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숨겨진 장소(4)
93화. 숨겨진 장소(4)
마주한 환상 속.
처음엔 잠시 착각을 했나 싶었다.
‘···잠깐. 여긴 조사전인데?’
환상 속에 나타난 공간 또한 금화표국의 조사전이었으니.
물론 머지않아 착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조사전을 보여주는 것 같군.’
환상 속에 나타난 인물들이 현재의 인물들이 아니었으니.
그곳엔 돌아가신 이 몸의 부모님을 비롯한 일단의 무인들이 있었다.
봉황 무늬 칼집을 패용한 다섯 명의 사람들.
이 몸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나머지 세 사람에게 조사전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무어라 설명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생생한 모습에 저도 몰래 두 눈에 습기가 어릴 무렵이었다.
휙-
별안간 공간이 전환됐다.
이번에 나타난 곳은 화려한 벽면에 둘러싸인 창고.
그곳엔 두 자루의 검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한 자루는 칼집 없이 헝겊에 감싸여 있었고.
나머지 한 자루는 봉황 무늬 칼집과 함께 벽면에 걸려 있었다.
‘대체 이번 환상은 무얼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이윽고 다시 한 번 전환되는 공간.
이번엔 조사전에 누워있는 이 몸이 보였다.
깜짝 놀란 소령이 울먹이며, 이 몸을 흔들어 깨우려 하고 있었다.
휙- 휙- 휙-
이후에도 빠르게 장면들이 스쳐갔다.
한 번은 뿌연 운무로 가득한 공간 속 바위에 꽂혀 있는 검이 보였고.
다음엔 세외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허리에 봉황무늬 검을 패용한 채, 바위 위에 걸터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장면을 끝으로···.
“···고, 공자님. 제가 당장 사람을 불러올게요!”
촉촉한 소령의 목소리를 들으며 환상에서 깨어났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소령의 팔을 급히 잡았다.
“괜찮아, 소령.”
그러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령이 훌쩍이며 이 몸을 부축했다.
“저,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소령의 코끝이 빨갰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만들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응. 정말 괜찮아.”
소령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울음을 꾹 참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런 소령을 향해 엷게 웃어주며 물었다.
“소령은 괜찮아?”
“네?”
“아까 향 연기에 뒤덮여 있었잖아.”
심지어 벌벌 떨며 “고, 공자님. 이게 다 뭘까요?”라고도 하지 않았었나.
어쩌면 지금 걱정을 받아야 하는 건, 이 몸이 아니라 소령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였다.
“제가요?”
소령이 의아하단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어오는 것 아니겠나.
너무도 태연한 모습에 잠깐 말을 잃었다.
‘설마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건가?’
마른침을 삼키며 넌지시 소령을 떠보기로 했다.
“···내가 착각했나? 근데 난 어쩌다 기절을 한 거야?”
원래는 벌벌 떠는 소령을 부축하다 기절을 하지 않았나.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가만히 소령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소령이 그러더라.
잠시 눈을 감고 이 몸의 부모님을 떠올리고 있는데, 쿵! 소리가 나서 정신을 차리니 옆에 공자님이 엎어져 있었다고.
‘정말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것 같군.’
영문은 알 수 없었다.
물론 굳이 사실 관계를 바로잡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기억도 못하는 사람에게 암만 말해봐야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테니.’
적당히 “그렇구나.” 대답을 해주었다.
“공자님, 요즘 너무 무리하셔서 그런 거 같아요. 제가 방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소령이 이 몸을 부축하겠다며 바짝 몸을 밀착해왔다.
워낙 다급하게 움직인 탓인지, 소령은 이 몸을 반쯤 끌어안고 있었다.
옷이 두껍지 않아 소령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흠흠.”
저도 몰래 헛기침이 나왔다.
“괜찮아. 혼자 걸을 수 있어.”
“네? ···아 네.”
순간 소령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나더라.
이후 조사당을 나와 함께 이 몸의 거처로 향했다.
