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봉황진검(1)
86화. 봉황진검(1)
화산파 장문인 백현이 간신히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후 침상에 걸터앉은 채, 힘겹게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느냐?”
“자, 장문인.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저희가 옆에서 수발을 드는 것이···.”
“괜찮다.”
나와 독대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매화검 때문일 테지.’
대략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마인들을 추적했던 명분도 매화검을 되찾아오는 것이었으니···.
무엇보다 그의 시선도 흘깃흘깃 내 허리춤의 검을 향하고 있었고.
‘천잠사로 감싸뒀음에도 이게 매화검이란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건가.’
뿐만 아니라 제자들 앞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 것도 같았다.
곧 장문인의 요청 따라 화산파 제자들은 쭈뼛쭈뼛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고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이후 간단한 인사치레를 주고받았다.
어느덧 백현은 얼굴에 오만가지 감정을 묻힌 채 내 허리춤의 검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감정을 수습한 백현이 말했다.
“···혹 그게 매화검입니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허리춤에 있던 매화검을 풀어 백현에게 건넸다.
조심스레 검을 받는 백현.
이후 그는 감겨 있던 천잠사를 조심스레 풀어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드러나는 봉황무늬가 그려진 칼집.
백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백현이 풀어헤친 천잠사를 수습하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역시 뭔가 있는 건가.’
사실 이곳에 들어오기까지 매화검을 건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다.
화산파에 있을 땐 단순한 매화검이었지만, 더 이상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러나 매화검이 변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일 테지.’
그러나 내겐 매화검이란 물건 자체보다 이 검이 왜 이곳에 있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정확히는 그게 더 궁금했다.
그러니 여기서 매화검을 숨기는 건, 전형적인 소탐대실이 될 수 있었다.
백현이 유심히 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던 거군요.”
의미심장한 소리와 함께 다시 내게 검을 건네는 백현.
‘근데 왜 다시 검을 돌려주지?’
살짝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그 검을 받았다.
잠자코 백현의 말을 기다렸다.
머지않아 그의 입이 열렸다.
“···사실 매화검에는 두 가지 기록이 존재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두 가지 기록 말입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입에 집중했다.
“하나는 전진칠자 중 한 분인 시조께서 화산 주봉에 머물고 계시던 신선께 하사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는 나 또한 익히 들어본 적 있는 내용이었다.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매화검의 전설.
화산파의 개파조사인 학대통이 매화검을 가지고 화산을 내려와 화산파를 개파하고.
매화검을 건네준 신선이 보여준 무공을 바탕으로 화산의 무공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물론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하려고 분위기를 잡았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리고 또 한 가지 기록은···.”
잠시 말을 고르는 백현.
그는 장문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와 같은 것이라 하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화산파는 과거 정마대전에서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지요.”
정마대전을 들먹이는 걸 보니,
역시 엄청난 사정이 숨어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때 원래의 매화검은 소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실되었다라.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결국 이 말은 이것이 진짜 매화검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긴 했다.
이 검을 통해 보았던 환상에 따르면, 이 검의 원래 주인은 마신을 운운하고 마기를 선기처럼 뿜어대던 그 청년이었으니.
백현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매화검은 보검으로의 가치만큼이나 상징적인 의미가 큰 검 아니겠습니까. 이게 없다면 무너진 화산을 재건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때 도움을 주신 게 당시의 맹주님을 비롯한 무림맹 수뇌부들이었다고 합니다.”
마침 그들의 손에 남는 보검이 하나 있었고.
그걸 모산파 도사들에게 부탁하여 매화검으로 둔갑을 시켰다는 말이었다.
“남는 보검이요?”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저 정마대전에서 얻은 전리품이라는 말이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천마신교에 넘어가기 전까지, 원래 이 보검의 주인은 모산파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걸 봉황진검이란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더군요. 원래 목적은 제사도구였고요."
그러더니 그러더라.
모산파의 물건이 천마신교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게 또 화산파의 신물로 둔갑을 했다는 게 너무 허무맹랑한 것 같아 여태 믿지 않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젠 믿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익히 알고 있던 정보 속에 적잖이 새로운 정보가 얹어졌다.
그는 곧 내 손에 들린 검을 보며 이런 말도 했다.
“그리고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뭐 이리도 정보가 많은지.
'물론 많으면 오히려 좋긴 하지.'
백현은 세상이 혼란에 휩싸이면, 그때 그 검이 스스로 주인을 찾을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 검을 잘 간수해달라고 했다.
"그 말씀은···."
설마 내가 이 검의 주인일 것이라 생각하느냔 물음엔 그저 엷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잠시 검을 봤다.
뭐, 어쨌든 나쁘진 않았다.
이 근래 이 검을 통해 아수라파천권과 빙공을 조화시킬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강불해가 노리는 게 분명한 상황이니, 차라리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게 나을 테지.’
작금의 화산은 그리 안전해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이미 습격을 당해 모산파의 죽간본을 빼앗긴 전력도 있지 않나.
다시 칼집에 천잠사를 감은 뒤 허리에 매달았다.
