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발견(3)
19화. 발견(3)
강불해의 심복 중 척굉이라는 놈이 있다.
과거 천마신교가 음양굴(陰陽窟)이란 매음굴에 사는 나를 납치할 때.
그 자리에 따라왔던 마졸 중 한 놈이다.
추후 놈은 어떻게 강불해를 구워삶았는지, 강불해에게 청염단(淸炎丹)을 건네받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염화마인(炎火魔人)이란 악명을 얻게 된다.
동시에 평범한 마졸이었던 놈은 단숨에 흑랑대의 부대주가 되었다고 한다.
강불해가 이따금씩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우게 되면, 대신 내게 찾아와 분석할 무공서들을 건네던 놈이라 잘 안다.
···어쨌든 지금 내가 이 기억을 왜 떠올리느냐 하면.
“청염단이라 했습니까.”
“···네.”
그만큼 청염단의 가치가 대단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나는 눈앞의 진희원에게 말했다.
“허면 저는 그 영초만 소저께 건네면, 바로 그 청염단이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건. 시간은 조금 걸려요. 약재를 찌고 말리고 하는 시간이 조금. 아니 많이 필요하거든요.”
“하긴. 말씀하신 청염단의 효능이라면 충분히···.”
“···저 그런데요. 실례가 아니라면 조금만 목소리를 작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갑작스런 진희원의 말.
고개가 갸웃했다.
진희원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청염단이란 단어요. 이거 사실 종남파 도사님들이 들으면 곤란할 수도 있거든요.”
“곤란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그러셨거든요. 사실 청염단은 종남파에 있을 적에 연구하던 영약이라고요. 그걸 아버지 나름대로 완성하신 거래요. 그래서 청염단이라고 하면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항상 조심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굳이 대회당 앞에서 이야기해도 될 것을 왜 사람들이 없는 은밀한 곳으로 끌고 와 이야기하나 싶었는데, 약간의 뒷이야기가 있나 보다.
“헌데 그럼 이름을 달리 부르면 되는 것이···.”
“아, 그건. 아버지께서 종남파에 대한 나름의 복수라고···.”
“음. 그렇군요.”
약왕이 종남파를 뛰쳐나갈 때, 마냥 좋은 감정으로 나간 건 아닌 모양.
하긴.
한 번 도문에 입적을 하면, 마음대로 속세로 나갈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뛰쳐나가 약을 연구했으니.
여러 갈등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도사들이 진희원의 존재를 아는 걸로 보아, 종종 왕래는 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썩 개운한 관계는 아니었으리라.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나는 품에서 일전에 구한, 사슴이 반쯤 먹다 남긴, 그래서 반쯤 선기가 빠져나간 영초를 꺼냈다.
물론 진희원은 선기가 빠져나갔으리란 걸 알지 못할 테다.
그녀도 이 영초에 대해 아버지께 설명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다고 했으니.
‘잠깐. 근데 그녀가 약왕의 딸이고. 이건 약왕의 보물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 또한 이 영초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던 걸 생각했을 때.
이건 어쩌면 약왕이 자식들에게 남긴 유품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뭐 이미 먹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생각해보니
약왕 또한 종남산에서 우연히 그곳을 발견하고 장보도로 만들어 남겼을 테다.
엄밀히 말하면 약왕 또한 이 영초의 주인이 아니란 뜻.
‘더욱이 백골의 정체가 진희원이라면, 내가 그녀의 생명을 구한 것과 다름이 없기도 하고.’
만약 약왕이 알았다면, 내게 백 번은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자그마치 딸의 생명의 은인 아닌가.
물론 전생의 일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었다.
직접 겪어본 것이 아니니, 그저 이런저런 추측만 할 뿐.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진희원 소저에게 약왕에 대해 차분히 물어봐도 좋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영초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잽싸게 영초를 챙기는 진희원.
이윽고 품에서 구암절초도 조심스레 꺼냈다.
그것 또한 진희원에게 건넸다.
이제 이건 청염단으로 탈피하여 돌아올 터.
괜스레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을 돌리는 내 옷자락을 집개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붙잡는 그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하실 말씀이 남은 겁니까.”
내게 받은 구암절초를 꾹 쥔 채 무언가 말하기를 주저하는 진희원.
‘설마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닐 테지?’
표정이 심각한 것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몸을 돌린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말했다.
“···저. 그리고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심 안 될까요?”
“부탁 말입니까.”
이거 상황이 꽤나 난감하게 됐다.
어찌 됐건, 나는 그녀를 믿고 기다렸다 영약을 받아야 하는 상황 아닌가.
방금 그녀의 입에서 나온 부탁이란 단어가 글자 그대로 부탁으로 들리진 않았다.
보다 더 구속력 있는 단어로 들렸다.
