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깨달음(2)
54화. 깨달음(2)
우선 노인은 천마신교의 신녀가 보낸 게 맞았다.
그는 곧 내게 보따리를 하나 건넨 뒤, 이런 말을 남겼다.
“받으시지요. 저는 동호 인근에서 먼저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겠습니다.”
아마 여기서 말하는 놈들이라 함은 부교주 강불해의 심복이 아닐까 싶었다.
분명 신녀는 동호로 가면 부교주의 심복이 있을 것이란 말을 꺼낸 뒤,
‘연이어 이 몸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물었지.’
그러니 정황상 이게 맞을 터.
빠르게 보따리를 수습한 뒤, 일행에 합류했다.
보따리에는 한 묶음의 서찰과 반쯤 망가진 칼집이 하나 들어있었다.
이후 해가 저물고 모두들 잠이 들었을 무렵.
슬그머니 서찰과 칼집을 꺼내보았다.
서찰엔 당시의 상황과 일을 주동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우선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진 서찰을 빠르게 훑었다.
‘지금 이들 중 상당수가 동호에 있다라.’
동호라 하면, 무림맹 본부가 있는 무한에 위치한 호수.
‘이걸 어떤 식으로 해석하면 좋을까.’
물론 신녀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순 없었다.
다만 하나의 가능성으로 생각할 뿐.
다음으로 당시의 상황이 적힌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 부교주는 금화표국 내외가 지니고 있던 한 쌍의 보검을 탈취하기 위해···.
보검이라.
이 몸에 깃든 기억을 더듬었다.
‘항상 지니고 계셨던 그 검들이 보검이었나.’
분명 두 분은 비슷한 외관의 검을 지니고 계셨었다.
···칼집에 붉은 봉황이 작게 음각되어 있는 검.
잠시 기억 속을 유영하다 이윽고 서찰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노인이 서찰과 함께 보따리에 넣어둔, 반쯤 망가진 칼집을 꺼내들었다.
여기저기 헤지고 망가졌지만, 분명 붉은 봉황이 음각되어 있는 그것.
‘···나름의 증거라고 함께 보낸 것 같군.’
기사(氣絲)를 뽑아 냄새를 확인해본 결과, 위조품은 아닌 것 같았다.
여러 인간군상의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지만, 개중엔 분명 어머니의 것도 있었다.
아까 낮에 소령이 알려준 어머니의 냄새와 정확히 일치했다.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대체 이 검이 무엇이길래.’
그리고 신녀는 이 칼집을 어떻게 구했을까.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고 교차했다.
그때였다.
부스럭-
근처에서 자고 있던 소령이 몸을 뒤척였다.
부스스, 이내 눈을 뜨는 소령.
“···공자님, 안 주무세요?”
일단 노인에게 받은 물건들은 재빨리 다시 보따리 안으로 수습한 상황.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방금 깼어.”
소령은 내 말을 나름대로 이해했다.
“···사실 저도 잠이 잘 안 와요. 오랜만에 호북성으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후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그리고 제갈세가에 초대받았다는 것도 실감이 잘 안 나고요.”
참고로 낮에 다녀간 제갈세가의 무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금태강 국주님과 금태천 표두님께선 미리 와룡장에 도착해 계십니다.”
제갈천소는 나를 귀인으로 모신다는 명목 아래, 금화표국의 가솔들을 전부 초대했다고.
그리고 그 초대 목록엔 당연히 소령도 있었다.
가만히 소령을 보다 말했다.
“오랜만에 금화표국 식구들 보는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네···.”
물론 소령이 잠이 오지 않는 건, 조금 복잡한 이유일 테다.
나긋나긋한 어조로 소령에게 말했다.
“그동안 정체를 감춘 것 때문에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아마 이게 맞을 터.
얼마 전부터 무공을 감추지 않고 펼치기 시작한 소령 아닌가.
그러나 표국 내에서 소령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던 건, 이 몸밖엔 없었다.
이에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푹 숙이는 소령.
“···네.”
몸을 일으켜 소령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이후 소령에게 말했다.
“소령이라면 괜찮을 거야.”
“네?”
분명 이는 소령이 감내해야 할 일이긴 했다.
다만.
“워낙 평판이 좋았잖아. 그리고 피치 못할 사정도 있었고.”
소령이 걱정하는 것만큼, 파급력이 세진 않을지 몰랐다.
“그리고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공자님.”
또 만약 파급력이 세다면 어떠랴.
입술을 오물거리며 울먹이는 소령.
이후 이런저런 말들을 하며 소령을 달래주었다.
도란도란. 여러 이야기들이 모닥불 사이에서 일렁였다.
***
막 동이 터올 이른 아침.
나는 전날 봐둔 적당한 공터로 향했다.
