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습격(3)
77화. 습격(3)
“문주님, 큰일입니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방금 막 천막에서 나온 진학주는 부하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토독. 토독.
아니나 다를까.
밤사이 하늘은 북쪽에서 내려온 먹구름에 온통 잠식당해 있었다.
“분명 심상치 않구나.”
사막에 내리는 비는 일반적인 비와는 달랐다.
한 번 내릴 때 그 정도가 어마어마했기 때문.
일행은 결국 다시 천막 안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거사를 앞두고 걱정입니다, 문주님.”
하오문도들이 하나둘 진학주에게 걱정을 토로했다.
그들은 현재 부교주에게 이적을 하려는 상황이니 만큼.
하나같이 신경이 바짝 곤두서있는 상태.
이런 작은 변수 하나까지 신경이 쓰일 수밖엔 없었다.
그런 문도들을 돌아보다 진학주가 말했다.
“마냥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네?”
깜짝 놀라는 문도들.
“지금 내리는 비는 아군에 피해보단 도움이 될 테니.”
그의 말에 문도들이 하나둘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진학주의 말이 이어졌다.
“얼마 전 살궁이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를 접했다.”
“네? 살궁 말입니까.”
“현재 하서회랑에 우호법이 빙궁의 세력을 모으고 있지 않느냐.”
그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살궁에서도 많진 않지만 사람을 파견한 것 같더구나.”
살궁과 빙궁은 원수지간.
빙궁을 견제하기 위해 살궁에서도 인물을 보냈다는 말이었다.
이에 하오문도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서로서로를 돌아봤다.
“확실히 그렇다면···.”
“빙공은 근처에 물이 있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지요?”
결국 내리는 비로 인해, 우호법 일행이 살궁에 피해를 입을 확률이 극히 낮아진다는 이야기.
자칫 우호법 일행이 살궁에 당하기라도 하는 날엔,
부교주에게 투신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큰 차질을 입을 수도 있지 않나.
“문주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두웠던 분위기가 다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다들 걱정 말거라.”
이후 그들은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부교주에게 투신 뒤 펼쳐질 찬란한 미래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행복한 상상을 풀어냈다.
“아 참. 문주님,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하오문 감숙성 지부로부터 오전에 오기로 했던 정기 보고가 끊겼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마냥 좋지만은 않은 이야기도 섞여있긴 했다.
“그래? 그거 이상한 일이구나. 일단 비가 그칠 때까진 기다려보자꾸나.”
“알겠습니다.”
백미려와 소령이 감숙성 지부에 방문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는 그들이기에 내린 안일한 결정이었다.
“또 다른 소식이 있느냐.”
“···그리고 이곳 주민들한테 심상치 않은 얘기도 들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얘기?”
“듣기론, 사막 초입에서 상단 하나가 마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상단? 무슨 상단이냐?”
“그건.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감숙성 지부로부터 보고가 끊겨서 말입니다.”
보통 이런 일은 인근에 있는 감숙성 지부에서 해결을 해줬던 상황.
“확실히 감숙성 지부에서 보고가 끊기니, 불편하구나.”
"죄송합니다."
“너희가 죄송할 게 무어냐. 직접 움직일밖에. 은신에 특화된 애들 몇 풀어 알아보아라.”
결국 진학주는 부하들에게 직접 상황을 알아보라 명령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리고 방금 이 행동이 추후 자신들의 숨통을 조이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파단길림사막 초입. 백양나무숲.
‘진양상단이라.’
언덕 아래로 시선을 내려 마적들과 싸우고 있는 상단의 호위무사들을 봤다.
대체 왜 저들이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들은 분명 북쪽에 있는 궁으로 향한다고 했지 않나.
‘처음부터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럼 왜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일지 알아야 했다.
‘···결국 저들이 무얼 숨기고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지금은 무엇 하나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시기.
막 그런 생각을 하며 움직이려할 때였다.
푹! 푹! 푹!
