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종남산(3)
97화. 종남산(3)
손에 든 횃불로 가만히 구덩이를 비춰봤다.
‘···이건. 사기(死氣)?’
기본적으로 종남산은 선기(仙氣)가 넘쳐흐르는 땅 아닌가.
그런데 아수라파천권으로 만든 구덩이들 안에는, 왜인지 사기(死氣)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손으로 쓰윽 구덩이 속의 사기를 훑어봤다.
휘리릭-
사기와 선기가 와류를 일으키며, 충돌을 하기 시작했다.
파지직!
잠시 그 모양을 바라보다 손가락 끝에 내공을 집중한 다음, 근처에 푹! 푹! 푹! 하고 작은 구멍을 몇 개 만들어봤다.
‘역시 이곳으로도 사기가 모이는군.’
비단 아수라파천권 때문이라기 보단, 땅을 파면 그냥 그곳에 사기가 모이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허리춤의 봉황진검을 봤다.
'여전히 검명을 토하고 있군.'
정확히는 사기와 선기가 충돌을 일으키는 곳 근처에서 그랬다.
물론 품속의 보옥도 여전히 진동을 하고 있었다.
‘혹 마인들의 흔적이 이곳에서 사라진 것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이곳은 사서 노인이 만든 진법 속에서 비추던 공간 중 하나인 종남산이지 않나.
물론 진법이 가리켰던 구체적인 위치는, 보다 산 안쪽에 위치한 소나무 숲이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려.’
어떤 신비가 자리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들여 보다 면밀히 이 동굴 내부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분히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형, 뭐해?”
밖에서 금태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동안 동굴 안에서 나오지 않으니, 나름 걱정이 됐나 보다.
금태천과 소령이 손에 횃불을 든 채, 다가왔다.
“···공자님. 이 구덩이들은 뭐예요?”
소령이 커다란 두 눈을 끔뻑이며 물어왔다.
이들은 선기와 사기를 느낄 수 없을 테니, 별안간 생긴 구덩이들에 의아함을 느끼는 걸 테다.
“형, 뭐야. 혹시 이거 마인들의 흔적이야?”
금태천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이런 말을 건네 왔다.
참고로 금태천의 얼굴에선 얼핏 욕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공명을 탐하는 것 같았다.
전에 도평희가 영웅호걸을 좋아한다는 이야길 했더니,
내내 마인들과의 싸움을 기대하는 모양새였다.
우선 금태천에게 말했다.
“경거망동 하지 말아라.”
방심하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움찔하며 “내가 언제!”라고 발뺌을 하는 금태천.
이윽고 소령에게 말했다.
밖으로 나가 일행과 함께 주변을 경계하고 있으라고.
[태천이가 튀지 않도록 잘 구슬려줄 수 있지?]
이런 전음도 보냈다.
소령이 알겠노라 대답하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금태천에게도 함께 나가라 일러두었다.
“걱정 마.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어.”
금태천은 공명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떨치지 못했는지,
괜히 횃불로 이곳저곳을 비춰보며 밖으로 향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때였다.
‘잠깐. 저게 뭐지?’
그런데 그때.
문득 묘한 기시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아닌가.
'분명 방금···.'
금태천의 횃불이 만들어낸 그림자 중 하나가 부자연스럽게 일렁였다.
“잠깐. 잠깐 멈춰보아라, 태천아.”
이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자리에 딱 멈추는 금태천.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서너 걸음만 왼쪽으로 움직여 봐라.”
“서너 걸음?”
금태천이 의아하단 얼굴로 쭈뼛쭈뼛 게걸음을 했다.
“그래. 거기. 거기서 횃불을 앞에 있는 구덩이에 가져다 대 보아라.”
“이, 이렇게?”
그리고 마침내.
‘그런 거였나?’
사기와 선기가 충돌하는 구덩이 안으로 횃불이 들어가는 순간.
꼭 그곳만 다른 공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변 공기 중 일부가 부자연스럽게 일렁이는군.’
