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하오문(3)
36화. 하오문(3)
하오문 제남지부 루주 백미려.
매화를 닮은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솔직히 믿기 어려우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본인을 표물로 맡긴 다는 건, 본인들의 목숨을 구해달라는 거였군.'
동시에 방금 전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얼마 전. 백미려는 하오문의 문주 철면야탑 진학주를 향해, 수상한 의심을 하나 품게 되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진학주의 부름을 받고 본부를 다녀온 무인들이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했던 것 때문이라고 했지.’
더욱이 본부로 올라간 기녀들도 하나둘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내기 시작한 것.
수십 년을 하오문에서 일했지만,
여태 이런 일은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던 터라, 처음엔 상당히 당황했다고 한다.
혹여 자신이 지부를 운영함에 있어, 큰 실수라도 한 것은 아닐까.
하여 식구들의 신임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이 자신과 연을 끊거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을 정도.
그러나.
“우연히 본부을 방문한 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시죠.”
“알겠습니다. 우선···.”
본부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제남지부의 기녀들이 흔적도 보이지 않았던 것.
하여 평소 친하게 지내던 다른 지부의 루주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전달했더니.
“그들 중 몇몇 또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더군요. 덕분에 의심은 점점 짙어져갔고. 이후 나름의 수를 동원해 진학주의 뒤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를 한 것 같다고 했지.’
그녀의 얼굴 위로 무거운 그림자가 내렸다.
“제가 피아식별을 제대로 못했던 것 같습니다.”
추후 알고 보니, 그녀의 편이라 믿었던 사람 중 하나가 진학주의 사람이었던 것.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하오문 제남지부 인근에 진학주가 보낸 사람들이 쫙 깔려 있었던 것.
“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적린휘성께서 이리로 향하고 계시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겁니다.”
그 이후는 방금 전에 이 몸이 겪은 그대로였다.
“저희로서는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여 그런 무례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백미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반드시 살아남아 진학주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는 책임감.
그녀가 아니라면, 진학주를 막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허나 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 이처럼 줄다리기를 했다는 것.
“생판 모르는 저희를 위해, 하오문 문주와 척을 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그녀의 낯빛이 처량하게 죽어갔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일단 대강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의 무례와는 별개로 말을 듣고 있노라니,
근래에 겪은 몇 가지 사건들이 뇌리를 스쳐갔기 때문.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의 전모는 근래 이 몸이 겪었던 사건들과 너무 흡사했다.
‘음양굴에서의 일이 생각나는군.’
총해무관의 이설이란 아이도 생각나고.
···더욱이 몇몇 마인들이 농민인 척 숨어 있던 것도 그렇고.
이쯤 되면,
심증만으로도 확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학주가 천마신교와 손을 잡은 것 같군.’
물론 구체적인 이유는 모른다.
언제부터 손을 잡았는지도 명확치 않고.
‘어쩌면 소령이 쫓겨나던 그날부터였을 수도 있지.’
다만 지금 백미려를 돕느냐 마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백미려에게 들은 말과 방금 이곳 황정기루로 오며 느꼈던 이질적인 느낌들을 모두 고려했을 때.
이미 이곳 황정기루의 상황은 단두대 위에 올라선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그러니 이 상황에서 섣불리 그들을 돕는 것은?
자칫 그들과 함께 섶을 지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확실한 보상이 있어야겠지.’
더불어 명확한 탈출 방법도 생각해내야 했다.
우선 보상은···.
“확실히 모산파 무공의 행방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된 정보인 까닭에 몇 가지 확인을 거쳐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확인을 거쳤는데, 잘못된 정보라는 게 밝혀지면 어찌 합니까.”
“그럼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새로운 정보를 발굴해내겠습니다. 아직 저와 연이 닿아 있는 지부들이 있으니. 그들을 통해 알아본다면 분명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며 그녀는 내게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보옥을 하나 건넸다.
‘내부에서 상당한 양의 오행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군.’
얼핏 봐도 상당히 값이 나갈 것 같은 물건.
그녀는 자신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신뢰의 표시로 내게 맡기겠다는 말이었다.
금화표국이 한창 잘나갈 때도 이런 물건은 본 적이 없을 정도이니.
보상 문제는 일단 이거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다음으로 탈출 방법에 대한 문제.
“그럼 탈출 후 행선지는 정했습니까.”
“그것이···.”
잠시 망설이는 그녀.
한시가 급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추천을 건넸다.
“무림맹은 어떻습니까.”
허나 그녀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남궁세가로 데려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궁세가 말입니까.”
듣기론 무림맹엔 아직 자신이 온전히 신원을 파악하지 못한 인물들이 더러 있다고 했다.
거리도 너무 멀고.
하여 차라리 남궁세가가 나을 것 같다고.
