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종남산(4)
98화. 종남산(4)
봉황진검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찬란한 빛무리.
워낙 밝은 탓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 관짝에서 나오는 사기(死氣)를 흡수하여 빛을 내는 건가.’
왜 사기를 흡수하기 시작했고,
어떠한 원리로 발광을 하는 건진 명확치 않았지만,
주변을 흐르는 사기의 농도가 시시각각 줄어드는 걸로 말미암아 분명 그래보였다.
‘신기하군.’
다만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저, 저 검이 대체 왜···.”
갑작스레 눈앞의 마인들이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벌벌 떨기 시작한 것.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몇몇이 허망한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봉황진검을 바라보고 있었고.
또 다른 몇몇은 넙죽 바닥에 엎드린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여, 역시 저건···."
"마, 마신이여···."
대체로 신검이니 마신이니 이러쿵저러쿵.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개중엔 삿대질을 하며 분개하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거짓말! 그럴 리 없다! 왜 저런 놈에게서 모습을 드러내려 하시냔 말이다!”
이처럼 정신없는 상황 때문에, 살짝 현기증이 나려했다.
다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이윽고 바닥에 넙죽 엎드린 놈들 중 하나가 벌벌 떨며 이런 말을 했다.
“그, 그럼 부교주님이 아니라, 저분이···.”
이건 또 뭔 소리일까.
그때 옆에 있던 또 다른 마인 하나가 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엎드린 놈의 귀에 대고 그러더라.
그게 말이 되냐고.
귓속말을 하는 놈 또한 적잖이 당황한 것인지, 목소리의 크기가 작진 않았다.
놈이 계속 말했다.
“현재 우리의 노력으로, 이곳이 마신께서 강림하기 가장 좋은 땅이 된 건 사실이지만···.”
신검만으론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그런 일은 부교주님처럼 '특수한 심공'을 익힌 분만 가능한 일이라고.
더욱이 신검도 '고작 한 자루'밖엔 보이지 않지 않느냐고.
그리고 무엇보다 부교주님도 아직 성공을 못했다고···.
순식간에 꽤나 엄청난 정보들이 스쳐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놈들을 잡아 심문을 해봐야겠군.’
잠깐 주변을 둘러봤다.
퀴퀴한 지하공동엔 좌우로 길게 관짝이 나열해 있었다.
그 위를 사기와 선기가 스산하게 휘돌고 있었다.
놈들은 대체로 그 관짝 주위에 모여 있었다.
성큼성큼.
놈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에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마인들이 보였다.
"어, 어쩌지? 싸워?"
"싸운다고? 미쳤어?"
"그럼 어떡해!"
놈들이 나에 대한 대처 방안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무엇으로 놈들을 제압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원랜 봉황진검으로 처리하고자 했으나.'
이 와중에도 봉황진검은 계속해서 사기를 흡수하며 발광을 하고 있었으니.
이걸론 도저히 싸움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어마어마한 광량 때문인지,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흡사 태양을 정면에서 본 것과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기 때문.
'지금은 아수라파천권이 가장 적합할 것 같군.'
원래 구관이 명관이란 말도 있지 않나.
가뜩이나 이래저래 정신도 없는 판국이니, 이게 제일 나을 것 같았다.
스르릉-
걸음을 옮기며 칼집에 검을 넣었다.
동시에 천마신공을 운공했다.
구구구구-
몸속의 천마신기가 거친 강물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인들은 연신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아직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모양.
'그럼 나야 좋지. 이제 아수라파천권으로 놈들을···.'
막 그런 생각을 하며, 아수라파천권 멸화응취의 구결 대로 내공을 움직일 때였다.
지이잉-
재차 검명을 토하는 봉황진검.
'음?'
갑작스런 검명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나 또한 운용하던 아수라파천권을 일단 보류.
'검명이 아까완 무언가 다르군.'
일단 칼집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찰나의 순간, 봉황진검으로부터 어떠한 사념이 쏟아지고 있었다.
워낙 잡음이 많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어서 뒤로 물러나라고 내게 경고를 하는 건가?'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대략 이런 느낌인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보니···.
