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청염단(1)
27화. 청염단(1)
추적추적 가랑비 내리는 새벽녘.
금화표국의 조사전(弔詞殿).
부모님의 위패 앞에 가만히 향을 피운다.
그윽한 향 연기가 폐부를 훑고 지나갔다.
불과 반나절도 안 된 과거. 소령이 내게 전한 그녀의 개인사를 떠올렸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사실 이건 소령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령은 이 몸에게 가족과 다름이 없으니.
소령과 내가 엮인 이야기이고.
나아가 금화표국과 하오문 사이의 일이었다.
전날 밤, 소령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선. 저는 원래 하오문 소속이었어요.”
여기까지는 익히 아는 내용.
그런데.
“정확히는 전대 하오문주님의 수양딸이었어요.”
때는 이 몸이 대략 다섯 살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만큼 까마득한 과거.
그러나 그녀에겐 아직도 눈앞에 선한 그날.
그날 하오문엔 혈겁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의숙부이자 당시 하오문주의 친동생이었던 철면야탑(鐵面夜塔) 진학주가 별안간 문주의 자리를 찬탈한 것.
‘···정체불명의 무공으로 그녀의 의붓아버지를 살해했다고 했지?’
어떤 징조도 없이 일어난 사건이라,
당시 하오문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한다.
곧 그녀의 의숙부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고.
소령의 의자매들 중 대부분은 그날 한 줌 핏물이 되어 산화했다고 한다.
소령 또한 그 혈겁을 피할 길이 만무.
그나마 당시 출타 중이었던 까닭에, 당장의 혈겁은 피할 수 있었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 이 몸의 어머니였다고 했다.
“당시 공자님께서도 옆에 계셨어요. 비록 그분의 품에 안겨 주무시고 계셨지만요.”
소령이 의숙부가 보낸 살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직전, 여류 검객으로 이름깨나 날렸던 이 몸의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은 채 검을 휘둘러 소령을 구해냈다고 한다.
마침 근처를 지나다 곤경에 빠진 어린 소령을 발견하고 외면할 수 없었던 것.
이후 소령의 딱한 사정을 들은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상의 하에 소령을 거둬드렸고.
그녀의 의숙부로부터 그녀를 지켜내기 위해, 그녀에게 시비의 자리를 내줬다고 한다.
그녀가 이미 죽은 것처럼 위장한 채, 원래부터 외가 쪽의 식솔이었던 걸로 신분을 꾸민 것.
‘아마 당시 금화표국의 위세가 천하제일 표국의 자리를 다툴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행보도 보일 수 있었던 것일 테지.’
물론 당시 소령을 어떤 심경으로 받아드렸는지, 구체적인 그들의 감정은 모른다.
다만 그 이후 소령은 이 몸의 어머니를 무척이나 따랐다고 한다.
어머니 또한 소령을 진짜 가족처럼 어여삐 여겨주었고.
하물며 이 몸 또한 어려서부터 소령을 무척이나 잘 따랐으니···.
‘당시 이 몸과 놀아줬던 게 소령뿐이었으니, 더욱 그랬던 거지.’
사실 소령은 표국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언젠가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고 한다.
다만.
‘···쉽지 않았겠지. 이 몸이 소령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소령 또한 이 몸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하물며 얼마 전까지 망나니 같았던 이 몸 아닌가.
그런 아픈 손가락을 두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일 테다.
꼬끼오-
어느덧 창문을 통해 아침햇살이 스며들었다.
빗방울 소리가 그친 걸 보면, 내리던 비도 멈춘 모양.
“공자님, 해단식 준비하셔야죠!”
조사전 문 밖에서 소령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래도 전날에 비해, 소령의 목소리에서 최소한 불안함만큼은 많이 사라진 상태.
아마 전날 내가 한 말 때문일 것이다.
“소령, 소령은 나에게 친누이나 다름이 없어.”
이는 자신을 내칠지 말지 결정하라던, 소령의 말에 대한 내 답변이었다.
이 당연한 말이 뭐라고.
소령은 상당히 감격하더라.
문 밖의 소령을 향해 곧 나갈 테니, 잠시만 기다리란 말을 건넸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의 위패 앞에 꽂아둔 향을 지그시 바라봤다.
두 분은 진심으로 소령을 위하는 마음에, 소령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두 분이 갑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 이야기는 소령의 가슴속에만 존재하는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남아 있었던 것.