다만 워낙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일렁이기 때문에 이처럼 거리를 두고 봐야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혼자 이곳에 있을 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절로 입가에 미소가 잡혔다.
이윽고 금태천을 향해 말했다.
“소 뒷걸음질을 치다 쥐를 잡는다는 것이 이런 말인가 싶구나. 수고했다.”
“어?”
금태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공로를 탐하더니, 바람대로 공을 세우긴 세웠다는 말이다.”
이에 금태천은 뭔지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더라.
그러더니 동굴 밖으로 나가 우쭐거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동굴 밖으로 나갔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만든 채, 일행을 향해 말했다.
“금태천 표두 덕에 발견한 바에 따르면, 일대에 천혜의 진법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 파훼할 것이니, 다들 말려들지 않게 조심하도록.”
***
종남산 내에 있는 어느 스산한 지하동굴 안.
그곳에 수십 개의 관짝이 주르륵 나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휘돌고 있는 두 종류의 거침없는 기운.
흡사 안개와 같이 넓게 퍼져 있는 선기와, 관짝에서 세어나오는 퀴퀴한 사기였다.
두 가지 기운은 쉬지 않고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콰르릉!
지하동굴 내부에 흡사 낙뢰가 떨어지는 듯한 울림이 연신 퍼졌다.
마침내 충돌을 거듭하던 두 가지 기운은 바닥에 닿아 액화하기 시작했고···.
찰랑-
묘한 기운을 가진 웅덩이가 완성됐다.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마인들이 재빨리 그 웅덩이로 다가가 하얗고 끈끈한 액체를 들이부었다.
치이이-
웅덩이는 그 끈끈한 액체와 섞인 채, 땅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에 마인들이 낄낄낄 웃으며 잡담을 나눴다.
"이 일대를 사기로 가득 채울 날도 머지않았군."
그들의 정체는 천마신교의 청해지부 소속의 마졸들.
물론 평범한 마졸들은 아니었다.
중원을 마신께서 강림하기 좋은 땅으로 만드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인원들이었다.
그들은 연신 웅덩이에 하얀 액체를 섞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지고 온 액체들을 대부분 소진하고 마지막 항아리만 남았을 때였다.
"신검의 탈취를 맡은 놈들은 무사히 빠져나갔겠지?"
문득 액체를 섞던 마인 하나가 이런 화두를 던졌다.
그러자 주변의 마인들이 힐끗 그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다른 놈들 걱정할 처지야?"
"이번 일 실패하면 우리 목이 댕강 떨어지게 생겼구만."
얼마 전 회음현에서 치른 거사가 실패한 것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젠장. 진짜 그땐 너무 성급했지. 괜히 하오문 섬서지부를 탐내는 바람에."
그때만 생각하면 어찌나 아찔하던지.
마침 회음현에서의 일을 마치고 장소를 옮겨 자축을 하고 있었기 망정이지···.
자칫 그들까지 휘말려 죽임을 당할 뻔했다.
이에 맨 처음 "신검의 탈취를 맡은 놈들은 무사히 빠져나갔겠지?" 라는 말을 꺼냈던 마인이 굽어있던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도 강시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었잖아."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방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때랑 다르다고. 여기 진법만 해도 그렇잖아. 종남파 놈들은 절대 발견할 수 없을 걸?"
그는 곧 항아리에서 액체를 퍼와 웅덩이에 쏟으며 말을 이었다.
"절대 들킬 일이 없으니까. 실패할 일도 없을 거야."
물론 딱히 그의 말에 반대를 하는 마인은 없었다.
그는 이중에 그나마 부교주와 연이 닿아있는 마인이었으니.
그가 부교주를 들먹인 이상, 아마 틀림이 없을 테니.
"하긴. 우리도 부교주님께서 그려주신 장보도가 아니었으면, 절대 이곳을 찾지 못했을 테니까."
이후 그들은 희희낙락하며, 이번 일을 성공한 뒤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 일만 잘하면 부교주님께서도 직접 챙겨주시겠지?"