별안간 마차 안에서 쏟아지는 우모침(牛毛針)이란 암기가 마적들이 타고 있던 말을 공격한 것.
히이잉-
말이 날뛰고.
우당탕탕.
그 사이, 상단의 호위무사들은 분전을 해, 다시 상황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이에 일단 참견하려던 발길이 멈추었다.
상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꽤나 흥미를 느낀 것.
‘확실히 무언가 있군.’
“저쪽도 한 수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좌호법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제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 내몽고로 건너왔을 때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저들 무리엔 암기를 사용하는 무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 보니, 마차 안에 암기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무인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인근 마인들의 시선이 다시 내게 쏠린 게 느껴졌다.
선택을 요구하는 모양.
방금 마차에서 쏟아진 우모침으로 인해, 비교적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싸움이 길어질 것처럼 보였으니.
‘이젠 마냥 기다릴 순 없게 된 것이지.’
하물며.
“비가 오려는 것 같군.”
갑작스레 북쪽 하늘에 나타난 먹구름.
워낙 먼 곳에 있어 이곳까지 비구름이 도착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테지만.
사막에서의 비는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구도자께서 생각하기엔 어떠십니까. 이곳을 뚫고 가야 하는 겁니까, 아님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결정을 내려주십쇼.”
이에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검을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금방 끝날 테니, 기다리시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직접 움직인 뒤 그때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진양상단의 행수 도평희는 창문 밖의 싸움을 보곤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안일했어.’
분명 이 근처에 마적들이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시가 급하다는 이유로 경계를 소홀히 했던 것.
사실 그녀가 소속된 단체에서 그녀의 입지가 날로 쇠약해지고 있던 까닭에 조금 무리수를 던진 감도 없지 않았다.
'다 내 잘못이야.'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인이 말했다.
“아기씨, 마차 아래에 탈출구가 있습니다. 연막을 뿌리고 같이 탈출하시지요.”
방금 말을 한 여인의 정체는 방금 막 바깥으로 우모침을 뿌린 살궁 소속의 무인.
참고로 도평희와 진양상단 또한 살궁 소속이었다.
이에 도평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바깥에선 그녀의 무사들이 마적들과 맞서 분전을 벌이고 있지 않는가.
부족한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고마운 이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부하들을 버리고 빠져나간다는 것이 쉬울 리 만무.
“아기씨, 어쩔 수 없습니다. 대의가 더 중요합니다. 빙궁의 본거지를 어서 빨리 전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눈앞의 살궁 소속 무인의 말에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의 처지이기도 했다.
만약 여기서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말 테니.
그럼 지금 그녀를 위해 희생을 하고 있는 부하들의 분투 또한 헛된 것이 될 터였다.
“그래.”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마차 바닥에 있는 작은 탈출구를 열었다.
딸깍.
그녀를 보고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살궁 소속의 무인이 보였다.
“제가 먼저 나가 길을 트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별안간 등골을 스치고 가는 스산한 기운.
‘이건?’
스산함과 동시에 무척이나 익숙한 기운이었다.
때문에 절로 안심하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과거에도 분명 이런 기운 덕분에 목숨을 건졌던 적이 있던 것···.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비록 선천적으로 내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있어 기감을 느끼거나 할 순 없지만,
기감 못지않게 뛰어난 육감을 가진 그녀였다.
실제로도 그때문에 그나마 진양상단의 행수 자리라도 맡고 있는 것이었고···.
당황한 살궁 소속의 무인을 두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그리고 창밖에는···.
‘역시! 저분은 분명···.’
고급스러운 장포를 걸치고 손에는 묵빛의 검을 든 남자가 마적들을 처단하고 있었다.
산서성에서 내몽고로 건너올 때, 배에서 괴인들을 거뜬히 처단했던 남자.
그래서 굳이 동행을 요구하며 인연을 만들었던 남자.
그가 자신들을 돕고 있었다.
쐐액- 쾅! 쾅!
흡사 파리채를 휘두르듯 검을 휘두르는 남자의 모습.
