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보옥(1)
42화. 보옥(1)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가공할 마기.
‘···강불해가 온 건가.’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직 거리가 멀어 명확히 파악되진 않지만.
분명 납치되어 있던 도사들이 그러지 않았나.
이곳 수로채는 강불해의 손에 떨어져 있다고.
‘어찌 하면 좋을까.’
아무리 근래 강해졌다곤 하나,
아직 그를 상대하기엔 턱도 없었다.
그러니 도주가 최선.
그러나 도주가 쉬울 리는 만무했다.
더욱이 이곳은 외딴 섬이 아닌가.
그런데 그때였다.
‘뭐지?’
순간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강불해의 마기라고 하기엔 무언가 음침한 기운이 섞여 있는 듯했다.
끈적끈적하고 농밀한 느낌.
일단 보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두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란 말도 있지 않나.
진법을 설치해 벽을 투시했다.
기운이 느껴지는 선착장 쪽을 주시했다.
와글와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마인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화려한 옷차림의···.
‘여인?’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도사가 말했다.
“대, 대단하군. 이런 식으로 진법을 사용할 줄이야.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그의 기감엔 아직 저 여인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말을 받았다.
“종남산에서 배웠습니다.”
대답을 하며 계속 적을 주시했다.
‘···강불해 대신 색골음마가 온 건가.’
그런 것 같았다.
마교의 좌호법 색골음마.
숱하게 이야기는 들었으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외형에 대한 묘사가 꼭 저랬다.
외모는 방년의 여인과 같으며.
한 손에 새까만 부채를 들고 다니고.
머리엔 꼭 뼈를 연상케 하는 뽀얀 비녀를 꽂고 다닌다고.
그리고 두르고 있는 옷은 핏물을 연상케 한다고.
‘다만 부교주와 좌호법은 앙숙지간일 텐데.’
곧 도사 또한 결국 여인을 발견한 것인지.
깜짝 놀라더라.
다만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이런 말을 건네왔다.
어쩌면 자중지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
실제로 색골음마는 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강불해의 부하들을 하나둘 공격하고 있긴 했다.
그러나 저걸 두고 자중지란이라고 하기에는··· 글쎄?
‘색골음마도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군.’
아마 강불해와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기 때문일 터.
하물며 강불해의 부하들도 그녀의 공격에 달리 반격을 하거나 하진 않고 있었다.
자중지란은 그저 희망사항일 듯했다.
그러니···.
‘그녀 나름대로 무언가 목적이 있어 온 것일 테지.’
그리고 그 목적이라 함은 뻔했다.
지금 이곳에 그녀가 노릴 만한 것은 내 옆에 있는 도인뿐.
대략 상황을 보면 그랬다.
‘둘이 경쟁적으로 보옥, 정확히는 향로를 찾고 있으니.’
이 노인을 빼돌릴 생각일 듯.
하여 계획을 수립했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을 말인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봤다.
곧 동이 터올 것 같은 하늘.
“아마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무림맹에서 원군이 올 겁니다.”
권사얼이 맹주를 비롯한 아군을 데리고 올 터.
맹주라면 충분히 마교의 좌호법을 상대할 수 있었다.
아니 도리어.
‘놈을 처리할 수도 있을 테지.’
그럼 마교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테다.
그럼 전화위복이리라.
물론 그러려면 아까도 말했듯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이윽고 도사에게 말했다.
“잠시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
“허허. 옷이 상당히 어색하군.”
도사가 새까만 흑의를 걸치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본디 도사의 것이었던 도복을 입으며 답했다.
“그런 웃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아까 그 마인이 그랬던 것처럼 행동해주시지요.”
도사를 마인으로 변장시키고. 내가 도사로 변장을 하는 것.
이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시간을 끌기 위해선 내가 도인인 척 행동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소한 놈은 무턱대고 도사를 죽이진 않을 테니까.’
향로의 행방을 찾기 위해선 그럴 게 분명했다.
그러니 발악을 하며 시간을 끌기엔 도사의 모습이 보다 유용할 터였다.
“그보다 도사님 도명이 어찌 되십니까.”
“광현일세.”
“알겠습니다. 광현. 지금부턴 제가 광현입니다. 그러니 도사님은 저를 심문하는 척해주시지요.”
“심문 말인가.”
“여차하면 저를 고문하시면 됩니다.”
“고, 고문?”
“마인이 도사님께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후 고문실 곳곳에 진법을 설치했다.
최후엔 좌호법과 싸움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사용할 수 있는 수는 모두 동원하는 것이 맞았다.