'그나마 이제 다시, 표국 안에 그녀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생긴 건가.'
괜히 가슴 한 편이 쓰라렸다.
그간 그녀는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을까.
타인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지 몰랐다.
마침 빨간 향불이, 마지막 재 가루를 만들며, 차갑게 식어갔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녀의 그늘이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텐데.
이로써 얼른 강해져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물론 실제로는 한층 더 나아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기도 했다.
하오문과 그녀 사이의 갈등의 골을 풀어내는 것.
사실 이게 최선이기도 했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소령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한 줌 불편함마저 홀연 털어낼 수 있을 테니.
더불어 소령이 당당히 본인의 진가를 만인 앞에 드러낼 수 있게 된다면,
내 입장에서도 천군만마를 얻게 되는 것과 다름이 없을 테고.
당연히 금화표국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그렇게 조사전을 채우던 향 연기가 옅어질 때쯤, 사뿐 걸음을 옮겨 조사전을 나왔다.
***
해단식.
표행을 다녀온 뒤,
무사히 돌아왔음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일종의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
본격적인 해단식의 시작에 앞서, 해단식이 치러질 공터는 여느 때보다 소란스럽게 변해 있었다.
웅성웅성.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아. 종남파와 거래를 텄다고?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하게. 쯧쯧.”
금태산과 함께 표행을 다녀온 표사들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표국 내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에게 자랑했기 때문.
“허허. 이 사람들이 사람 말을 못 믿나!”
“에잉. 고약한 사람들 같으니. 자네들 말대로라면 금태산 공자님이 어디 영웅전기에 나오는 영웅 같지 않은가. 갑자기 도술을 부려 적들을 혼란시키고. 무위도 출중하고. 판단력도 좋으시고. 그게 말이나 되나? 응? 자네가 나 같으면 믿겠어?”
그리고 그 말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믿질 않았다.
그저 금태산 휘하의 표사들만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곤, 조만간 알게 될 거라며 배짱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단체로 농이라도 치기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네. 쯧쯧.”
물론 저들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저들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거야.’
표행을 하는 동안, 어지간히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 않은가.
심지어 하나하나 굵직하지 않은 사건이 없었고.
‘그 짧은 시간 마교와 충돌한 것만, 네 번이니···.’
더욱이 그 주체가 소문난 망나니였던 이 몸 아닌가.
비록 이번 표행을 떠나기 직전에 조금 변한 모습을 보여줬다곤 하나.
그걸 가지고 여기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는 것이 당연할 터.
그들이 그간 두 눈으로 보아온 이 몸의 모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겐 이걸 믿느니, 금태산과 함께 표행을 다녀온 표사들이 단체로 머리가 돌았구나 생각하는 것이 더 쉬웠다.
혹은 그들을 놀리기 위해 이들이 단체로 농을 던지는 것이라거나.
물론 그럼에도 그런 증언을 하는 표사들의 숫자가 하나둘 늘어나고.
금태천 소속 표사들마저 비슷한 이야기를 건네자,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이 몸을 힐끔거리는 표사들도 더러 있긴 했다.
정보에 밝아 미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던 표사들도 있긴 있는 것 같고.
그렇게 해단식을 위한 현장이 뒤죽박죽해질 때쯤.
정면의 단상 위로 금화표국의 국주 금태강이 나타났다.
저벅저벅.
순간 온통 내게 쏠려 있던 시선들 중 일부가 금태강에게 옮겨가기 시작했다.
금태강에게 일종의 해명을 바라는 것이다.
어차피 논공행상을 위해선,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는 일도 해야 할 테니.
‘잠깐. 근데 왜 형님의 표정마저 꼭 믿기지 않는 일을 마주한 사람 같은 것인지···.’
헌데 무언가 이상했다.
설마 형님도 믿질 못하는 것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그에겐 중간에 따로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그에 대한 답신도 받았고.
어쨌든 단상 위에 자리한 금태강은 한 차례 목을 가다듬더니, 청중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흠흠. 조용!”
이윽고 나와 금태천을 단상 위로 불러냈다.
금태천은 묘하게 풀이 죽은 채로 내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금태강이 말했다.
“우선. 금태천 표두!”
“네! 국주님.”
호칭은 공적인 자리임을 고려하여 이처럼 하는 것.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아니야. 마인들을 만나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중간에 표행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표물을 운반하지 않았나.”
