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비고(2)
33화. 비고(2)
마침내 도착한 무림맹의 비고.
‘여기가 금관.’
입구를 지키던 무사에게 금패를 건넸다.
끼이익-
두꺼운 철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순간 두 눈으로 쏟아지는 휘황찬란한 광휘.
번쩍번쩍.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투명한 황금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동시에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군.’
그만큼 철저한 관리가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
참고로 은패와 동패를 금패로 바꾸어주겠다는 남궁벽의 제안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안으로 발을 들이며, 짧게 당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금관엔 은관과 동관의 무공서가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아니네. 금관엔 은관과 동관에 있는 무공서도 모두 포함되어 있네. 정확히 말하면, 은관과 동관에 있는 것들은 필사본이고. 금관에 있는 것들이 진본이지.”
“그럼 교환하겠습니다.”
이후 남궁벽은 원하는 무공서를 골라, 안에 있는 사서에게 건네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그가 따로 책을 읽을 공간을 내어줄 것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끼이익- 쿵!
이윽고 등 뒤에 있던 철문이 닫히고.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는 것들 중, 하나를 고르시면 됩니다.”
어느덧 다가온 등이 굽은 노인.
아마 이 노인이 남궁벽이 말한 사서인 모양.
그는 특별한 신법을 익히지 않은 걸로 보였음에도,
일견 무림맹주 남궁벽에 비견이 될 정도로 움직임이 가벼워 보였다.
다만.
‘눈이 먼 것 같군.’
이후 안쪽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책장을 둘러봤다.
한 권.
또 한 권.
개중엔 절로 구미를 당기는 무공서도 수두룩했다.
얼핏 황실의 것으로 보이는 무공서도 있었고.
전대 천하제일인들의 독문 무공으로 보이는 것들도 적지 않았다.
태고적의 무공도 있었다.
상당히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일단 전부 지나쳤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하나.
‘모산파의 무공.’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옆으로 예의 그 등 굽은 노인이 다가왔다.
“달리 찾으시는 무공이 있으신지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모산파의 무공을 찾고 있습니다.”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으니까.’
마침 강시도 등장을 한 까닭이라, 특히나 더 명분이 되었다.
순간 노인의 미간이 모아졌다.
“···한 권 있긴 합니다.”
이후 노인의 안내에 따라, 한참을 걸었다.
거의 서고 끝자락에 도착하고 나서야 노인이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노인이 가리키는 곳엔 낡은 죽간본이 하나 있었다.
이후 그 죽간본을 챙겨, 노인의 뒤를 따랐다.
“따라오시지요.”
아마 남궁벽이 말한, 독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안내하려는 듯.
그그그극-
비고의 한쪽 벽면이 열렸고.
온통 회색으로 뒤덮인 꽤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쓱 살펴보니 천장엔 야명주가 박혀 있었고.
한쪽엔 벽곡단과 물 따위가 마련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
그그극 소리와 함께, 다시 벽이 닫히더라.
“다 읽으시면 벽을 세 번 두드려주십시오.”
이후 적당한 자리에 앉았고.
마침내 조심스레 죽간본을 펼쳤다.
***
무림맹 뒤뜰에 있는 고즈넉한 정자.
남궁벽은 그곳에서 군사 제갈천소와 간단한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제갈천소가 말했다.
“금태산 소협 말입니다.”
남궁벽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딸깍.
“말해보게.”
제갈천소의 말이 이어졌다.
“맹주님께선 그 청년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더없이 훌륭한 청년이지.”
정자 위로 차분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남궁벽은 가만히 제갈천소의 표정을 살폈다.
과연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마침 제 여식이 혼기가 차서 말입니다.”
“그런가.”
남궁벽은 적당히 그의 말에 긍정을 해주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인재 수집 욕심은 여전하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긴 했다.
금태산은 무려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을 파헤친 아이가 아닌가.
심지어 무공 수위 또한, 또래 중에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이었고.
다만.
‘그 아이가 제갈세가의 식솔이 된다면, 무림의 무게추가 제갈세가로 급격히 기울 테지.’
남궁벽은 무림의 평화를 바랐다.
당연히 금태산과 같은 재목이 어느 특정한 세가에 소속되는 건,
딱히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힘이 급격히 늘어나는 가문이 생긴다는 건,
언제고 그 세가를 중심으로 무림이 재편될 수 있다는 말일 테니.
그리고 그 과정에선, 알게 모르게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를 수밖에 없을 테고.
‘하물며 지금처럼 마교가 준동을 하는 시기엔 절대 그래선 아니 되지.’
물론 제갈천소도 이러한 자신의 우려에 대해 알고 있을 테다.
그러니 최소한 제갈세가로 간다면,
이러한 문제는 마교와의 일이 모두 해결된 뒤에나 발생할 것.
그러나 여전히,
금태산이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사실 금패를 내어준 것도 그런 맥락이었지···.’
사실 이번 일로 금패를 내어주기엔, 그 공이 조금 부족하긴 했다.
그러나 먼 미래를 보고 결정을 내린 것.
일종의 유혹이었다.
특정 세가에 소속되는 것보다,
무림맹에 소속되어 활약하는 금태산을 보고 싶었기 때문.
아무래도 특정 세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면,
무림맹에서 활약할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을 테니.
물론 이런 의중을 제갈천소도 파악했을 테다.
그러니 방금과 같은 말을 꺼내는 것일 터.
여식이 혼기가 찼다는 말로 나름의 명분을 만드는 것이리라.
