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남궁세가(1)
37화. 남궁세가(1)
오행의 기운을 담은 보옥.
그걸 구렁이처럼 휘어 감는 천마신기.
비록 한시적일지언정,
전신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수(水) 목(木) 화(火) 금(金) 토(土).
제각각 개성을 가진 기운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동시에 아수라파천권 멸화응취(滅火凝聚).
세상을 심판하는 지옥의 불길을 양 주먹에 휘둘렀다.
화르륵-
목(木)과 화(火)의 기운이 몸속의 화기(火氣)를 북돋았고.
금(金)과 토(土)의 기운은 화기를 두른 주먹에 무게를 더했다.
수(水)의 기운은 체액이 마르지 않게, 전신 혈관을 끌어안았다.
원래라면 오른손과 왼손 중 딱 한 군데에.
단 한 번의 불길만 응집시킬 수 있을 터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보옥과 깨달음 덕분에, 몇 번이고 불길을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내 지옥의 겁화가 내게 묻는다.
자신이 심판해야 하는 적이 누구냐고.
주변에 잔잔한 미풍이 불기 시작했다.
널린 나뭇잎들이 산들산들 춤을 추며 공중으로 치솟는다.
나뭇잎들이 불길에게 고자질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십의 적들을 심판하라고.
활시위를 당긴 적들 사이로 적잖이 소요가 일어났다.
적장으로 보이는 놈이 부하들을 다그치더라.
그런 놈들을 보며, 생각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원랜 화살이 시위를 떠나기 전에 황급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는 확신에서 비롯된 자신감.
천천히 움직여도 충분했다.
슈슈슈슉-
수십의 화살이 허공에 떠올랐다.
하늘을 메우는 촘촘한 화살촉.
오른쪽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마찬가지로 오른 주먹을 아래로 당겨, 한 자루의 쇠뇌처럼 팽팽하게 근육을 조였다.
이윽고 쏟아지는 화살들.
그것들을 향해, 굽힌 무릎을 펴며, 오른손 정권을 내질렀다.
후웅!
일대를 휩쓰는 권풍(拳風).
흡사 용오름과 같았다.
붉은 기운이 포악하게 공중을 휘감았다.
수십의 화살촉들이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흔들린다.
와들와들.
저들끼리 부딪치며 힘을 잃더라.
전혀 엉뚱한 곳에 떨어지는 적들의 화살.
그리고 그 화살들이 미처 바닥에 닿기 전.
나는 이미 적들 사이에 있었다.
“으악!”
“살려줘!”
왼손으로 두 번째 정권을 내질렀다.
화르륵-
곧 이어진 세 번째 정권.
화륵!
네 번째까지.
종횡무진.
아니 종횡할 필요도 없었다.
주먹질 한 번이면, 십여 명이 낙엽처럼 날아가니.
지옥의 겁화는 곧 강물처럼 범람했고.
쏟아진 강물이 한 번에 천리를 가듯.
나는 조금의 거침도 없이 적들을 휩쓸었다.
잠깐의 소요가 지나가고.
‘끝났군.’
고개를 돌려, 기녀들에게 말했다.
이제 안심하라고.
그러니 이제 움직이자고.
목적지는 남궁세가.
이에 그녀들은 넋을 잃고 고개만 끄덕이더라.
***
막 남궁세가로 발길을 옮기려 할 때였다.
해진이란 기녀가 물어왔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벌벌 떨며 내 양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더라.
나 또한 시선을 옮겨, 멸화응취를 펼친 두 주먹을 봤다.
아수라파천권의 반동으로 인해, 하얗게 뼈가 드러난 왼손과 오른손.
아무래도 워낙 강맹한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본디 이 몸이 지닌 힘만이 아니라, 보옥 속에 있던 오행의 기운까지 사용하지 않았나.
물론 당장 움직이거나 검을 휘두르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환골탈태와 일단동체, 요상결의 효능이 있는 금귀방탄공의 조화 덕분.
다만 워낙 상처가 심한 까닭에 회복 속도가 평소보다 배는 느려진 것일 뿐.
나는 적당히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때였다.
우르르르-
우리가 넘어온 기관진식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들.
황정기루 1층에 있던 적들이 기관진식의 출입구가 있는 지하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걸음을 옮겨 그리로 갔다.
기녀들의 시선이 하나둘 망가진 내 양 손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아마 걱정이 되는 것이리라.
과연 저런 손으로 적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혹은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
물론 당장 내가 하려는 행동을 알았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테다.
빠르게 기관진식을 둘러봤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일방통행만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관진식.
그걸 구성하고 있는 부속품들과 오행의 기운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방금 거대한 오행의 기운을 몸소 받아낸 덕분인지, 평소보다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도 같았다.
끼기긱-
부속품들의 위치를 몇 개 바꾸고.
오행의 기운을 역천(逆天)을 향하게 뒤틀었다.
간단하게 문을 폐쇄해버린 것.
탁탁 손을 털며 몸을 돌렸다.
이윽고 기관진식 앞에 도착한 적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뭐야! 이리로 나갈 수 있다며!”
“여기 문 맞아?”
우리는 이후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
해가 저물고 달이 차오를 무렵.
허름한 관제묘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밤은 여기서 야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기녀들이 하나둘 자리에 주저앉았다.
워낙 강행군이었던 까닭에 각자 신발을 벗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피곤함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기녀들도 있었다.
적당히 끼니를 해결하고 관제묘를 나왔다.
미리 봐둔 공터에 도착했다.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아까 그 보옥을 꺼내들었다.
거의 모든 오행의 기운을 소진했을 보옥.
그러나 어느덧.
‘···자체적으로 주변의 기운을 끌어들이고 있는 건가.’
미약하나마 기운을 회복한 것 같았다.