마침 고문실에 산공독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어 그 또한 함정처럼 설치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좌호법이 들이닥쳤다.
좌호법 색골음마.
그녀가 새빨간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네가 놈이냐?”
“허허. 누굴 말하는 건가.”
나는 여유로운 척 대답했다.
곧 좌호법이 미간에 골을 만들며 말했다.
“···헌데. 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보다 목과 가까이 가져다 대며 답했다.
“무얼 하는 걸로 보이는가.”
“글쎄. 자결?”
“정확히 보았다.”
이에 도사 광현이 계획대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그만.”
광현의 연기 또한 꽤 훌륭했다.
‘좋아.’
내 판단은 이랬다.
그녀의 입장에선 내가 죽는 것은 꼭 피해야 할 터.
하여 목에 칼을 대고.
근처에 있던 온갖 고문도구들을 이용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게 해뒀다.
그러면 일단 이 몸을 설득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었다.
좌호법이 말했다.
“발칙하구나.”
“마교에 이용당할 바엔 죽는 게 낫지 않겠나.”
헌데.
‘왜 웃는 거지?’
좌호법의 반응이 예상과 조금 달랐다.
그녀의 새빨간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후 그녀가 말했다.
“그럼 죽어라.”
“···?”
“마침 잘됐구나. 어차피 나는 너를 죽이려 했으니. 다만 내가 직접 죽이면 강불해에게 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 고민을 했었는데. 스스로 죽어준다면 나야 고맙지.”
적잖이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놈은 향로의 행방이 궁금하지 않은 건가?’
내가 잠시 망설이자, 놈이 말했다.
“왜 그러느냐. 혹 죽는 게 겁이 나느냐?”
그러며 한 발짝 한 발짝 내게 다가오는 그녀.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너 또한 향로의 행방을 모르지 않느냐.”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일단 담담한 척 놈에게 말했다.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리 믿어라.”
여기서 뒤로 물러나면 저 말을 시인하는 꼴이니.
또르르-
목에 댄 칼을 타고 핏방울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았다.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강불해 그 멍청이와 다르거든. 너희 도관에서 일하던 숙수가 그러더구나. 이미 빼돌렸다고.”
대체 그 숙수는 어떻게 포섭했을까.
물론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 이상 그녀의 접근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 됐다.
자칫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
‘어쩔 수 없나?’
하여 곧 선기를 움직여 미리 만들어둔 진법 중 하나를 발동했다.
슈우욱-
순간 그녀의 몸 주위로 솟아오르는 무형의 막들.
그 막들이 그녀와 주변을 마구 반사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마구 뒤틀리고 깨져나갔다.
내 계획은 이랬다.
이후 그녀가 진법을 깨뜨리기 위해, 외부로 기파를 발출하는 틈에 한 방 먹이는 것.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헌데 이번에도 그녀의 반응이 이상했다.
다시 한 번 진한 웃음을 보이는 그녀.
“흥미롭군.”
하라는 기파 발출은 하지 않고.
그저 진법에 감탄을 한 모양새였다.
그녀가 말했다.
“이런 진법을 쓸 수 있다라.”
잠시 손가락으로 입술을 훔치는 그녀.
곧 진법을 무시한 채 곧장 이 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 해보아라.”
나름 진법에 조예가 있는 모양.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설치한 진법을 완전히 꿰뚫어본 건 아닌지, 조금 두리번거리긴 했다.
그럼에도 낭패는 낭패였다.
이후 그녀가 새까만 부채를 휘둘렀다.
사방을 점하는 새까만 광채.
반사적으로 보법을 밟았다.
슈욱- 쾅!
“처음 보는 보법이구나.”
이후 횡으로 그어오는 부채를 검으로 막았다.
챙!
그녀의 얼굴에 점점 놀라움이 번지더라.
“이것도 반응해보아라.”
연속되는 그녀의 공격.
이번엔 목젖을 향해 찔러온다.
상체를 뒤로 젖히며 검으로 아슬아슬하게 걷어냈다.
겉보기엔 단순한 부채인 것 같으나, 그 무게가 상당했다.
그렇게 몇 차례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을까.
워낙 강맹한 공격들이었던 탓에, 달리 생각을 하며 방어할 수 없었다.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움직일 뿐.
그리고 그러다 보니.
“대단하구나. 대단해. 종남파의 보법과 남궁세가의 검법이라.”
저도 몰래 종남파에서 보아온 무공이나, 남궁벽과 함께 다니며 눈대중으로 익힌 검법도 조금씩 섞여들었나 보다.