일단 짐짓 능청스러운 척 말했다.
“말씀해보시죠.”
그러자 주저주저하는 진희원.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부탁이길래.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절. 표사로 고용해주시면 안 될까요?”
“표사 말입니까.”
다만 그 내용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대뜸 표사라니?
물론 내 입장에선 비록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녀라곤 하나,
약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고.
청염단을 만드는 과정도 옆에서 감시 할 수 있을 테니.
나쁠 것 없었다.
또 약초 보는 눈도 있을 테니, 식재료 채집이나 요리에도 능할 터.
손재주도 좋을 테니, 이런저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했다.
그러니 오히려 두 팔 걷고 환영할 일이었다.
“네, 표사요.”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일단 이유는 알아야 할 터.
이후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는. 아버지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세상을 유람하면서 약에 대해 연구하고 싶거든요.”
“약에 대한 연구 말입니까.”
“아버지의 유지를 이으려면 그래야 하거든요. 근데 저는 아버지와는 달리 무림에 아는 사람들도 없고. 심지어 여자이기도 하고.”
꽤 합당한 이유였다.
표사만큼 세상 각지를 돌아다니는 무리도 없을 터.
하물며 아버지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라.
‘이정도면 충분히 표사로 받아줘도 괜찮겠는데?’
물론 그 전에, 한 가지 더 물어야 할 것이 있긴 했다.
“헌데. 그럼 종남파 도사님들과 함께 유람을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듯한 진희원.
순간 귓불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잠시 주저하길래 대답할 시간을 줬다.
이윽고 그녀의 대답이 이어졌다.
“···소령 언니도 그렇고. 표사님들도 그렇고. 끈끈해 보이더라고요.”
“네?”
무슨 말인가 조금 더 물으니.
“이번에 산으로 표두님 찾으러 갈 때요. 내심 감동했거든요.”
그녀의 입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소령과 표사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대회당의 도사들과 척을 졌던 것부터.
선기로 가득한 종남산을 올랐을 때도 지레 겁부터 먹은 도사들과 달리,
바람 앞에 등불이 될지언정 당당하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들이 있었다니.
내심 훈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잠시 그런 감정을 음미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함께 다니지요.”
그러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여정에서 얻은 건,
청염단뿐만이 아닌 것 같다고.
흐뭇한 기분으로 진희원과 표사 고용 계약서를 작성했다.
***
이후 상당히 분주히 시간을 보냈다.
진희원 말고도 이 몸을 찾는 사람이 두 명이나 더 있지 않았나.
우선 소령과 대화를 나눴고.
저녁쯤 종남파의 장문인을 찾아갔다.
종남파 수도전(修道殿).
방석 위에서 가만히 차를 음미하던 종남파 장문인 청공이 말했다.
“···그 술 표행. 추후 종남산을 다시 해금하면 그때 정식으로 계약하겠네.”
재경각주 청진이 제대로 보고를 한 모양.
내심 쾌재를 불렀다.
비록 청염단이란 목적을 위해, 떠올린 발상이었다곤 하나.
현재 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른 금화표국으로선, 이런 표행 하나하나가 큰 힘이 될 터.
‘종남파와 거래를 텄다는 게 알려지면, 우리를 다시 보는 상인들도 생겨날 테고.’
더욱이 이번 거래를 통해, 추후 다른 거래도 도모할 수 있을 터이니.
굉장한 성과라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표행 의뢰를 하나 맡기고 싶네.”
“표행 의뢰 말입니까.”
하물며 장문인 개인적으로 표행을 하나 맡기겠다고 한다.
종남파 장문인 청공이 이윽고 등 뒤의 도사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도사들이 낑낑거리며 관짝 같이 생긴 것들을 운반해 들어온다.
‘저게 뭐지?’
살짝 역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청공이 말했다.
“이번 습격에서 처리한 마교도들의 송장이네. 무림맹 섬서지부로 운반을 해줬으면 하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민간인을 납치한 이유를 밝혀야 할 터라 어쩔 수 없었네.”
민간인들의 생기를 빨아 목내이로 만든 사건 때문이라고 했다.
그 명확한 이유를 밝히기 위함이라고 했다.
‘일단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을 하는데···.’
생기를 이용해, 선기가 집중된 곳을 찾기 위함이지 않았나.
말을 해줘야 하나 했지만, 끝내 함구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선, 영초를 얻은 공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야 하는데.
그곳은···.
‘그런 곳은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게 맞지.’
하물며 설명을 하든, 안 하든, 이번 일로 인해 종남산에 대한 경계는 어차피 훨씬 더 철저해질 터.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여러모로 그랬다.
“알겠습니다. 그 표행 받겠습니다.”