가벼이 아침 운동을 할 계획.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
전란의 먹구름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 아닌가.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의 무위를 갈고닦는 데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은···.
“···공자님, 정말 저도 해요?”
소령도 함께였다.
“앞으론 무공 감추지 않고 쓸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민망해 하는 소령을 잘 다독여주었다.
“그러니 얼른 준비해.”
“준비요? 무슨 준비요?”
“비무 준비.”
“네? 비무요?”
당황하는 소령을 보며 씨익 웃어주었다.
작금의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실전 감각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이게 내 결론이었다.
그녀는 이미 나이가 적지 않고.
근래까지 무공을 놓고 살았다.
그런데 곧 전란이 닥칠 것 같다.
그럼 결국 녹슨 감각을 다시 벼르고.
가진 무공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연구하는 게 나았다.
소령이 쭈뼛쭈뼛 마주 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아, 짐짓 엄포를 놓았다.
“소령아, 제대로 해야 돼.”
“···그치만. 제가 어떻게 공자님을.”
“이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
“공자님을 위한 일이요?”
소령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길래, 내 생각을 말해줬다.
조만간 전란이 올 것 같다고.
그때 내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고.
소령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참 보기 좋았다.
곧 소령이 보법을 밟아왔다.
사아아- 희끗희끗.
보법을 밟으며 소령이 말했다.
“이건. 월묘보(月猫步)라고 하는 거예요.”
구름에 가려진 달처럼 아름다우며 은밀한 보법.
흡사 어두운 밤, 뒷골목을 누비는 고양이의 움직임과도 닮아 있었다.
다만.
‘확실히 정면 승부보단 기습에 특화된 무공이군.’
만약 내가 소령이라면, 이처럼 대놓고 보법을 쓸 것이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을 먼저 유도한 뒤, 기습적으로 보법을 밟았을 테다.
고양이처럼 사뿐 다가온 소령이 정면에서 주먹을 뻗어온다.
휙-
가볍게 상체를 기울여 흘려냈다.
기우뚱, 균형을 잃는 소령.
넘어지지 않게 받아주었다.
“소령아, 다음엔 먼저 상대의 움직임을 확인한 다음에 권법을 뻗어볼래?”
“이, 이렇게요?”
몇 차례 더 반복해준 뒤.
간단한 검법도 확인해주었다.
슉- 슉- 휙!
이후 하오문 무공의 특이성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
“하오문 무공은 정면 공격보단 의외성을 노려야 해.”
“의외성을요?”
“상대의 방심을 먼저 유도한 다음에, 기습적으로 펼치는 게 더 효과적일 거야.”
하오문은 점소이나 기녀로 이루어진 집단.
결국 그들 무공의 오의는 정면공격보단, 기습을 통한 호신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고. 기술을 닦아주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끝내진 않았다.
“비도술도 한번 배워볼래?”
내친김에 알고 있던 비도술도 가르쳐줬다.
의외의 한 수로 매우 유용할 테다.
비도술에 재능이 있는지, 흡수가 꽤나 빨랐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런데요. 공자님은 수련 안 하세요?”
그녀가 미안하단 얼굴로 물어왔다. 자신 때문에 내가 수련을 미루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
“이제 할 거야.”
입가에 호선을 만들며 대답해주었다.
사실 내겐 그녀를 가르치는 것도 일종의 수련이었다.
그녀가 익힌 것들은 하나같이 하오문의 간부들이나 익힐 법한 무공들 아닌가.
전부 상승의 무리를 품고 있었다.
‘···나 또한 잠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테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물론 소령의 말이 아니어도 슬슬 개인적인 수련을 병행할 생각이긴 했다.
얼마 전 얻은 오행의 기운을 활용하는 연습.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근처의 적당한 바위를 찾아 앞으로 다가갔다.
차분히 자세를 잡았다.
어깨넓이로 다리를 벌린 뒤, 오른 발을 한 발짝 뒤로 빼고. 오른손을 갈빗대에 붙였다.
이제 여기서 허리를 비틀며 오른손을 내지르면···.
‘그게 멸화응취.’
오행(五行)의 기운을 움직였다.
천마신기로 만들어낸 화기(火氣)와 적절히 버무렸다.
화르륵-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불꽃이 오른손에 피어올랐다.
활활-
극한의 화기는 흡사 붉은 용의 비늘과 같았다.
곧 화기를 머금은 오른손 위에 영롱한 권기(拳氣)가 덧씌워졌다.
이후 오른발로 그대로 바닥을 밀며, 있는 힘껏 내지르는 정권.
한 마리의 난폭한 용이 되어 바위를 단번에 삼키었다.
화악!
가공할 파공음과 함께 가루가 되어 소멸하는 바위.
