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개입(1)
111화. 개입(1)
호북성 의창의 금화표국.
밤새 비라도 왔는지, 그날따라 유독 물안개가 자욱한 새벽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기상을 한 금태강은 뒷짐을 진 채, 금화표국의 내부를 가만히 산책하고 있었다.
‘팽총관이군.’
그리고 마침,
금화표국의 총관 팽사율을 마주할 수 있었다.
팽총관은 금화표국의 총관이기 이전에, 어릴 적부터 금태강과 함께 어울려온 둘도 없는 친구.
'마침 기분이 싱숭생숭했는데, 잘되었군.'
금태산에게 소령이 있다면, 금태강에겐 팽총관이 있었다.
쉽게 말해, 둘은 흉금을 터놓는 사이.
물론 금태산과 소령의 관계는 언젠가부터 조금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일찍 일어났구먼.”
“기침하셨습니까. 국주님.”
팽사율은 아침 댓바람부터 의복을 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업무를 시작한 모양.
금태강이 말했다.
“쉬엄쉬엄하게. 쉬엄쉬엄. 세월이 하수상할 때일수록 건강관리에 유념을 해야 하는 법 아닌가.”
실제로 얼마 전엔 의창현을 관리하는 현령이 직접 찾아와, “강시들이 잠잠해질 때까진, 당분간 표국 업무를 자제하게.”라고 통보도 해오지 않았나.
그만큼 돌아가는 상황이 심각하단 의미일 터.
물론 표국은 무림보단 관에 더 가까운 기관이고.
유사시엔 마차나 말을 황실에 제공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
그 때문에 대기를 하란 의미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것 없었다.
금태강은 곧 소매를 걷어붙이곤 팽사율의 옆으로 가 그가 든 서류뭉치를 나눠들었다.
이에 팽사율은 한사코 사양을 해보였지만, 결국 서류뭉치의 일부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서류뭉치를 나눠든 금태강이 물었다.
"헌데 어쩐 일로 이 시간부터 업무를 보고 있나."
이에 팽사율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팽사율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곤히 자고 있는데, 시동이 찾아와 금태천 공자님으로부터의 전서구가 도착을 했다는 보고를 해왔다고.
때문에 방금 막 침소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전서구?"
“그렇습니다, 국주님. 그러니 사실 아직 업무를 시작하진 않았습니다. 이거 민망하군요. 이 서류뭉치들도 사실, 어제 잠들기 전에 가볍게 훑어보기 위해 챙겨왔던 거라···.”
그런데 그때였다.
금태강의 표정이 점차 심상치 않게 변해갔으니···.
팽사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시지?'
이에 팽사율은 조심스레 금태강에게 그 까닭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안색이 그리 좋지 않으십니다. 이따 시비들을 시켜 탕약이라도 달여놓으라 하겠습니다.”
이에 곧 금태강이 엷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네. 그런 게 아니니 탕약은 되었어."
곧 잽싸게 되묻는 팽사율.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러네."
"아까 국주님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요즘 세월이 하수상하니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요."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주고 받았을까.
금태강이 이내 씁쓰레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태천이 놈이 꿈에 나왔지 뭔가."
마침내 흉금을 터놓기 시작한 것.
"금태천 공자님께서요?"
"그 뒤론 영 뒤숭숭해서 말이지."
실제로 금태강이 일찍 잠에서 일어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곤히 자고 있는데, 꿈에 금태천이 튀어나오지 뭔가.
심지어 이상한 산을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태천에게 전서구가 왔다라.’
금태강이 팽사율에게 말했다.
“전서구 내용은 확인했나?”
“지금 확인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럼 같이 가세.”
이후 둘은 부지런히 표국 내부를 걷기 시작했다.
금태강의 걸음이 워낙 빨라, 팽사율이 종종걸음으로 부지런히 그의 뒤를 쫓는 모양새.
팽사율은 허겁지겁 뒤를 따라가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국주님, 아마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염려치 마시지요.”
“···그렇겠지?”
“아무렴요. 금태천 공자님은 후기지수들 중에 손가락에 꼽히시는 분 아닙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도착한 비둘기 둥지.
팽사율이 한 편에 서류뭉치를 내려놓으며 금태강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제가 바로 찾아오겠습니다.”
사실 그 또한 앞에선 괜찮을 것이라고 했으나, 내심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종종 걸음으로 서찰을 찾아왔다.
“직접 읽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금태강.
금태강은 차분히 서찰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헌데.
‘국주님 표정이 상당히 오묘하시군.’
안도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 편으론 또 여전히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모양새.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럴까.
물론 의문은 그리 머지않아 해소되었다.
곧 금태강이 서찰을 돌려주며, 그 내용을 읊었기 때문.
“태천이가 별호를 얻었다고 하는군.”
“별호 말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서찰의 서두에는 그런 말이 쓰여 있었다.