무림맹 섬서지부는 어차피 본가로 귀환하는 길에 들러야 하는 곳.
이는 거의 거저먹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의뢰라 할 수 있었다.
“고맙네. 그리고 표행에 운공도 따라갈 거네.”
“운공 말입니까.”
“마교도들의 송장을 운반하는 일 아닌가. 혹여 습격이 있을지 모르니···.”
“그렇군요.”
운공 정도라면 뭐.
당연히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더 좋았다.
‘틈틈이 진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도 좋을 것 같고.’
이 또한 흔쾌히 받았다.
몇 마디 가벼운 덕담을 주고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리게.”
그때였다. 잠시 턱수염을 쓰다듬던 청공이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후 잠시 뜸을 들이며 변죽을 울리던 청공이 조심스런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 시비라는 아이 말이네.”
“소령 말씀이십니까?”
소령에 대해 하고픈 말이 있는 모양.
“하오문의 간부들이 쓸 법한 추적술을 익히고 있더군.”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맨 처음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눈치 채고 있지 않았나.
하물며 방금 청공을 보러 오기 전. 소령이 내게 건넨 이야기도 있고···.
‘본가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얽혀 있는 사정을 전부 이야기해준다고 했지?’
그 이후, 본인을 내치든 말든 결정해달라고 했다.
그때 눈망울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물론 당장의 생각으론 내칠 마음이 없었다.
그녀의 진심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는가. 이전부터 느꼈던 것도 있고.
이번에 주변을 통해 이래저래 소령이 나에 대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도 듣지 않았나.
하물며 본인의 정체를 밝힌 까닭도 이 몸을 위해서이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다만 그 사정이란 것이 정말 충격적인 것일 수도 있으니.
내심 신경은 쓰고 있을 생각이었다.
나는 청공에게 말했다.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는 청공.
이윽고 내가 그에게 말했다.
“소령은 제 사람입니다.”
단호히 말하고 수도전을 나왔다.
문득 고개를 드니,
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좋네.’
높은 곳에 오른 까닭에 특히나 더 그런 것 같았다.
그 별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산을 오르기 전보다, 모여 있는 별들의 수가 많아졌으니.
그들 또한 외롭지 않을 것 같다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종남산을 내려왔다.
그로부터 대략 사나흘쯤 지났을까.
우리 표행단은 어느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섬서성의 칠리하촌.
“표두님, 오늘 밤은 마을에서 쉬는 겁니까.”
장표사라는 표사였다.
그가 은근한 어조로 물어왔다.
이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운공이 옆으로 따라붙으며 입꼬리를 쓰윽 말아 올렸다.
“금형, 잘 생각했네. 사람이 맨날 노숙만 하면 쓰나. 술도 슬슬 떨어져가고.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마을에서 묵자고.”
그에게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이곳의 대부분은 소속이 표국인 까닭에 노숙에 익숙했지만.
운공은 듣고 보니, 종남파를 떠난 적이 거의 없다는 것 같았다.
마차 안에서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진희원도 내심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노숙과는 별개로 여전히 탈것에 의한 어지럼증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뭐 물론 그녀 또한 충분히 제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인물이니.
알아서 잘 극복하기를 바랄뿐이었다.
실제로도 어지럼증을 극복하는 탕약을 연구하는 중이라고도 했고.
어쨌든 나는 그런 일행을 일별하고 조금 말을 빨리 몰았다.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마을을 둘러봤다.
사실 일행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들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기억이랑 똑같네.’
이번 표행이 섬서로 향한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부터.
내심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음양굴(陰陽窟)은 어떻게 되었을까.’
음양굴이란 이름의 매음굴.
전생의 이 몸이 뇌옥에 납치당하기 전까지 살던 매음굴이었다.
그러니 이곳 칠리하촌은 전생의 이 몸이 살던 마을.
말을 몰아 한 객잔 앞에 도착했다.
돈두객잔(豚頭客棧).
오늘은 이곳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표사들에게도 이리로 오라고 일러두었다.
참고로 이곳은 전생에 매음굴 주인의 심부름 때문에 꽤 자주 들렀던 곳이기도 했다.
기분이 심란했다.
객잔의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끼이익-
이윽고 천천히 문을 열었고.
“어서 오십쇼! 몇 분이신가요?”
익숙한 얼굴의 점소이가 물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기억의 폭풍이 머릿속에 몰아쳤다.
잠시 눈을 감고.
아득하니 폭풍 속에 몸을 맡겼다.
그러곤 머지않아, 번쩍 눈을 떴다.
형형한 안광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일행은 객잔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말을 빠르게 몰아온 까닭에 이 몸만 먼저 들어온 상황.
점소이에게 정보료로 약간의 돈을 쥐어주며 물었다.
“혹시 음양굴(陰陽窟)이라고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