동시에 일대에 후끈한 열풍이 몰아쳤다.
화아악-
산새들이 푸드득 날아갔다.
“으악!”
엉덩방아를 찧은 소령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멍하니 이 몸을 보고 있는 소령.
저도 몰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피식-
이후 다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이번엔 2초식 멸화충천(滅火衝天).’
물론 현재로는 내공의 양이 부족해, 그저 심상으로 수련할 뿐.
부지런히 상상했다.
하체에 진기를 도인해, 폭발적인 추진력을 내는 것.
기본적으로 충천은 하늘을 뚫는 걸 의미하지만.
‘이는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도 응용할 수 있겠지.’
멸화응취의 파괴력을 상승시키는 데에 쓰일 수도 있고.
보법을 강화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으며.
멸화응취가 빗나갈 것 같을 때, 공격 지점을 비트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심상만으로 모든 걸 할 순 없었다.
실제 멸화충천은 한 마리의 봉황을 풀어놓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나···.
‘이건 실제로 사용을 해본 뒤에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당장은 어쩔 수 없었던 것.
물론.
‘제갈세가를 다녀오면 어떤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들의 비고엔 온갖 신병이기가 존재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얼마간 무학을 더 정리하다, 다시 여정을 떠나기 위해 일행에게 향했다.
“···공자님, 오늘 감사해요.”
돌아가는 길, 소령이 내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이후 우리는 머지않아, 호북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
제갈세가의 와룡장.
일전에 한 번 와본 적 있는 그곳은 연회가 한창이었다.
‘무림맹과 함께 쳐들어 왔을 때와는 느낌이 또 다르군.’
기관진식 또한 나름의 보강을 거친 것 같았다.
꽤 흥미로웠다.
이윽고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저벅.
이에 제갈세가의 시종으로 보이는 이들이 부리나케 다가와 정중하게 우리를 맞았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의 집에 왔으니, 응당 집주인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러 사람들을 스쳐갔다.
“금태산 표두님! 표두님 덕분에 입이 호강합니다!”
“표두님, 이따 저희와도 한 잔 해주세요!”
표사들이 너스레를 떨어왔다.
웃는 낯으로 한 차례 손을 흔들어 너스레를 받아주었다.
그러던 중, 문득 와룡장 후원에 있는 금태천이 보였다.
제갈세가의 무인들과 검술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는 모양.
그런데.
‘벌써 완숙한 일류에 들어선 건가.’
저번에 줬던 금귀검법에 대한 조언이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금귀검법의 오의는 공격일변도가 아니라, 방어와 역습에 있다는 가르침.
비록 한없이 기본에 가까운 가르침이었으나···.
‘어쩌면 태천이는 살면서 그런 조언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에겐 그걸 가르쳐줄 아버지가 부재하지 않는가.
워낙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금태강은 워낙 바빠 그런 걸 챙겨줄 여유가 없어 보이고···.
괜히 안쓰러웠다.
어쩌면 근래 부모님과 관련하여 신녀에게 받은 정보들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걸지도 모르겠다.
머지않아 와룡장 심처에 위치한 가주실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온갖 도자기가 늘어져있고.
수묵화가 정갈하게 걸려 있는 곳.
“바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시지요.”
말을 마친 시종은 곧 가주실로 발을 들였다.
드르륵-
그 사이,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공자님, 도자기들이 엄청 많아요.”
함께 온 소령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짐짓 웃으며 소령의 말에 화답해주었다.
“그러게. 우리도 선물로 들고 왔어야 하나?”
“네? ···그럼. 어떡하죠?”
“괜찮을 거야.”
막 그런 대화를 나눌 때였다.
문득 구석에 시선을 잡아끄는 족자가 하나 보였으니.
‘···저건.’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족자였다.
헌데. 족자 속의 그림이···.
‘붉은 봉황?’
저도 몰래 마른침이 넘어갔다.
얼마 전 신녀로부터 넘겨받은 칼집에 그려진 모양.
정확히는 어머니의 칼집에 있던 붉은 봉황.
그 봉황과 꼭 닮은 그림이었다.
“소령아, 저 그림 보여?”
“그림이요?”
“어때?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오는 길에 넌지시 소령에게도 칼집에 음각된 붉은 봉황에 대해 물었었다.
아쉽게도 그녀 또한 달리 아는 게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봉황이 어찌 생겼는진, 그녀 또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저건 분명···.”
역시. 소령이 보기에도 같아 보이나 보다.
그러던 그때였다.
“들어오시지요.”
때마침 시종이 다가와 우리를 안내했다.
우린 족자를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그리고 마침내.
“오셨습니까. 편한 곳에 앉으시지요.”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천겸을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