“남궁세가로 간다면 확실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대략 사정이 있어보였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후엔 보다 구체적인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혹 생각해둔 탈출로가 있습니까.”
“그건···.”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현 상황에서 제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거나. 저들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것. 무엇이라도 말씀해주시지요.”
이후 곰곰이 고민에 잠기는 그녀.
그때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던 목련을 닮은 여인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루주님. 만일을 위해 대비해둔 탈출구가 있지 않습니까.”
‘탈출구?’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
보다 자세히 말해보라고.
그랬더니. 황정기루 지하에 외부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 있다고 했다.
기관진식을 이용해,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만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문이라 했다.
허나···.
이에 백미려가 말했다.
“그 길은 아마 적들도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애초에 진학주를 비롯한 하오문 간부들도 모두 파악을 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한 번 확인을 해볼 법은 하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일단 그곳을 확인하러 가보자고.
그런데 그때였다.
와장창- 우르르르.
기루 1층에서 요란한 소리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백미려를 봤다.
처량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리는 그녀.
아마 그녀를 향한 진학주의 습격이 시작된 모양이다.
***
방에서 나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상황을 살폈다.
기루 일 층에서 횡포를 부리는 장정들.
그들 중 두 명이 마인이었고.
한 명은 하오문도.
나머지는 일전에 보았던 도적들이었다.
뭐 정체가 어쨌든 결국 적이란 의미.
놈들은 백미려의 부하들로 보이는 무사들과 검을 섞고 있었다.
챙- 챙!
다행히 아직 놈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아보였다.
잠시 그들의 무위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해볼 만할 것 같군.’
물론 현재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곧 다른 적들도 들이닥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물며.
‘···나 또한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형국이 된 건가.’
백미려를 비롯한 기녀들은 적들 사이에 마인이 숨어있는 걸 모르는 것 같았지만.
‘마인들이라면 나를 순순히 보내줄 리 없지.’
마인이 숨어 있는 이상 이 몸 또한 평범히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마냥 만만히 생각해선 안 될 터.
잠시 고민하다 루주실로 들어갔다.
곧 기녀들을 불렀다.
“비녀를 다오.”
다행히 다들 두어 개 이상은 가지고 있었다.
그걸 수거한 뒤.
다시 난간으로 돌아와 적들을 살폈다.
‘이정도면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의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빠르게 1층에 있는 적들을 향해 비녀를 투척했다.
쉬리릭-
푹!
정확히 하나에 한 명씩.
단박에 끝장내기 위해 주로 목덜미를 노렸다.
목에 비녀가 꽂힌 놈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풀썩. 바닥에 쓰러지더라.
마침내 마지막 비녀까지 투척.
쉬리릭-
푹!
비녀에 뒷목을 꿰뚫린 놈이 피거품을 물며 쓰러진다.
쿵!
이내 다시 루주실로 돌아왔다.
목련을 닮은 기녀에게 말했다.
“너. 아까 탈출구가 있다고 했지?”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최대한 간결하게 의도를 전달했다.
“네!”
“이름이?”
“해진이에요.”
그들 또한 내 의도를 눈치 챈 것인지, 별다른 반항이 없었다.
“그래. 해진. 안내해라.”
나머지에겐 루주실에 있는 천들을 이용해 긴 끈을 만들라고 했다.
만약 정면 돌파가 힘들다 판단이 되면, 창문을 통해서라도 탈출을 해야 할 테니.
그러자 백미려가 도와주는 거냐며 감사하다고 하더라.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후 해진이라는 기녀와 함께 층계를 내려왔다.
우르르-
귓가로 적들이 층계를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1층은 벌써 뚫린 건가.’
생각보다 빨리 뚫렸다.
슬쩍 난간 너머를 보니,
여전히 백미려의 무사들은 분전을 하고 있었다.
다만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아 모두를 막아내지 못한 것일 뿐.
최악은 아니었다.
“서두르지.”
마주치는 적들은 깔끔하게 죽였다.
주로 주먹질을 해, 난간 밖으로 날려 보내는 식이었다.
퍽!
‘시체로 길이 막히면 위층의 기녀들이 내려올 때 곤란할 수도 있으니까.’
곧 1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해진의 말에 따르면, 탈출구가 있는 곳은 지하.
다만···.
‘일단 1층 입구를 막긴 해야 할 것 같군.’
만약 내가 이대로 지하로 간다면,
몇몇이 백미려들이 있는 4층으로 향할 수 있었다.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금태강에게 받은 검은 이미 망가진 상태라,
맹주에게 말해 적당히 하나 받아온 평범한 검.
물론 그럼에도 날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
촤악-
눈앞의 적의 복부를 갈랐다.
촤악-
이번엔 목을 베었다.
하나둘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이후 적들은 보다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댓 명의 적들이 대여섯 명씩 짝지어 좌우로 포위해온다.
‘그렇다면···.’