그런 여상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검엔 가공할 파괴력이 담겨 있었다.
쾅! 쾅!
일격에 한 무리씩 마적들이 나가 떨어졌다.
마적들은 온전히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고깃덩어리와 핏물로 화해 바닥에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굉장하군요.”
다가온 살궁 소속 무인이 말했다.
도평희는 어느덧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손에 땀이 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에서 찔끔 눈물이 나려 하고 있었다.
살궁 소속 무인에게 말했다.
"내가 인연을 만들어둔 인물이다."
"네? 아기씨께서요?"
살궁 소속 무인의 목소리가 대번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래. 아마 우리 상단의 깃발을 보고 도움을 주는 걸 테지."
"그렇군요."
살궁 소속 무인의 목소리에 감탄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에 도평희는 괜히 뿌듯했다.
히이잉-
이후엔 마적들의 말들이 지레 겁을 먹고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순식간에 마적들을 처단했다.
도망치는 놈에겐 비도를 던져 목숨을 끊어냈다.
“···비도술도 대단하군요. 저런 분과 인연을 만드셨을 줄이야.”
도평희는 어깨가 으쓱했다.
“운이좋아 연이 닿았다.”
“···그렇군요.”
내심 간만에 듣는 칭찬에 기분이 이상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쨌든 상황이 정리된 것.
급히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정쩡하게 대치하고 있는 그녀의 호위무사들이 보였다.
다만 그들도 눈앞의 사내의 정체를 알아봤기 때문에.
적대적인 기색은 풍기지 않고 있었다.
도평희는 그런 부하들을 가르고 앞으로 나갔다.
이윽고 말했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대협.”
이에 금태산이 가만히 도평희를 바라봤다.
***
눈앞으로 다가와 태연스레 인사를 건네는 여인을 봤다.
일전에 함께 마차를 탔던 여인.
‘대체 이들은 누구일까.’
사실 평소와 같으면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지 않나.
하물며.
‘마차에 있는 저 흑의인이 아까 암기를 던진 여인인가.’
변수는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만약 저들이 부교주 쪽 인물이라면?
잡아서 심문을 하는 방법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적개심을 표출할 마음은 없었다.
적당히 웃으며 포권을 취해보였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나누고 그들에게 정체를 한 번 더 물었다.
그러나.
“저희 진양상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대협.”
끝까지 발뺌을 하는 그녀.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체를 숨긴다라.’
잠시 어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겁박이라도 해야 할까?
그런데 그때였다.
“도평희 아기씨. 이런 곳에서 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좌호법의 목소리.
이에 깜짝 놀라는 진양상단 무리.
이후 일은 꽤 순조롭게 풀어졌다.
“좌호법은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살궁 궁주님의 수양딸이십니다.”
좌호법의 설명이 이어졌다.
“구도자, 제가 빙궁과 살궁을 방문했던 걸 아실 겁니다.”
실제 그녀는 부교주를 대적하기 위해, 세외 2궁의 협조를 구하러 움직였던 상황.
물론 두 군데 모두 실패를 했다곤 했지만.
움직이기 전에 충분한 조사를 했던 건 당연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여인을 알아본 건 그에 대한 결과.
좌호법은 전면에 나서 자신을 소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내게 전음으로 이런 말도 남겼다.
[구도자, 하오문을 잃은 상황에서 이들을 포섭한다면 분명 큰 힘이 될 겁니다. 이들 또한 정보력이 무척 뛰어나거든요.]
때문에 잠시 좌호법이 하는 모양을 지켜봤고.
꽤나 오랜 대화 끝에.
"···대협, 저희가 빙궁과 원수지간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이곳에 세력을 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파견을 나온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빙궁이라면, 우호법의 부하들인가?'
진학주의 행방에 대한 단서뿐만이 아니라, 그와 접선할 것으로 추정되는 우호법의 행방에 대한 단서 또한 알게 된 것.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란 말이 있지 않는가.
'수상한 놈들인 줄 알았는데, 굴러온 복덩이였던 셈이었군.'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