“소령도 이만 돌아가서 쉬어. 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는 소령을 돌려보내고, 슬그머니 재차 조사당을 방문했다.
‘더 이상은 환상이 보이질 않는군.’
향을 피워도 이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품속의 보옥도 진동을 하지 않았고.
허리춤의 봉황진검도 검명을 토하지 않았다.
‘보여줄 건 다 보여줬다는 뜻일까?’
향 연기 앞에서 환상 속에 보았던 장면들을 곱씹었다.
조사전에 모였던 다섯 명의 사람들.
그리고 연이어 나타난 네 개의 공간. 그 공간 속에 있던 총 다섯 자루의 검.
일전에 화산의 비고에서 얻은 정보와 방금 얻은 정보를 조합해보았다.
‘화산의 비고에서 이곳 조사전을 가리켰고, 여기 와서 이런 환상을 봤다는 건···.’
나머지 장소도 각기 다른 환상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무래도···.
‘최대한 서둘러서 종남산으로 출발을 해야겠군.’
대략 내일이나 모레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조사전의 향 연기는 어느덧 희미하게 흩어져 있었다.
한 차례 더 향을 피운 뒤, 얼마간 부모님의 위패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음 날 아침.
시원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표국에서 하는 아침 운동.
봉황진검을 손에 쥔 채, 빙공과 아수라파천권을 각각 펼쳐보았다.
화르륵-
검붉은 불꽃이 검을 휘감으며 뿜어졌고.
곧 머지않아···.
쩌저적-
새하얀 얼음 결정들이 불꽃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를 빙판으로 만들었다.
꽝꽝!
이후엔 일전에 회음현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수라파천권과 빙공을 함께 검신에 욱여넣어보기도 했다.
우웅-
검명을 토하는 새빨간 검신 주위로 새하얀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역시 이대로 발출은 안 되는군.’
다만 여전히 검술 자체로의 가치는 크지 않았다.
나아가 진희원에게 들은 영약의 원리를 떠올려보았다.
왜 외공에 특화된 영약 있지 않나.
피부를 강시의 그것처럼 만드는 영약.
참고로 진희원이 만든 영약의 원리는 겉 피부를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든 뒤 단련을 하는 것이었다.
쉽게 이야기해 죽은 피부를 만든 뒤, 그걸 갑옷처럼 활용을 하는 것이었다.
그 원리를 떠올리며, 빙공의 얼음을 봉황진검에서 분리해내려 했다.
빙공의 얼음을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는 것.
투두두둑!
‘···쉽진 않군.’
물론 한 번에 되진 않았다.
‘이것만 된다면, 아수라파천권과 빙공을 함께 쓸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게 얼마나 수련을 계속했을까.
“···후하.”
옆에서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소령의 수련도 봐주고 있던 상황.
마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소령이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소령의 옆에 있던 모래시계가 계획했던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왔다.
봉황진검을 바닥에 꽂아둔 채, 소령에게 다가갔다.
“고생했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소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 아, 네.”
소령이 얼굴을 붉히며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헛기침을 하는 소령.
그런 소령에게 말했다.
“슬슬 끼니 시간이니까 오늘은 이만 할까?”
소령은 반사적으로 휙휙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소령과 함께 도란도란 식사를 했다.
“내일은 보법을 조금 손봐줄게.”
소령이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고 차로 입을 헹궜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령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왔다.
“···그런데요. 그 언니는 어디 갔어요?”
“그 언니?”
아마 좌호법에 대해 묻는 것 같았다.
하긴.
어제부터 영 보이지 않으니, 내심 걱정이 되나 보다.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정이 들었나?’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아까 식사를 하며,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쯤에 종남산으로 떠나려고 생각 중이야.”라는 이야길 건넨 것 때문에 묻는 걸지도 몰랐다.
혹여 좌호법은 떼어놓고 가는 건가 싶어서···.
그게 아니라면, 그냥 나와 무어라도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어깨를 으쓱해주었다.
기사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뱃놀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동호 쪽에서 그녀의 향기가 풍겨오고 있었지만···.
