을 하더라.
역시 적린휘성은 다르다나?
"차기 맹주로 회자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뭐, 딱히 나쁘지 않은 오해였으니, 굳이 대꾸하진 않았다.
실제로 나 또한 납치되어 있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머릿속을 스쳐가는 상황이기도 했고···.
어쨌든 이후엔 붙잡은 고관대직들만 따로 모아 추가적으로 심문을 했다.
혹여 놓친 게 있을까 하여.
"···네, 네놈은 관무불가침이란 말도 모르는 것이냐?"
이미 황제와 척을 진 상황에 무슨 상관이랴.
"헌데. 정녕 이 일을 배후에 황제가 있는 것이냐?"
"쿨럭. 이제··· 조금 겁이 나느냐? 너는 무려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든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도 반성을 하고 우리를 풀어준다면,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쓸데없는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재차 그들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 일에 마교가 엮였다는 것도 알고 있느냐?"
놈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아,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럼 강불해가 엮였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사실 이게 본론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으마."
조금씩 놈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고문이 지속됐을까.
옛말에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던가?
아무래도 그건, 고관대직들에게도 통용되는 말인 것 같았다.
"···그, 그분은 돌아가신 태후마마의 혈육이시다. 폐하께서 그분을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
물론.
"······."
얻은 정보의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잠시 말을 잃긴 했다.
이후 나는 놈에게 재차 해당 정보의 진위를 확인했고.
놈은 곧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잠깐 그 자리에 서서, 놈에게 태후에 대한 정보를 불도록 시켰다.
곧 놈의 입에서 술술술 정보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
현 황제 주중황은 무려 열 살의 나이에 황위에 오른 걸로 유명했다.
세간에 구체적인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별안간 황실에 무림인이 하나 들이닥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십만 금군과 황실에서 보유하고 있던 여러 고수들을 죽인 뒤,
황제와 황후마저 시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는 것만으로도 불경죄를 묻는 세상이었으니.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저 어릴 적 매음굴에 살 때,
약쟁이들이 늘어놓은 헛소리들을 조합하면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청색 도포를 입고 있는 관료가 그와 똑같은 이야길 하고 있다.
하물며···.
"그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제황의 혈통은 현 폐하를 제외하곤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태후의 혈통 또한 강불해 그 사람밖엔 남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다만 그분이 태후마마의 혈육이란 건, 현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한참은 지난 뒤에나 몇몇 관료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이렇단다.
이윽고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고 떠오르는 의문들이 적지 않았다.
그걸 차곡차곡 정리했다.
'우선···.'
첫째로 대체 황제와 황후를 시해한 범인은 누구이며.
강불해의 정체가 뒤늦게 밝혀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는 왜 황후의 핏줄이나 되면서 마교의 부교주를 하고 있던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강불해 그놈의 목적은 뭐지?'
지금까진 놈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녀가 그러지 않았나.
강불해가 중심이 되는 세상은 그 자체로 지옥이라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여러 말들을 조합해보면, 강불해의 목적은 결코 세상의 파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 놈이 태후의 혈육이고, 현 황제의 유일한 혈육이라면, 굳이 세상의 파멸을 바랄 이유가 무에 있단 말인가.'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텐데···.
실제로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만 봐도 황제 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결국 이젠 놈의 목적마저 명확치 않아졌다.
'이걸 알아내려면, 지금 북경에 놈과 함께 있을 놈의 최측근들을 잡아 고문해보는 수밖엔 없나?'
물론 누군가는 어차피 싸워야 할 놈인데,
놈의 목적이 무에 중요하냐 할 수도 있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도 있지 않나.
놈의 목적을 알아야 놈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골똘한 표정으로 놈의 목적에 대해 여러 가설들을 세워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한 가지 단어가 있었으니···.
'···잠깐.'
머릿속을 스쳐간 건, 바로 '대업'이라는 단어였다.
전생의 내가 죽음을 맞이 하던 그날.
놈은 분명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않나.
"내 분명 대업을 완성할 때까지, 시키는 일만 잘하면 풀어주겠다 했거늘."
그리고 동시에 내가 놈에게 자격도 안 되는 놈이 천마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고 도발을 했을 때, 놈은 진심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였었다.
'혹시 그것들과 관련이 있을까?'
대업과 천마.
물론 당장은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었다.
'결국···.'
직접 찾아가서 알아보는 수밖에.
어차피 조만간 북경으로 향할 계획이지 않았나.
놈이 내가 북경으로 오는 걸 방해하기 위해, 태천이를 납치했었다는 말도 들은 판국.
바로 이동해야지 싶었다.
'마침 사서 어르신도 그 근처에 계시는 것 같고.'
이따금씩 기사를 펼쳐 추적해 본 바에 따르면, 그분은 북경 근처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일전에 듣기론, 사서 어르신이 알고 있는 마지막 봉황진검이 그 근방에 있다고 했으니···.
'그래서 내가 잠시 외유를 다녀오는 동안, 강불해가 그걸 차지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다고 했었지.'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지만,
여태 살아계시는 걸 보면 충분히 그 과업을 잘 수행하고 계시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다만 방금 알아낸 바에 따르면, 황실이 통째로 적인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니···.
'병력의 양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을 테지.'
하물며 강불해라는 인간 자체도 절대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작금의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일지 쉬이 가늠이 되질 않는 상황 아닌가.
그를 마지막으로 직접 대면한 게, 무림맹 앞에서 표사들의 목숨을 놓고 흥정을 할 때이니···.
더욱이 마신의 혼백이 놈에게 향하고 있단 소리도 듣지 않았나.
놈은 나와 달리 마신의 힘을 거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전생에서도 만만하게 생각하다가 탈출의 순간, 놈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
결코 허투루 생각해선 안 됐다.
이윽고 심문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쌔액-
밤바람이 비장하게 얼굴을 훑었다.
갑자기 워낙 방대한 양의 정보를 얻었기 때문일까?
다가올 앞날의 무게가 얼굴을 할퀴었다.
사실 이젠 운명의 무게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녹록치 않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씁쓸했다.
막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공자님, 심문은 다 마치셨어요?"
"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소령을 비롯한 일행이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이 몸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이들을 잊고 있던 것 같다.
자연스레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소령과 금태천, 금태강, 그리고 좌호법.
무림맹의 무사들도 있었고.
살궁의 무인들도 있었다.
대체로 내가 가는 길에 군말없이 따라와주는 이들이었다.
순간, 저도 몰래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별일 아니야. 기다리느라, 추웠지?"
소령을 향해 다정하게 말하곤, 일행을 둘러봤다.
운명이 가혹하다곤 하지만, 이번엔 왜인지 해볼만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날이 밝았고.
나는 일행과 함께 곧장 북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