'또 조사전에서처럼 환상을 볼 것이라는 말인가?'
머릿속으로 조사전에서의 장면이 언뜻 스쳐가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 것도 같았다.
이처럼 신비로운 일을 겪으면 항상 환상을 봐왔으니.
결국 환상을 보게 되면 기절을 하게 되니, 도망을 치라는 것 같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고, 공자님."
"형?"
금태천과 소령이 깜짝 놀란 얼굴로 이 몸을 보고 있었다.
두 눈이 휘둥그런 하오문도들도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입술을 짓이겼다.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마인들.
'다만 도망치는 게 쉬울 리 없지. 내가 도망을 친다면, 태천이와 소령을 비롯한 일행이 큰 화를 입을 테니.'
물론 이들이 이처럼 계속 어버버한다면 도망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지만.
꼭 그럴 거란 보장이 어디 있나.
이번엔 허리춤에 매달린 봉황진검을 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검은 지금 내게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고 있군.'
그렇지 않나.
뽑아달라고 검명을 토해대서 뽑아줬더니.
이번엔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가라고 하다니.
'설마 나를 시험하는 건가.'
미간이 찌푸려졌다.
과거의 이 몸이라면 어쩌면 봉황진검의 사념에 따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은?
순간 봉황진검이 재차 검명을 토했다.
무시했다.
도망치는 걸 배제한 채, 작전을 수립했다.
'결국 최대한 빠르게 놈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최선일 테지.'
언젠가 기절을 한다면, 그전까지 놈들의 수를 최대한 줄일 계획.
금태천과 소령의 실력 또한 근래 상당히 무르익지 않았나.
내가 미리 적들을 줄여놓으면, 함께 온 하오문도들과 힘을 합쳐 이들을 무찌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미리 환상을 보게 될 거란 걸 알게 돼서 다행이군.'
이윽고 아수라파천권을 펼쳐, 적들을 향해 마구 불꽃을 뿌려댔다.
파앙! 파앙!
내공을 아끼지 않았다.
원래도 넘쳐나는 내공을 거의 쏟아붓듯이 했다.
지하 공동 안에 거대한 멸화가 넘실댔다.
흡사 수십 마리의 검붉은 용이 서로 뒤엉키며 마구 공동을 할퀴어대는 모양.
아비규환 속의 마인들이 보였다.
공동 안의 모든 것이 갈갈이 찢기고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명의 마인들을 처리했을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런 생각을 할 무렵.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주먹 위에 자리하던 멸화의 불꽃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환상 속에 들어온 것이리라.
그리고 머지않아,
'···여긴? 이번엔 모산인가?'
눈앞으로 익숙한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금태천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둘째형의 검에서 광채가 터진 것이라거나,
마인들이 갑자기 넙죽 엎드린 것이라거나,
이런 건 워낙 대단한 무공을 많이 쓰는 둘째형이니, 그러려니 해도···.
'갑자기 기절해버리는 건 또 뭐야.'
도망치는 마인들을 향해 마구 무공을 펼쳐내던 둘째형이 별안간 기절을 해버린 것 아닌가.
다행히 자신이 근처에서 마인들을 무찌르고 있었기 망정이지···.
뭐, 사실 금태천만 당황한 건 아니었다.
하오문도들도 당황을 했고.
마인들도 당황을 한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잠시 소강 상태가 왔다.
둘째형의 상세를 살펴보던 하오문도가 넌지시 말했다.
"보다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 같지만,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곤 그러더라.
그냥 잠이 든 것 같다고.
아니 잘 싸우다 별안간 잠이 들다니.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도 둘째형의 무사함을 확인했으니···.'
슬쩍 근처에 있던 하오문도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다시 싸울 준비를 하자고.
물론 우리가 이렇게 둘째형의 상태를 살피는 사이, 마인들도 자기들끼리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갑자기 광채가 사라졌어."
"설마 실패한 건가?"
"이, 일단. 부교주님께 데려가 보는 게 어떻겠나."
"좋아. 좋은 생각이군."
웅성웅성.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계속 싸울 용의가 있어 보인다는 것.