"잘하면이라니! 불길하게 그런 말하지 마. 무조건 성공할 거니까."
다만 회음현에서의 일 또한 당시엔 완벽할 것이라 생각을 하고 진행했던 일인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해 어그러진 것이니 만큼, 가슴 한 편에 묘한 긴장감이 떠날 줄을 모를 뿐이었다.
"맞아. 그런 말하지 마. 입이 방정이란 말도 몰라?"
그리고 그때였다.
찌지직-
별안간 지하동굴을 울리는 묘한 파열음.
찌지직- 찌지직-
순간 웅덩이에 액체를 섞던 마인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소리지?"
불현듯 회음현에서의 일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분명 부교주님께서 여긴 아무도 못 찾을 거라고 하셨는데?"
"설마 부교주님 수준의 무인이 근처에 있던 건가?"
"아이 씨!"
마인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어렸다.
"진짜 말이 씨가 된 거 아녀?"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랬지?"
그리고 누군가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고 했던가.
쾅! 쾅!
이윽고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아, 방울! 방울 챙겨!"
마인들은 아연실색한 채, 각자의 병장기를 꺼내쥘 수밖엔 없었다.
그들의 얼굴 위엔 어느덧 짙은 공포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
'신기하군.'
진법을 풀어내며 생각했다.
이곳은 기존의 진법과는 그 결이 약간 달랐다.
흡사.
'천혜의 진법 위에 누군가 또 다른 진법을 섞어 놓은 건가.'
정확히는 진법을 구성하는 경관 위로 누군가가 그 경관만 감추는 진법을 따로 설치한 모양새.
그리고 또 그 경관만 감추는 진법 위에 새로운 진법을 설치해 그걸 가리고···.
'대체 이게 몇 겹이지?'
종국에는 이 종남산이 지닌 거대한 선기의 흐름과 진법을 일맥하게 구성해 두었다.
쉽게 말해, 종남산을 이루는 선기의 안개가 하나의 진법인 셈.
'물론 그럼에도 사기라는 이질적인 기운이 섞여 있었던 까닭에 발견을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나중에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법을 연신 깨뜨려나갔다.
쾅! 쾅!
땅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이 점차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
찌지직-
종남산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함께온 하오문도들은 겁을 먹었는지, 연신 마른침을 삼켜대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옆에 있던 금태천이 중얼거렸다.
"안에 마인들 잔뜩 있는 거 아니야?"
긴장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여전히 공명을 탐하는 모양.
'뭐, 나쁘진 않군.'
긴장을 해서 몸이 굳는 것보단 나을 테니.
근처에 있던 소령이 말이 씨가 된다고 하며 조심스레 금태천을 자중시켰다.
이에 불퉁한 표정을 짓는 금태천.
슬쩍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진법을 파훼했을까.
마침내 동굴 바닥에 사기와 선기로 뒤덮인 깊숙한 땅굴이 하나 완성됐다.
이윽고 천천히 그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 숨어 있었군."
씨익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드러난 지하동굴을 바라봤다.
그곳엔 무기를 꼬나쥔 마인들이 한껏 긴장을 한 채 이 몸을 노려보고 있었다.
***
뒤 따라온 금태천 일행에겐 입구를 막으라 지시했다.
이후 마인들을 향해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그런데 그때였다.
지잉-
문득 허리춤의 봉황진검이 거세게 검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지간히도 커다란 것이 꼭 자신을 사용해 달라는 말 같았다.
여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거늘.
'마치 검이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군.'
뭐, 적들의 무위를 둘러보니, 검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허리춤에서 봉황진검을 뽑았다.
이에 마인들이 적잖이 놀라는 모습을 했다.
"뭐, 뭐야? 왜 저게 여기 있어?"
"서, 설마 선발대가 당한 거야?"
흘려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빠르게 제압을 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검에 막 화기를 몰아넣을 때였다.
화르륵-
문득 검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왜 이러지?'
저도 몰래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광휘에 휩싸인 검을 지그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