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묘사문(3)
47화. 묘사문(3)
탁자 한쪽 끝에 있는 붉은 빛의 그을림.
‘마교 혈각대에서 쓰는 조법의 흔적이군.’
다만 수준이 그리 높아보이진 않았다.
과거 마교 뇌옥에 갇혀있을 때,
그곳의 무공서도 한 권 읽어본 적이 있어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묘사문의 시비들을 봤다.
벌벌 떨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그들.
“사실대로 고하라.”
그들은 눈시울을 붉힌 채 서로 대답을 떠넘기고 있었다.
결국 가장 나이가 어려보이는 시비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사, 사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냉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시비.
그녀의 반응에 뒤에 있던 다른 시비들이 난리가 났다.
“아,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무림맹에서 오해할 거 아냐!”
“무사님. 그게 아니고요.”
그러던 그때였다.
‘잠깐. 저건 뭐지?’
흐트러진 바닥 깔개의 아래.
얼핏 드러난 하얀색 얼룩.
성큼 그리로 이동해 깔개를 뒤집었다.
휙-
‘···이건.’
상당히 눈에 익은 얼룩이었다.
강시를 만들 때 쓰이는 액체로 인해 생긴 걸로 추정되는 얼룩.
점도는 물론이요, 냄새와 색깔까지 똑같았다.
이에 시비들 중 가장 언니로 보이는 여인이 부리나케 입을 열었다.
“저,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무얼 모른다는 것일까.
그녀의 말에 다른 시비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오히려 더 의심스럽군.’
이후 이런저런 변명을 하며 횡설수설하는 그들.
“한 명씩 말해라.”
결국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시비가 대표로 말했다.
“저희도 문파 내에 마인이 잠입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저희도 피해자예요.”
이후 그녀는 몇 마디 말을 더 보탰다.
눈앞의 이것들이 마교의 흔적임은 인정을 하되,
그와 별개로 자신들은 마교의 협력자가 아님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과연 이걸 온전히 믿어야 할까.’
그때 문득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던 나이 어린 시비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그녀.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말해봐라.”
이윽고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온갖 눈총.
나는 엄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봤다.
“전부 연행되고 싶은 것이냐.”
일종의 엄포였다.
나라고 이들을 즉석에서 연행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런 식의 엄포가 필요해 보였다.
‘어차피 이들은 내가 무림맹을 대표하여 온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나이 어린 시비는 곧 딸꾹질을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엄한 목소리로 그녀를 압박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네? 네. 딸꾹.”
“저 하얀 액체는 뭐지?”
그녀는 곧 벌벌 떨며 말했다.
“그, 그건 저도 몰라요. 그저 장로님들이···.”
순간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가리는 시비.
다른 시비들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더라.
이에 다시 그 나이 어린 시비를 채근했다.
“장로? 있는 그대로 말해보아라. 괜히 감췄다 나중에 들통 나면 더욱 큰 곤혹을 치르게 될 테니.”
시비들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이내 그녀들의 입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랬던 거군.’
마침내 대략의 상황이 파악됐다.
그녀들에게 들은 정보는 이랬다.
이곳 묘사문의 몇몇 장로들이 몰래 마교와 결탁을 하고 있었다는 것.
대략 하오문의 상황과도 비슷해보였다.
다만 하오문과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묘사문은 문주보다 장로들의 권한이 더 강한 곳이었군.’
그런 까닭에 문주를 배제하고 일을 진행했던 것.
물론 그럼에도 이들이 필사적으로 단서를 감추려 했던 건, 이러나저러나 문파의 핵심관계자가 마교와 엮인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이들 또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런 것이라는 의미.
이후 몇 가지 정보를 더 물었다.
“허면 마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저, 저희도 잘은 몰라요. 새벽에 여기 있던 항아리들이랑 같이 사라지셨어요.”
“항아리?”
“네. 아까 물어보신 하얀 액체들이 들어 있던 항아리요.”
“그랬군. 헌데. 항아리는 왜 문주실에 보관하고 있던 것이지?”
“그게. 장로님들께서 엄청 중요한 거라고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 한다고 하셔서···.”
깔개 밑에 흔적이 남은 건, 아마 그들이 대피를 하다 실수로 흘린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무림맹이 이곳에 도착한 걸 알고 부랴부랴 움직이다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탁자에 마공의 흔적이 남아 있던데, 그건 무엇 때문이냐.”
“마, 마공이요? 장로님들이 탈출을 시도할 때, 문주님과 마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아마 그때 몸싸움을 벌인 모양.
대략의 상황이 짐작됐다.
이후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그들이 마인인 건 오늘 처음 알게 된 것이냐?”
“아니요. 한 이틀 정도 전에? 그쯤 알게 됐어요. 사실 저희더러 같이 마교에 투신하자고 하셨거든요.”
어쨌든 결론은 이곳에 남은 이들은 마인들의 제안을 거절한 이들이란 말이었다.
이들의 죄라면, 이런 사실을 감추려 했다는 것 정도?
‘마공을 익힌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건 그런 이유였군.’
정황이 딱딱 들어맞았다.
이후 문주실을 나왔다.
이 이상 심문을 진행하기 보단, 향후 대책을 구상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해보였기 때문.
‘놈들이 새벽에 출발한 거라면, 잘하면 따라잡을 수도 있을 테고.’
우리 일행 중엔 추격술에 능한 자가 두 명이나 있지 않는가.
백미려와 소령.
물론 소령은 대외적으로 아직 본인이 추격술을 쓸 수 있다는 걸 감추고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마침 소령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표정이 어둡지 않은 걸로 보아, 저쪽도 목표를 이룬 모양.
저쪽은 숙수의 아이를 찾고 있지 않았는가.
아니나 다를까.