근처에 있던 식탁 하나를 왼쪽의 놈들에게 걷어찼다.
놈들의 움직임에 제약을 가함과 동시에 오른쪽을 향해 보법을 밟았다.
제왕보.
걸음걸음마다 화기가 넘실거린다.
찰박-
피 웅덩이에서 피가 튀었다.
동시에 빠르게 검을 뿌렸다.
촤악!
횡으로 그어 맨 앞에 있던 놈의 목을 베었다.
공중에서 회전하는 놈의 머리통.
그걸 그대로 옆에 있는 놈을 향해 걷어찼다.
퍽!
곧 머리통이 놈의 골통에 부딪혔다.
자세를 낮추며 발끝에 힘을 줬다.
쿠웅!
진각을 밟아 출입구 쪽으로 빠르게 튀어나갔다.
머리 위로 스쳐가는 두 개의 검날.
등 뒤로 하나 더.
일단 무시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푹!
무게를 실어 방금 막 입구로 들어온 마인 하나를 꿰뚫었다.
‘점점 강한 놈들이 몰려오는 건가.’
이후 그곳에서 시체의 산을 만들었다.
막고. 찌르고. 베고.
거대한 문턱이 되어 어느 누구도 넘어가길 허락하지 않았다.
곧 입구가 시체 더미들로 충분히 막혔을 때쯤.
근처에 간단한 진법을 만들었다.
특별한 진법은 아니었다.
시체의 수가 훨씬 더 많아 보이도록 하는 것.
‘이러면 입구보단 창문으로 들어오려 할 테지.’
계속 이곳에서 싸우는 건 현명하지 않아보였다.
내공도 무한하지 않을뿐더러.
적들의 수준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자칫 내 방어를 뚫고 들어오는 놈들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럼 백미려는 죽고 말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를 살려 모산파 무공에 대한 정보를 듣기로 결심한 상태.
1층에 살아남아 있는 백미려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각자 창문 앞으로 향해라.”
이후 그곳으로 들어오려는 적들만 막으라 했다.
그 사이, 해진이 위층에 있던 기녀들을 불러왔다.
얼핏 보니 창문으로 내려가기도 곤란해진 상황.
하여 싸우던 중에 그녀에게 시켜 내려오게 했다.
함께 지하의 탈출구를 살피러 향했다.
“여기에요!”
“그래?”
실제 그곳엔 기관진식이 있었다.
와룡장에서 본 것에 비하면 한참은 형편없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제 역할은 하고 있는 듯했다.
이곳을 통해 들어오는 적들은 보이지 않았으니···.
나가는 것만 가능하다는 말이 맞아 보였다.
그때였다.
어느덧 1층에서 다시 요란한 소리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적들이 다시 들이닥친 것.
‘서둘러야겠어.’
기감을 확장해 기관진식 너머를 살폈다.
상당수의 적들이 출입구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다.
아마 활을 들고 있을 터.
물론 혼자 빠져나가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옆에 있는 기녀들은 모두 죽겠지.’
혼자 빠져나가 그들을 모두 처리한 뒤 다시 들어와 일행을 이끌고 나가는 방법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 사이 1층에서 나타난 적들이 들이닥쳐 이들을 죽일 테고.’
가장 좋은 건, 밖에 있는 놈들이 활을 쏘기 전에 한 방에 일망타진을 하는 것일 터.
허나 지금 이 몸이 익힌 무공 중엔 그런 무공이 없었다.
물론 아수라파천권 멸화응취의 경우,
이 몸이 보유한 내공의 양만 막대하다면, 충분히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긴 했지만.
그런 힘을 내기엔 아직 내공의 양이 부족한 상황.
그러던 그때였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잠깐 내공의 양이 부족한 거라면···.’
품에서 아까 백미려에게 받은 보옥을 꺼내들었다.
내부에 거대한 오행의 기운을 머금은 보옥.
‘오행의 기운 또한 내공처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모산파의 죽간본을 읽은 뒤, 계속 잡힐 듯 말 듯 이 몸의 뇌리를 간질이던 그 깨달음.
강시로 변했던 총해무관의 아이의 머릿속에서 생기를 흩어낸 뒤, 발견한 천마신공의 또 다른 가능성.
백미려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너희를 탈출시킬 수만 있다면, 이 보옥을 사용해도 괜찮겠나.”
그래도 보옥이 깨지진 않을 것이라 했다.
그러자 백미려는 잠시 고민을 하다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라.
깨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 했다.
‘되었다.’
이윽고 기녀들을 향해 말했다.
“내 뒤를 바짝 따라와라.”
이후 기관진식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활을 든 수십 명의 적들.
우리를 발견한 놈들이 재빠르게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물론 나 또한 가만히 있진 않았다.
빠르게 몸속의 천마신기를 움직여 보옥 속의 오행의 기운들을 포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