이후엔 누구도 매화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강불해의 습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몇 가지 정보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곧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부리나케 장문인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잠시 그들을 보다 곧장 화산의 심처로 향했다.
***
금태산 공자님께서 화산파 내부로의 출입 허가를 받아오신 이후.
소령은 일행과 함께 화산 내부에 마련된 임시 객당으로 향했다.
"시설이 여의치가 않아 죄송합니다.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다만 아무래도 내부가 어수선한 까닭에 그리 넓은 공간을 배정받진 못했다.
때문에 도평희를 비롯한 살궁의 무인들과 한 방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을 구도자라고 부르는 예쁜 언니는 잠시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한 상황.
그때였다.
공자님을 기다리며 가만히 차를 마시고 있는데, 진양상단의 도평희가 다가왔다.
"산이라 그런지 날씨가 꽤 쌀쌀하네요."
친한 척을 하며 옆에 앉았다.
소령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살궁 궁주의 수양딸이라고 했지?'
백미려를 통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랬다.
괜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공자님으로부터 진학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라 더욱 그런 것 같았다.
다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평희는 눈치 없이 자꾸 말을 걸어왔다.
물론 그래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도평희는 이러나저러나 자신과 백미려의 하오문 재건을 돕기 위해 온 인물 아닌가.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나눴을까.
"···저. 그런데요. 대협은 어떤 분이세요?"
별안간 물어오는 도평희.
저도 몰래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공자님이 어떤 분이냐니?'
물론 조금 뜬금없다 뿐이지, 이 물음이 나쁘진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저희 공자님 말씀하시는 거죠?"
공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울적한 기분을 털어낼 수 있을 테니.
"네, 맞아요.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오셨다고 들어서요. 어릴 적엔 어떤 분이셨어요?"
잠시 고민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공자님의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총명하시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방황하시던 시절의 이야기는 아주 짧게만 했다.
이후엔 근래 공자님의 활약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 현 무림에 공자님만큼 유명한 후기지수도 없을 걸요? 세간에선 벌써 차기 맹주님으로 유력하단 소문도 돌고 있어요."
"너무 좋은 이야기만 하시는 거 아니에요?"
오죽하면 도평희가 이런 질문을 할 정도.
"그런가요? 저한테 공자님은 항상 좋은 분이어서."
"꼭 대협을 연모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순간 저도 몰래 얼굴이 빨개졌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그, 그런가요?"
그런데 그때였다.
"나중에 대협께서도 배필을 맞이하실 텐데. 그때 펑펑 우시는 거 아니에요?"
소령은 그때부터 무언가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네?"
"시비가 그러면 배필되는 사람이 서운할 수도 있겠어요. 물론 저는 이해할 수 있지만요."
갑자기 턱하고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
"사실··· 저희 궁에서도 대협을 사위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적린휘성 정도라면 충분히 격에 맞는 것 같다고요."
이후 그녀는 앞으로 여러모로 조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이 말을 하기 위해 왔던 것인 모양.
소령은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소미야, 무슨 일 있는 거니?"
"아니에요. 루주님."
백미려가 다가와 말을 걸 때까지 계속 그랬다.
"듣기론 표두님 일이 좀 오래 걸릴 것 같더구나. 그 사이에 우리끼리 섬서 지부에 방문해보면 어떨까 하는데."
"네? 아, 하오문 섬서 지부 말씀하시는 거죠? ···같이 가요."
소령은 곧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화산 심처에 있는 비고의 출입구.
익숙한 기관진식 앞에 섰다.
참고로 화산파 장문인 백현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강불해는 이 문을 너무도 손쉽게 열었다고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함께 왔던 강시들의 힘을 빌린 것 같다나?
비록 얼굴이 뭉개져 있어 누구로 만든 강시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고 했다.
때문에 자신과 사서 노인이 힘을 함쳐 싸웠음에도 패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물론 백현은 원래도 내상을 입고 있던 터라, 큰 도움이 될 수 없었지만, 어르신까지 당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어쨌든 나는 그때 그 흔적을 살피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겸사겸사 사서 할아버지의 냄새를 찾기 위해 온 것이기도 했고.'
강불해가 데려왔다는 강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이 사서 할아버지일 테니.
기관진식을 열고 내부에 있는 진법 또한 해제했다.
익숙한 대나무숲이 눈앞에 나타났고.
이윽고 안으로 들어갔다.
'···심각하군.'
내부는 과거와 상당히 달라져있었다.
이곳저곳 망가지고 파괴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누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인지, 불에 타 전소되어 있었다.
'여기서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
실제로 아쉽게도 직접적인 무언가는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이건 뭐지?'
특이한 풍경을 하나 마주 할 수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랄까.
기억에 따르면 원랜 안개로 뒤덮였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공간 중 하나가 탁 트여 있는 것.
하물며 그 공간이···.
'왜 이렇게 익숙하지?'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풍경이었다.
'이걸 어디서 보았더라?'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종남산이었나?'
순간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화산 내부에 있는 비고에 별안간 왜 종남산의 풍경이 보이는 걸까.
'일단 저리로 움직여볼까?'
이후 차분히 걸음을 옮겨 그 공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