“···당연한 일인데요. 그리고 그래봐야 실패한 것이고요.”
그리고 그때였다. 해단식을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마인들을 만났다는 이야기 때문이겠지.’
문득 장표사가.
“내가 뭐라고 했나.”
하고 작게 으스대는 것도 들리는 것 같았다.
괜히 피식 웃음이 나오려고 해,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물론 그럼에도 대중들 사이엔 아직 반신반의한 기색이 역력했다.
금태강의 말이 마저 이어졌다.
“그래도 금태천 표두가 끝까지 운반을 한 덕분에 피해가 반으로 줄었어. 오히려 책임감을 엿볼 수 있었다고 표물을 맡겼던 대국상단도 손해를 보장받는 선에서 이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네.”
듣던 중 아주 좋은 소리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금태천도 이윽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더니, 똥그래진 눈으로 금태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코끝이 빨간 걸 보니, 어지간히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모양.
이후 몇 마디 칭찬이 더 이어지고. 표사들과 회포를 풀라며 은자 주머니가 주어졌다.
등 뒤에서 환호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
은자 주머니를 챙긴 금태천은 단상을 내려갔다.
이어 단상 위에 남은 건, 나와 금태강뿐.
그런데.
금태강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기특하다는 눈으로 먼저 이 몸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이 아닌가.
금태강이 말했다.
“금태산 표두. 자네 정말 큰일을 해냈더군.”
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어 금태강의 말이 이어졌다.
“무엇부터 말을 해야 할지. 우선. 표물을 운반하던 중 마인들로부터 금태천 표두를 구하고 표물을 지켜낸 것.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들에 청중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종남산에서 마인들이 납치한 양민들을 구해낸 것. 이어 종남파와의 표행 약속을 받아내고. 개인적으로 종남파 장문인의 표행 또한 완수한 것···.”
아까 내 휘하의 표사들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니, 소란스럽게 변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후 무림맹 섬서지부로 이동해, 그들과 함께 모종의 임무를 완수한 것. 마교의 은신처를 발견한 것. 하여···.”
이쯤에선 다들 이곳이 해단식이란 것도 잊은 채, 각자 이야기하기 바빴다.
특히 이 몸과 함께 표행을 다녀온 표사들의 입은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았다.
다들 그들을 잡고 어찌나 많은 이야기를 물어보는지.
금태강도 딱히 그런 분위기가 싫진 않은지, 잠시 그들을 지켜봤다.
그러더니 한 차례 더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청중을 주목시켰다.
“주목!”
그의 말에 소란이 가시기 시작했다.
물론 그럼에도 청중들 사이에 자리한 기이한 열기는,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잔잔한 진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금태강의 입이 열렸다.
“마지막으로 금태산 표두. 자네 덕분에 우리 표국이 무림맹의 감사패를 받게 됐네.”
순간 일대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무림맹의 감사패라니.
이건 표국에겐 상당한 명예였다.
정확히는 그 감사패를 받은 표두가 말이다.
실제 이 감사패를 받았던 표두들은 전부 내로라하는 대형 표국의 국주가 되었다.
그만큼 까다로운 선별작업을 거친다는 것.
뒤이어 그가 무림맹으로부터 내려온 서찰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찰의 내용을 모두 읽어 내려갔을 때쯤.
“뭐, 뭐야! 그럼 전부 사실이라고?”
“그게 말이나 돼?”
“어, 어이. 장표사. 다시 한 번 말해보게. 뭐가 어땠다고?”
일대는 꼭 터진 화산처럼 요란스러워졌다.
금태강이 씨익 입꼬리에 호선을 그리며 내게 속삭였다.
“원랜 무림맹주가 직접 오겠다고 하는 걸, 내가 애써 막았다.”
아까 표정이 묘했던 건 아마 이런 이유였던 것 같다.
“고생 많았다, 아우야.”
***
해단식이 끝나고 나는 내 휘하의 표사들과 함께 청명각으로 돌아왔다.
표사들은 어지간히도 으스댔는지, 대부분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잠시 후 장표사가 말했다.
“표두님, 혹시 서찰 내용 한 번만 더 읽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옆에서 칠복이 놈이 하도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제대로 듣질 못했지 뭡니까.”
그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더라.
다른 표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다들 그 내용을 한 번 더 듣길 원하는 모양.