이후 둘은 금태산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주로 칭찬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준비해온 차가 다 식어갈 때쯤.
곧 정무로 복귀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는 보다 공적인 부분으로 넘어왔다.
“그보다, 생포한 마인을 심문한 결과는 어떤가.”
“유의미한 단서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그래도 놈의 정신이 많이 쇠약해진 걸로 보아, 조만간 무언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궁벽은 고개를 주억였다.
“허면 강시로 변한 총해무관의 아이는 어떻게 됐는가. 차도가 있는가.”
“안타깝지만,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입니다.”
“일전에 뇌옥에서 나눈 이야기처럼, 모산파 무공으로도 어떻게 방도가 없는 건가.”
“도무지 찾아내질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못 찾는다면, 없는 걸 테지.”
괜히 신기제갈이겠는가. 하물며 무림맹 최고의 지낭으로 일컬어지는 군사 아닌가.
남궁벽이 제갈천소를 위로하듯 말했다.
“너무 자책은 말게. 자네 이번 일을 위해 가지고 있던 금패를 사용해 모산파의 무공 또한 견식하지 않았나. 그 정도면 충분히 했네.”
“죄송합니다. 모산파의 무공서에도 강시를 만드는 원리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그걸 되돌려 놓는 것에 대한 말은 없어서···.”
둘의 얼굴 위에선 씁쓸한 그림자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들이라고 그 아이가 어찌 딱하지 않을쏘냐.
하물며 얼마 전 듣기론, 그 아이의 어미 되는 사람은 속병으로 쓰러졌다고 하니···.
그러던 그때였다.
“맹주님, 찾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맹주실을 담당하는 무사였다.
“찾는 사람?”
듣고 보니, 금태산이 찾아왔다고 하더라.
순간 제갈천소와 남궁벽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벌써 금관에서 나온 것인가.’
보통 그곳에 들어가면, 몇 날 며칠을 기본이었다.
헌데 하루 만에 나왔다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이러한 의문들은 곧 이어진 무사의 말에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무사가 말했다.
“급히 뇌옥에 갇힌 강시를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어쩌면 다시 사람으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
죽간본을 처음 읽었을 땐,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 같았고.
두 번째 읽었을 땐, 아쉬움이란 안개가 내렸다.
그리고 세 번째 읽었을 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천마신공과 모산파의 무공이 연관이 있음은 명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죽간본에서 천마신공을 이루는 구결들을 몇몇 개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천마신공에서 보았던 구결 몇 개를 길게 풀어놓은 것과 같았다.
다만.
‘다른 모산파의 무공서들도 참고해볼 필요는 있겠어.’
비고에서 발견한 죽간본은 여러모로 그 내용의 양이 부족했다.
특히 바라던 이혼대법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토납법과 강시술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꽤나 대단한 성과이긴 했다.
‘강시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천마신공에 대한 깨달음이 조금 더 깊어졌으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확히는 강시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것.
비록 그 하얀 액체의 명확한 성분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강시는 백회혈에 강제로 정(精)을 만들고 그곳에 여러 종류의 생기(生氣)를 집어넣어 만든다라···.’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는 천마신공이 다른 여러 무학들을 포식하는 무학이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걸로 보였다.
결국 강시술은 천마신공의 하위 체계라고 볼 수 있었다.
참고로 천마신공은 단전을 만들 때,
여타의 무공 구결들을 함께 섞어 넣지 않는가.
그 말은 천마신공을 운기하면,
천마신기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 만들어진 천마신기 속에 여타의 무공들의 내공 또한 포함이 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반면 강시의 경우는, 그걸 반대로 하는 것이라 보면 되었다.
자체적으로 여러 내공을 만들 수 없으니.
이미 만들어진 내공들을 백회혈에 만든 정에 욱여넣는 것.
이로 인해, 강시가 된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고.
맨 처음 정을 만들 때 심어둔 명령에 복종을 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식했을 때,
‘만약 강시의 백회혈에 있는 생기를 뽑아내 정을 허문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백회혈의 정을 허무는 것이 불가능할 테다.
백회혈은 그대로 생명과 직결된 곳이니.
그러나 천마신공을 익히고 있는 이 몸이라면?
가능할지 몰랐다.
‘천마신공으로 그 생기들을 흡수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강시로 변한 아이를 원래대로 되돌 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나 또한 그런 일련의 과정을 함으로 인해, 일종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무림맹의 지하 뇌옥 안.
“맹주님, 잠시 아이와 단 둘이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도움은 필요 없겠는가.”
“필요하다면 따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무림맹주의 허락 아래, 강시로 변한 아이가 있는 뇌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철컹.
“크르르-”
팔다리에 족쇄가 달린 강시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검푸른 혈관은 저번보다 더욱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그런 강시의 하얀 눈동자를 마주봤다.
“겁먹지 마라.”
말을 하곤, 강시의 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휘둘러 오는 강시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가볍게 쳐냈다.
툭.
이번엔 내질러 오는 왼손을 고개를 젖혀 피해냈다.
슉-
마침내 지척에 도달하니,
물어뜯기 위해 머리를 들이밀더라.
보법을 밟아, 강시의 후방을 점지했다.
동시에 왼손으로 강시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다리를 걸어 바닥에 눕혔다.
쿵!
얼굴에 생체기가 좀 났을 테지만.
‘어쩔 수 없지.’
이윽고 천마신기를 움직였다.
왼손으로 천마신기를 이동시켰다.
머리에 있는 백회혈에 오른손을 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슈우욱-
강시의 안색이 조금씩 산사람의 그것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