실제로 "순순히 투항하는 건 어때?" 라는 말을 건넸더니, 도리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분을 넘겨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라는 말로 되받아오는 걸 보면 분명했다.
'역시 마인들은 독하구나.'
방금 전투로 전력의 절반 가량을 잃은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하다니.
뭐, 어쨌든 싸워서 이기면 될 테고.
여기서 멋진 모습을 보이면, 이는 다 복이 되어 돌아올 테니.
'어쩌면 나도 둘째형처럼 별호가 생길지도 몰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금태천이었다.
물론···.
"끌끌끌. 그분이 없으니 우리도 마음껏 힘을 발휘해도 괜찮겠지. 방울, 방울을 챙겨와라."
마인들은 왜인지 굉장히 자신감이 넘쳐보였지만 말이다.
'허장성세겠지?'
곧 다시 전투가 시작됐고.
챙- 챙!
처음엔 분명 우리가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짤랑짤랑.
'방울소리?'
분명 요상한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우리가 유리했다.
한창 마인들과 검을 섞고 있을 무렵. 뒤쪽에서 하오문도 하나가 소리쳤다.
"가, 강시들이다! 저놈들 강시를 숨겨놓고 있었어!"
동굴 좌우로 넓게 펼쳐져 있던 관짝.
그 관짝에서 강시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짚혔고.
이후 놈들이 그러더라.
"그분만 넘기면 순순히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겠다."라고.
***
눈앞에 펼쳐진 모산의 풍경.
정확히는 모산에 위치한 사당이었다.
과거 향로라는 이름의 보옥을 손에 쥐었을 때 보았던, 부적으로 둘러싸여 있던 공간.
그 공간에 이번엔, 낡은 책자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은 없는 건가.'
머지않아, 그 책자가 팔랑- 팔랑-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그 책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이윽고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글씨.
'이건?'
순간 헛숨을 삼켰다.
- 무학(武學)의 근본은 무엇인가?
- 무학은 흐르는 인간사와 같으니.
상당히 익숙한 서두.
'이건 분명 천마신공의 서두이거늘.'
문득 과거 신녀에게 들었던 말이 하나 떠올랐다.
강불해가 이 몸의 부모님의 검을 탐냈던 이유.
그러니까 봉황진검을 모으는 이유.
'그러고 보니, 분명 그때 사라진 천마신공을 찾기 위함이라고 했지?'
이제야 그 말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눈앞의 환상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전생에 내게 건넸던 훼손된 천마신공도 이런 식으로 내용을 알아내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차분히 내용을 살폈다.
다만 아쉽게도 대부분이 이 몸이 전생에 익히 보았던 내용이었다.
물론 그래도 아예 얻을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서책으로는 미처 전해질 수 없는 고유의 필체라거나.
숨겨진 의미라거나.
'이 그림이 이런 의미였군.'
종종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내용을 봤을까.
대략 2할 정도 책장이 넘어갔을까.
다시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마 환상에서 빠져나오려는 모양.
'오히려 전생에 봤던 것보다 전체적인 내용의 양은 적군.'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이 몸이 지니고 있는 봉황진검은 고작 한 자루뿐이었으니.
강불해는 아마 훨씬 더 많은 수의 봉황진검을 찾아 천마신공을 복원했던 걸 테다.
금화표국 조사전에서 봤던 환상에 따르면, 봉황진검은 최소 다섯 자루이지 않나.
그리고 마침내, 다시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챙! 챙!
"크악!"
오만가지 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건가?'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이 말은 우리 편이 전멸한 건 아니란 말일 테니.
아니나 다를까.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전을 하고 있는 금태천과 소령이 보였다.
'···마교 놈들 강시를 숨기고 있었군.'
재빨리 상체를 일으키며, 천마신공을 운용했다.
'이제 제왕보를 밟아 놈들에게 파고들어서···.'
그런데 그 순간.
'잠깐. 이게 왜 이러지?'
저도 몰래 온몸을 더듬었다.
몸 속을 흐르는 천마신기에 약간의 변화가 생겨 있던 것.
'이건 흡사···.'
정확히는 천마신기에 사기와 선기가 섞여들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