비록 이전의 강맹한 기운을 되찾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만.
‘신기하군.’
잠시 그 원리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이내 다시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보물은 보물이었다.
차오른 달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몸 좀 풀어볼까.’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은 이것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싸움을 복기하기 위함.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오행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느꼈던 감각들을 상기했다.
폭발적인 멸화응취.
내공 없이 재차 그때의 움직임을 재현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적들의 무위가 보다 강맹했다면 어땠을까.’
당시 적들은 내 주먹에 어떠한 반격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들 개개인의 무위가 훨씬 더 뛰어났다면?
그래서 내 주먹에 마주 검을 내지르거나.
나름의 호신공으로 몸을 방어했다면?
‘과연 이 몸의 주먹이 그때도 버틸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외공이라도 익혀야 하는 건가.’
어쩌면 원래 아수라파천권은 외공과 함께 익혀야 하는 무공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당시 강불해에게 전달받은 무공서들 중엔 특별한 외공서가 없었으니.
기회를 봐서 이에 대한 방법을 궁리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아수라파천권 2초식도···.’
아수라파천권 2초식 멸화충천(滅火衝天).
이 또한 오늘 보옥 속 오행의 기운을 흡수하며 가능성을 봤다.
비록 아직까지 이 몸이 보유한 내공은 멸화충천을 사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만약 보옥과 같은 물건을 더 구할 수 있다면?
‘그러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 정리를 마친 뒤, 관제묘로 돌아왔다.
어느덧 주변에선 풀벌레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 잠이 든 모양.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으으.”
헌데 한쪽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것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백미려?’
루주 백미려였다.
혹 몸이라도 상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보다 가까이 다가갈 때였다.
근처에 있던 기녀 중 하나가 상체를 일으킨 뒤 고개를 저었다.
해진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으니, 잠시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이후 해진이 달빛을 보며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아마 악몽을 꾸시는 걸 거예요.”
“악몽 말입니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백미려는 본부로 간 기녀들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후부터.
매일같이 악몽을 꾸고 있다고.
“처음엔 저희도 걱정이 되어서 깨웠었는데. 오히려 역효과더라고요.”
중간에 잠에서 깨면 날이 밝을 때까지 다시 잠을 청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베갯잇에 눈물을 적신다 하더라.
그러며 전에 있었던 무례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하는 그녀.
“그래서 그런지, 근래엔 판단도 조금 흐려지신 것 같아요. 아마 그래서 그랬을 거예요. 죄송해요.”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이후 몇 마디 말을 더 나눴다.
듣기론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고 한다.
그때도 루주는 상당히 오랫동안 힘들어했다고 했다.
그러다 그 아픔에서 이제 좀 헤어 나오나 싶을 무렵, 이번 일이 일어난 거라고 했다.
“···루주님이 딸처럼 생각하던 아이가 있었는데, 문주님에 의해 죽임을 당했거든요.”
“그랬군요.”
물론 당시엔 진학주가 막 문주 자리에 취임한 상태라, 나름의 명분이 있는 숙청이었다고 한다.
하여 그녀는 당시 그저 속앓이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녀에겐 그 아이 말고도 많은 식솔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으니까.
‘잠깐.’
그때였다.
순간 그녀의 말과 내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사건이 하나 겹쳐갔다.
‘···설마.’
소령에게 들었던 그녀의 과거사들.
넌지시 해진에게 당시의 상황을 캐물었다.
이후 해진은 넉두리하듯 대답했다.
시간이 흘러 해진은 다시 관제묘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결코 새지 않는다는 말.
이 또한 인연인가 싶었다.
무림맹에 돌아가면 소령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잠시 관제묘 근처를 한 바퀴 배회했다.
차오른 달빛이 꽤나 촘촘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날이 밝았고.
우리는 다시 남궁세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안휘성의 합비.
그곳에 대(大) 남궁세가가 있다.
현 무림맹주인 남궁벽의 가문이자.
오대세가의 수좌를 차지하는 가문.
‘웅장하군.’
멀리서 바라본 남궁세가의 장원은 실로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일견 무림맹과도 그 규모가 비교될 정도.
고개를 돌려 백미려를 봤다.
초췌한 얼굴의 그녀.
괜히 안쓰러웠다.
물론 그와 별개로 물어야 할 건 물어야 했다.
“이대로 정문을 통과하면 되는 겁니까.”
이제 거의 다 도착했는데, 어찌하면 좋을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무림맹 대신 남궁세가를 택한 그녀 아닌가.
비록 거리상 남궁세가가 더 가까웠다곤 하나.
그래도 남궁세가에 인연이 있지 않다면, 쉬이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녀는 곧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라.
입구까지만 도착을 하면, 자신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한다.
하여 남궁세가의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문득 멀리서 문지기가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잠시 대기하라는 듯한 수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해진의 물음이었다.
끼이익-
순간 남궁세가의 거대한 대문이 열렸다.
동시에 한 무리의 말을 탄 무사들이 그곳을 나왔다.
다그닥. 다그닥.
먼지 구름을 만들며 이곳으로 향하는 그들.
고개를 돌려, 백미려를 봤다.
헌데 백미려도 이 일은 짐작하지 못한 모양.
이윽고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우리를 지나쳐갔다.
아마 우리와는 별개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꽤나 다급해보이는군.’
한 차례 어깨를 으쓱였다.
곧 다시 걸음을 옮겨, 정문으로 향했고.
앞으로 나선 백미려가 문지기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이후 반신반의하던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더라.
대략 일 다경쯤 지났을까.
다시 돌아온 문지기가 우리를 향해 희희낙락한 얼굴로 말했다.
“귀인이셨군요. 정중히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반면 백미려의 얼굴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이후 우리는 대문 안으로 발길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