그녀가 별안간 공격을 멈추더니 섬뜩하게 웃어댔다.
“신기하군. 대체 너 정체가 뭐지?”
그 이후에도 그녀는 몇 번 더 공격을 했다.
다만 그녀는 부채에 달리 내공을 싣지 않았다.
또한 투로 또한 복잡하지 않았다.
그저 내리치고 찌르고.
‘꼭 이 몸을 시험하는 것 같군.’
그럼에도 수준의 차이가 상당하여 막아내기 급급했지만···.
그때 번뜩이는 생각.
‘그래도 희망은 있어.’
이처럼 계속 방심을 한다면 분명 기회가 올 테니.
내겐 순식간에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아수라파천권과 보옥이 있지 않나.
물론 서두르진 않았다.
일부러 더욱 다양한 무공을 보여줬다.
그녀가 유희를 즐긴다면, 거기에 어울려준 것.
그녀가 부채를 휘두르다 말했다.
“교에 입적할 생각은 없느냐?”
꽤 당황스런 물음이었다.
옆으로 크게 한 발 물러서며 답했다.
“교?”
뺨을 스치고 가는 날카로운 바람.
마룻바닥이 깨지고 나뭇조각들이 비산했다.
“그래. 그냥 죽이기엔 너무 아쉬운 재능이라.”
비산한 나뭇조각이 뺨에 생체기를 냈다.
문득 예전에 색골음마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기면 교에 입적시킨다고 했다.
그런 뒤 한껏 어울리다, 싫증이 나면···.
‘채양보음이란 그녀의 독문 무공을 통해 양기를 전부 흡수해버리고 죽여 버린다고 했지.’
내색하지 않았다.
적당히 혹하는 척,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 이후 그녀가 그러더라.
딱 10년.
아니 길면 15년.
그 정도 시간만 있으면 중원이 자신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녀는 곧 천기가 누설되었다고 했다.
달리 비밀도 아니니 말해주겠다고 했다.
남쪽에 역태극이 떠올랐고.
북쪽엔 역천성이 떠올랐다고.
이는 천인(天人)이 곧 세상에 나타나리란 징조라 했다.
이에 물었다.
“다들 천인, 천인. 노래를 부르더군. 그게 뭐지?”
곧 그녀가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인은 곧 세상 만물을 이해할 수 있는 자를 일컫지.”
교리에 따르면 그가 천마신교에게 중원을 선물할 것이라 했다.
마신을 강림시킬 것이라나?
그런데 그때였다.
얼마나 더 대화를 나눴을까.
갑작스레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
동시에 직감할 수 있었다.
‘놈의 기감에 무림맹이 걸렸나 보군.’
아마 그런 것 같다.
나보단 훨씬 강한 그녀이니···.
역시나 때마침 손을 내미는 그녀.
“어서 함께 가자꾸나.”
그녀의 말이 내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조금 고민해보면 안 되겠나."
"흥. 안 된다."
이게 마지막 물음이리라.
당연히 나는 그녀를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그녀를 따라가면, 전생의 삶을 반복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이상 대화로 시간을 끄는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니···.
'싸워야겠지.'
무림맹이 도착할 때까지.
실제 내 기감에도 어렴풋이 정파의 그것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벌면 돼.’
더욱이 놈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는 지금.
지금이 놈에게 드러난 유일한 빈틈으로 보였다.
"좋다."
손을 뻗는 척, 속으로 아수라파천권의 구결을 외웠다.
동시에 품에 있는 보옥 속 오행의 기운을 포식했다.
콰드득- 콰드득-
그 모든 기운을 오른 주먹에 집중했다.
마침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며 말했다.
“대신.”
곧 오른발로 진각을 밟고.
있는 힘껏 오른 주먹을 뻗어냈다.
“목적지는 무림맹이 어떻겠나.”
아수라파천권 멸화응취.
阿修羅破天拳 滅火凝聚.
지옥의 겁화가 한 마리의 용처럼 일렁였다.
워낙 강맹한 기운인 탓에, 나 또한 주체할 수 없을 정도.
찰나가 영원과 같았다.
그리고 그때.
“고얀 것.”
넘실거리는 화기 속에서 그녀 또한 부채를 뻗어왔다.
급소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주먹을 뻗었다.
동시에 선기를 발출해, 근처에 설치해둔 모든 진법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다가온 일촉즉발의 순간···.
쾅! 쨍그랑.
고문실 내부에 가공할 폭발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