얼마 전 우연치 않게 무림맹과 만나 함께 움직이고 있는데.
그들이 금태천 공자님을 두고 호북황성(湖北慌星)이라고 부른다고.
감숙성에 있는 마교도들을 상대로 적잖은 전공을 세우고 얻은 별호라 했다.
팽사율이 슬쩍 금태강을 보며 말했다.
“···이는 분명 좋은 일 아닙니까, 국주님.”
그런데 표정이 왜 이러실까.
“아마 둘째의 별호에 휘성(輝星)이 들어가니, 적당히 붙여준 것일 테지.”
“그래도 아직 약관도 안 지난 나이 아니십니까. 그럼에도 별호를 얻으신 건 분명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 말을 한 팽사율이 서찰의 내용을 마저 읽기 시작할 때였다.
금태강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교도와의 싸움에서 얻은 별호 아닌가. 세월이 세월이니 마냥 반갑지는 않아. 하필 지금 별호를 얻었단 건, 마인들과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서 있단 말 아니겠나."
왜 걱정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였다.
팽사율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여전히 평소답지 않게, 연신 걱정을 뱉어내는 금태강.
평소라면 오히려 표국의 명예를 드높였다고 좋아하실 텐데.
대체 왜 그럴까.
물론 머지않아.
"뒷장을 보게 팽 총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뒷장 말입니까."
금태강의 말에 조심스레 서찰의 뒷면을 보는 팽사율.
서찰은 한 장이 아니었으니.
팽사율은 뒷장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랬다.
앞장에 쓴 것과 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긴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내용.
- 그런데 병장기와 식량을 비롯한 전체적인 물자가 조금 부족한 상황이야.
'군수 물자가 부족하다라.'
정확히는 이 때문에 전선 유지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말.
- 그래서 표국에 남아 있는 식구들한테 부탁해서 물자를 좀 보내주면 안 될까?
결국 이는 당장은 어찌어찌 선전을 하고 있지만.
그 선전이 계속되리란 건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내용을 읽어 보니, 관에서 일체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야. 보통 이럴 땐 관의 창고를 이용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확실히 큰일이군요."
"그러게 말이네. 최전선에서 싸우는데, 보급이 부족한 상황이라. 자칫 지원이 끊기고 적진 한 가운데에 고립이라도 되면···. 아니네. 되었네.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마야지."
물론 평소라면 그저 표사들을 시켜 지원을 보내면 될 테니, 큰 문제가 없었다.
서찰에도 아직까진 무림맹 연합군이 우세하다고 하지 않나.
하물며 금화표국은 나름 일대를 주름 잡는 표국.
비축해둔 물자들이 상당했다.
그러나···.
“하필 얼마 전에 현령이 직접 찾아와 별도의 부름이 있을 때까진 일을 맡지 말고 대기하라고 했으니···.”
상황이 이렇지 않나.
이를 어찌 해야 할까.
더욱이···.
금태강은 불현듯 이런 생각도 들었다.
'상황이 참 공교로워.'
왜 하필 현령은 그 동안은 가만히 있다가 불과 며칠 전에 찾아와 그런 말을 건넸을까.
그렇지 않나.
'태천이가 관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어쩌면 상황이 서찰에서 읽은 것보다 훨씬 심각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잠시 고민에 잠겼던 금태강이 총관을 향해 말했다.
"일단 붓과 종이를 가지고 오게."
"붓과 종이 말입니까?"
"그러네. 먼저 태산이에게 이 사정을 전한 뒤 도움을 청해봐야지."
현재 모산에 있는 걸로 알려진, 금태산에게 전서구를 보내겠다는 말.
백미려와 수시로 주고받고 있는 전서구가 있으니, 어렵지 않을 터였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팽사율.
"확실히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현령의 감시 아닌 감시를 받고 있는 저희와 달리, 금태산 공자님께선 지금 출타 중이시니, 그리로 물자를 운반해간다고 해도 그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관과 척을 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물론···.
"그리고 곧장 현령을 찾아뵐 테니, 간단히 준비를 해두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국주님."
금태강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현령이 다른 꿍꿍이가 없다면 좋겠군.'
금태강과 팽사율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
안개가 자욱한 모산.
아침 일찍 공터로 나와 얼마 전 봉황진검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점검했다.
금귀검법과 금귀방탄공에 대한 깨달음.
하물며.
"어르신 흔쾌히 비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서 노인이 그 깨달음을 점검하는 걸 도와주기로 한 상황.
"이 늙은 몸뚱이로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영광이지. 끌끌."
곧 양손에 각기 한 자루씩 검을 쥔 채, 허공을 향해 가볍게 칼춤을 췄다.
가르고 찌르고 베고.
연신 뒤로 물러나며 그 공격을 피해내는 사서 노인.
참고로 금귀검법은 알려진 바 방어에 특화된 무공.