나는 피식 웃으며 서찰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참고로 서두의 내용은 무림맹주가 이 몸에게 사사로이 건네는 말이었다.
“···자네가 내 초청장을 받고도 언제 들르겠다는 확답을 하지 않았단 얘길 총관에게 듣고, 내 이렇게 따로 또 서찰을 보내네.”
뭐 약간 쓴웃음이 지어지는 내용이긴 했다.
허나.
“맹주님이 이리 말씀하실 정도니, 정말 우리가. 아니. 표두님이 큰일을 하시긴 했나 봅니다.”
표사들은 그저 감탄만 나오는 모양이더라.
그들을 보며 잔잔히 웃음을 보여주었다.
“어디 나 혼자 노력한 건가.”
이어 뒷내용도 주르륵 읽어 내려갔다.
대체로 내가 세운 공에 대해 어떤 보상을 내리겠단 내용들이었다.
마인들을 처치한 것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은 물론이요,
음양굴 사건에서 얻은 수익금, 그리고 보상금.
하물며 도박장에서 회수한 불법 자금도 적지 않다는 것 같았다.
장표사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러면 이거. 정말 우리 표국 다시 부자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장표사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마저 서찰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아직 가장 중요한 내용이 남았기 때문.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무림맹 비고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할 생각이네. 그러니 속히 본부로 방문을 해줬으면 하네.”
바로 이것.
무림맹 비고는 멸문한 문파들의 무공을 모아놓은 곳으로 유명했다.
‘비고를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어느 정도 선까지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강호 무림의 동도들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내용.
아니나 다를까 표사들의 얼굴에는 여태 볼 수 없었던 환희가 가득했다.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서로 어떤 무공이 더 좋네 마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로 뜬구름 잡는 내용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섞여 있었다.
전대 천하제일인의 무공이라거나.
멸문한 문파들의 무공이라거나.
그래. 멸문한 문파들의 무공.
물론 이런 무공까진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비고라고 해도 분명 단계가 나뉘어 있을 것.
허나 그럼에도.
‘혹시 멸문한 모산파의 무공도 있을까?’
나 또한 묘한 기대감을 품게 되는 건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훼손된 천마신공의 각주에서 보았던 그 무공.
어쩌면 내가 이 몸을 얻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는 그 무공.
그 무공도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너무 늦지 않게 한 번 가봐야겠군.’
조만간 들러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잠시 열띤 환희 속에 파묻혀 있을 때였다.
“다들 얼른 준비하세요!”
청명각 대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탕약 가져왔어요!”
진희원의 목소리.
그녀가 소령의 도움을 받아, 탕약이 든 것으로 추정되는 항아리들을 낑낑거리며 들고 오고 있었다.
이제 청염단을 먹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 탕약들을 전부 다 먹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후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일전에 진희원에게 들었던 청염단의 효과들을 떠올렸다.
‘반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요, 운이 좋으면 극양지체의 장점도 얻을 수 있다고 했지.’
동시에 실제 내가 뇌옥에서 직접 들었던 당시 청염단을 먹은 척굉의 변화도 떠올렸다.
‘···그래서 일개 마졸에 불과하던 놈은 단박에 부대주급으로 승진하였고.’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종의 기대감이었다.
‘헌데 나는 진희원 소저가 직접 영약의 흡수를 돕는 탕약까지 만들어왔으니.’
과연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될까.
이후 표사들은 진희원의 말마 따라, 청명각의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영약을 흡수하는 내 호법을 서려는 것.
나 또한 청명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목이 좋은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고.
진희원의 설명을 차분히 들었다.
“먼저 소령 언니가 들고 온 탕약을 다 마시면 돼요. 그리고 영약을 드신 다음엔, 제가 들고 온 탕약을 드시면 되고요.”
이후 진희원과 소령마저 방을 나갔고.
나는 가만히 청염단이 든 목함을 열었다.
딸깍.
수 겹의 기름종이로 쌓여 있는 영롱한 단환.
청염단이란 이름과 꼭 같은 모양새였다.
맑은 불꽃을 동그란 단환처럼 뭉쳐놓은 자태.
나는 그 단환을 조심스레 들어 혓바닥 위에 올리고 가만히 굴렸다.
사르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영약.
동시에.
번쩍!
몸속에서 거대한 기운이 용오름치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눈을 감고 천마신공의 구결대로 진기를 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