곧 소령이 말했다.
“공자님, 찾았어요.”
“그래?”
“네! 묘사문 소문주와 함께 회복실에 잠들어 있더라고요.”
“소문주와 함께?”
“네!”
다만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소문주와 함께 잠들어 있다니.
절로 고개가 갸웃했다.
일단 광현과 백미려도 그곳에 있다고 하니, 소령의 안내를 따라 회복실로 향했다.
***
“···허허. 달리 무공도 배우지 않았는데, 이곳 소문주와 호각을 이뤘다는 것 같네.”
도착하자마자 광현이 내게 건넨 말이었다.
광현과 일행은 이곳 회복실을 담당하던 문도들에게 사정을 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듣기론 아버지에 대한 모욕을 못 견뎌, 이곳에 찾아왔다가 결국 소문주와 싸움을 했다지.’
둘이 같이 누워 있는 건, 묘사문 소문주 또한 상당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그러고 보니 확실히 숙수의 아들이란 아이는 기골이 범인들보다 장대해보였다.
어쨌든 보다 자세한 사정은 추후에 다시 듣기로 했다.
‘상황을 보니, 강제로 납치되어 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이에 대한 걱정은 지금 당장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지금은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문주실에서 제가 알아낸 바가 있습니다.”
묘사문과 마교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해야 했다.
진중한 어조로 방금 전 시비들을 통해 알아낸 정보를 하나둘 풀어놨다.
“···해서. 당장 놈들의 흔적을 따라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백미려가 대꾸했다.
“방금 하신 말씀은 새벽에 도주한 마인들을 우리끼리 추격하자는 말씀이신지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습니다. 무림맹에 알린 뒤 함께 움직이면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하여 루주께서 추격술을 발휘해주셔야 할 겁니다.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녀 또한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야지요. 다만 워낙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흔적에 교란이 있을 순 있습니다.”
“교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적들 또한 흔적을 지우면서 움직였을 것 아닙니까. 하물며 시간 또한 상당히 흘렀으니, 진짜 흔적과 가짜 흔적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선택의 갈림길을 마주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보통 하오문에서는 이런 경우에 최소 둘 이상이 함께 움직이는 걸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갈림길을 만났을 때 굳이 선택을 할 필요 없이 두 군데 전부 조사할 수 있도록.
다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고.
결국 인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에 슬쩍 소령의 눈치를 살폈다.
‘최소 두 명이라. 그럼 소령까지 합치면 둘이니···.’
사실 이곳에 오는 길에 소령과 나눈 이야기가 있었다.
문주실에서 얻어낸 정보들을 빠르게 요약해준 뒤.
“소령, 오랜만에 추격술을 사용할 수 있어?” 라는 말을 건넸었다.
그때 소령은 “그럼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을 했었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고 했다.
백미려의 앞에서 자신이 직접 추격술을 사용할 줄 안다고 밝히고 싶다고 했다.
그녀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선 밝히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소령은 앙증맞은 입술을 벌렸다 다물었다 반복하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막 소령이 목소리를 내려고 할 때였다.
백미려가 별안간 나를 보며 말했다.
“하여.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말입니까.”
말을 하며 슬쩍 소령을 봤다.
때를 놓친 소령은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타까운 감정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래도 일단, 백미려와의 대화는 계속 이어가야 할 테니.’
그래서 물었다.
“말씀해보시지요.”
잠시 입맛을 다신 백미려가 곧 말을 이었다.
“표두님의 시비도 이번 일에 도움을 줬으면 합니다.”
순간 저도 몰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령 또한 마찬가지.
광현만 이게 뭔 소린가 하고 있었다.
이내 백미려의 씁쓰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 아이도 추격술을 쓸 줄 알지 않습니까. 상황이 상황이니···.”
말을 하는 백미려의 목소리엔 언뜻 습기가 묻어 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연신 옅은 날숨이 뱉어져 나왔다.
***
우리는 곧장 묘사문을 벗어났다.
소령과 백미려는 이후 별다른 통성명이 없었다.
둘 모두 이처럼 긴박한 상황 속에선, 그간의 세월을 풀어내기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저 담담하게 서로 협력을 하고 있을 뿐.
“제가 이쪽을 찾아볼게요.”
“그래. 그럼 내가 저쪽을 맡으마.”
‘보기 좋네.’
문득 출발하기 직전,
소령이 없는 자리에서 백미려와 나눈 짧은 대화를 떠올렸다.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습니다.”
어찌 모를 수 있느냐 하더라.
딸같이 생각했던 아이라고 했다.
다만 소령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기다리고 있었다고···.
“소미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섬세한 아이였거든요.”
“···소미라. 소령의 원래 이름이 소미였습니까.”
백미려의 눈가가 촉촉했었다.
이에 나는 이런 말을 건넸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제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이후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어느덧 소령은 보라색 내공의 실을 길쭉하게 뽑아 하늘에 흩뿌리고 있었다.
하늘하늘.
백미려도 가느다란 분홍색 내공의 실을 뽑아 소령의 보라색 실과 조화를 맞추고 있었다.
흡사 보라색과 분홍색으로 짜인 그물과 같았다.
듣기로 하오문 추격술의 핵심은 이처럼 내공으로 뽑는 실이라 했다.
저걸 통해 대상의 냄새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나도 저건 잘하면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색하진 않았다.
이 밖에도 신기한 광경들을 숱하게 보았다.
‘상당히 아름답군.’
하오문 추격술은 예술 그 자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이 호흡이 척척 맞네.’
꼭 모녀지간처럼 보일 정도.
이처럼 둘의 호흡이 척척 맞았기 때문일까.
우리는 머지않아, 관도 위에서 한 무리의 행렬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암표국(現巖镖局)?’
그곳에 마인들이 숨어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