헌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공격에 특화된 초식들이 소실된 거였다니.'
애초에 두 자루로 펼치는 무공을 한 자루로 펼치니, 공격과 방어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던 것.
물론 왜 소실이 되었는진, 아직 명확치 않았다.
추측하기론 이후 다른 봉황진검들을 취하다 보면, 깨닫는 게 있지 않을까 싶은 상황.
이윽고 사서 노인에게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가겠습니다."
곧 사서 노인은 적잖이 놀라 이런 말을 했다.
그럼 아까 전에 한 건 무엇이었냐고. 그건 본격적인 게 아니었느냐고.
살포시 웃으며, 양손에 각기 다른 기운을 주입했다.
왼손엔 빙공에서 비롯된 차가운 냉기가 들어찼고.
꽈드득-
오른손엔 아수라파천권에서 비롯된 화끈한 화기가 들어찼다.
화르륵!
물론 사기와 선기가 섞인 천마신공은 기본적으로 상시 이 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상황.
"선공은 양보하겠습니다, 어르신."
뭐, 봉황진검을 쥔 뒤 얻은 깨달음에선 여기까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이정돈 알아서 해야지.'
살면서 얻은 어떠한 무공도 온전히 그 자체로 사용한 적이 없지 않나.
항상 더 나은 방향을 구상하고.
그렇게 사용했으니.
결국 지금도 마찬가지.
눈앞의 사서 노인의 눈은 어느덧 휘둥그렇게 변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무공인가."
그러더니 부탁한 선공 대신, 내가 펼치고 있는 기예에 대한 평가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비록 각기 다른 두 개의 검에 나눠담았다고 하나.
빙공과 화공은 그 성질이 극과 극 아니냐고.
그런 무공을 동시에 운용하고 있다니···.
"자네 몸은 괜찮은가? 분명 두 기운이 충돌을 일으키며 내상을 유발할 텐데."
"괜찮습니다, 어르신. 원래도 몸에 무리가 가는 무공들을 많이 사용해왔거든요."
"그, 그런가."
실제로 아수라파천권만 해도 몸에 적잖은 무리를 주는 무공이지 않나.
물론 금귀방탄공을 비롯한 여러 요상결을 이용해, 그걸 최대한 무마하고 있지만 분명 그랬다.
이윽고 사서 노인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선공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이에 노인은 곧 흐뭇하게 웃더니, 내게 잽싸게 달려들더라.
'이번엔 부적도 뿌리는군.'
전심전력을 다할 모양.
가볍게 몸 주위에 있던 천마신기를 움직여 바람을 만들었다.
휘잉-
부적을 흩어내고.
노인이 뻗어내는 장심은 왼손의 검으로 막아냈다.
쩌저적-
노인의 손에 얼음 결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른손에 있는 화기를 머금은 검을 노인의 목젖을 향해 찌르면···.
휑-
물론 진짜 찌르진 않았다.
노인의 뺨을 비켜가는 봉황진검.
기운은 노인의 뒤편을 향해 발출했다.
쾅!
노인의 뒤편에 폭음이 터졌다.
잠시간 일대에 열풍이 몰아치고.
"이거 십초지적도 되질 못하는구먼."
곧 노인이 말했다.
워낙 격차가 많이 나는 까닭에 제대로 도움이 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포권을 취한 뒤 말했다.
"충분합니다. 그럼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비록 십초지적은 되질 못하지만, 몇 번이고 비무를 해주기로 했으니.
비유가 적절한진 모르겠지만, 질보단 양이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어르신과 싸우면서 부적술의 묘리도 자연스레 이해가 되고 있고···.'
여러모로 좋았다.
"일단 조금만 쉬었다 하자고. 난 자네처럼 젊지 않아."
쉬는 시간에는 모산파의 역사와 마신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그렇게 얼마나 비무를 치렀을까.
나름 성과를 얻었다 싶을 때였다.
"손님이 온 것 같구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끌끌 웃으며 허리를 두드리는 사서 노인.
나 또한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까닭에 동의를 표했다.
이윽고 포권을 취하며, 옆을 봤다.
그리고 그곳엔···.
"표, 표두님!"
"공자님!"
백미려와 소령이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헌데···.
'표정이 왜 저리 심각하지?'
곧 다가온 백미려가 말했다.
"표두님, 전서구가 왔습니다."
"전서구 말입니까? 어디서 온 겁니까."
"하나는 표국에서 왔고. 또 다른 하나는···."
"또 다른 하나는?"
"그건 정확히 말하면, 전서응입니다."
전서응이라 하면, 비둘기 대신 매를 사용하는 것.
상당히 시급을 요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백미려의 말이 이어졌다.
"···살궁에서 보낸 급보입니다. 어젯밤 금태천 표두님께서 습격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몰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재빨리 백미려에게 다가가 서찰을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