‘대체 언제 돌아오려나.’
그걸 알 수 없으니.
별다른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뭐, 사건이 사건이니 만큼.
어쩌면 이번 종남산으로의 여정은 좌호법을 떼어놓고 다녀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 늦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내가 너무 늦었나 보군.”
막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형님?”
금태강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일까.
“너와 상의를 좀 나누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
···상의라.
기분이 이상했다.
금태강이 먼저 이렇게 찾아와 내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던가?
“앉으시지요.”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금태강.
소령이 급히 차를 내어오겠다고 밖으로 나갔다.
이후 마주앉은 금태강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정략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느냐?”
얼마나 이야기를 진행했을까.
처음엔 세외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조언을 요구하더니,
별안간 이런 이야기를 꺼내왔다.
“정략혼 말입니까.”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아마 이게 본론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와 함께 온 처자가 혼인동맹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 오더구나.”
나와 함께 온 처자라면, 도평희를 두고 하는 말일 터.
···갑자기 정략혼과 혼인동맹이라.
저도 몰래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럼에도 금태강은 묵묵히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더구나.”
“···어떤 면이 그렇게 느껴지셨습니까.”
“그 처자의 배경도 그렇고. 태천이도 그 처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고···.”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 태천이?’
예상치 못한 이름의 등장에 절로 고개가 갸웃했다.
금태강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조금 이른 감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는 쉬이 오지 않는 법이지 않느냐.”
뭐, 태천이가 도평희를 짝사랑하는 건 원래 태천이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은 혈기가 왕성한 편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러나 도평희가 과연 태천이를 마음에 들어 할까?
때문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태천이를 정략혼 시키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생각은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음, 혹시 그쪽에서 태천이를 직접 지목한 겁니까.”
도평희와 꽤나 많은 대화를 나눠본 결과···.
‘그녀는 영웅호걸이 아니면 관심이 없을 텐데?’
그런데 태천이는 영웅호걸은 고사하고 아직 번듯한 별호도 없으니.
아니나 다를까.
“딱히 누굴 지목하진 않았다. 다만 나를 지목한 건 아니지 않겠느냐.”
역시나 약간의 오해가 있지 않나 싶었다.
이후 금태강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도평희란 처자의 나이가 이제 막 과년을 넘었으니, 자신과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고.
대략 방년쯤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어렸던 모양.
“물론 너를 염두에 둔 말일 수도 있지만, 너는 공사가 다망하지 않느냐. 무림맹의 맹주도 해야 하는 몸이고···.”
어쨌든 금태강은 이후 “태천이와 나이도 엇비슷하니 딱이지 않겠느냐.”란 말을 덧붙여 왔다.
과연 그녀가 태천이로 만족을 할까 하는 부분에선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일단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도평희 정도라면 태천이에게도 나쁘지 않을 테지.’
그러고 보면 둘의 성격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항상 공명을 탐하는 도평희와 명예와 자존심을 최고로 여기는 금태천.
어쩌면 환상의 조합이 아닐까?
“···태천이와 그 처자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물며 태천이가 도평희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도 했고···.
‘결국 도평희의 눈에 태천이가 들어찰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나?’
이후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 금태강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전에 보니, 네가 그 처자와 꽤 친한 것 같더구나. 부탁 좀 하마.”
금태강은 내가 둘 사이에서 조율을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내일 종남산으로 떠날 것이라 말을 하니, 떠나기 전까지 만이라도 부탁을 한다나?
어깨를 으쓱였다.
이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며, 전각 앞을 거닐었다.
‘먼저 태천이와 대화를 나눠봐야 하나?’
그런데 그때였다.
“이얍”
챙! 챙!
문득 표사들과 함께 검을 수련하고 있는 금태천이 보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다만 수련을 하고 있는 장소가···.
“어때? 날렵하지 않아?”
금태천이 으스대며 살궁의 숙소 앞에서 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저도 몰래 얼굴이 화끈거렸다.
재빨리 금태천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