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보답(2)
14화. 보답(2)
청진의 품에서 나온 건 한 가닥 꽃줄기였다.
‘이게 뭐지?’
일단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상당히 억세 보이는 푸른 줄기 위에, 하얗고 노란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벌집처럼 생긴 노란 통꽃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눈처럼 새하얀 꽃잎들이 빼곡하게 돋아있는 모양새였다.
“이건, 구암절초(九巖節草)가 아닙니까?”
꽃의 정체를 확인한 운공의 말이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청진과 내 손에 들린 꽃줄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어지간히도 귀한 물건인 모양인데?’
받아든 영초를 조심스레 품으로 가져왔다.
‘구암절초라.’
이윽고 고개를 돌려 운공을 봤다.
“구암절초가 무언가?”
척 보기에도 상당히 귀한 물건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정확한 용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백 년 동안 선기를 머금은 구절초이네.”
종남산에서만 나는 구절초로 칠보독사가 머무는 바위 아래에서 채취할 수 있는 귀한 영초라고 했다.
“귀한 영초?”
청진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운공이 말했다.
“워낙 구하기가 힘들어 예로부터 외인에겐 쉬이 내놓지 않는 물건이지. 나도 그림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이에 나는 입가에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이후 예의상 이런 건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척을 했다.
“···내 성의니 꼭 받아주게.”
청진은 역시 자신이 사람을 잘 봤다며 거절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들에게 진희원은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쨌든 영초라는 건, 영약과 비슷한 것이란 말이겠지.’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애초에 이곳으로 온 것도 청염단이란 ‘영약’을 얻기 위함이었지 않는가.
내가 그윽한 눈빛으로 구암절초를 바라보자, 이윽고 운공의 말이 이어졌다.
“그냥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걸세.”
“십 년이나?”
물론 청염단보단 한참은 부족한 영약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시할 것도 아니었다.
십 년의 공력이라 함은 일반적인 내공심법을 가지고 십 년 동안 부지런히 운기를 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
이 몸처럼 무학에 입문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에겐, 천금보다 귀한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절로 군침이 넘어갔다.
‘이것만 먹어도 멸화응취는 사용할 수 있으려나?’
아수라파천권 1초식 멸화응취(滅火凝聚).
흡수율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당장에라도 삼키고 싶었지만, 애써 욕망을 억눌렀다.
대신 운공을 향해 물었다.
“헌데 그냥 복용을 하는 것만으로도 십 년의 영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따로 복용법이 있다는 말인가?”
분명 운공이 그리 말하지 않았나.
이에 운공은 머쓱하니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금형은 눈치가 귀신 같구만.”
그러더니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청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제대로 맥을 짚었구나 싶었다.
근데 대체 이게 뭐길래 저렇게 조심스러운 것일까.
그때 옆에 있던 진희원이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복용하는 방법에 따라 내공 외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는 영초예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그녀도 옆에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약왕의 자제.
헌데 구암절초를 보는 그녀의 반응은 운공보다 한 수 위였다.
얼굴이 하얗게 뜬 것도 모자라, 마치 연인을 만난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이윽고 그녀에게 물었다.
“소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희원.
이어진 진희원의 말은 이랬다.
구암절초는 본디 지닌 영력이 상당히 냉(冷)하고 정순하여, 양기(陽氣)를 머금은 약재와 조합을 할 경우, 상당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귀물이다.
어떤 약재와 함께 복용하느냐에 따라, 상승작용의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하여 종남파에선 귀한 영약을 만들 때 꼭 구암절초를 넣는다고 한다.
‘역시 당장 안 먹길 잘했네.’
그녀의 말에 운공이 적잖이 놀란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아마 정확한 정보일 것이다.
운공이 조심스러웠던 건 아마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종남파의 영약에 들어가는 재료이기 때문.
그때였다.
“···사실 제가 그거 때문에 종남산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거든요.”
문득 진희원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게 무슨···.”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물론 그거 말고도 몇 개가 더 필요하긴 한데···.”
그녀는 이윽고 청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꼭 왜 자신에겐 안 주는지 묻는 것도 같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그녀는 아차 싶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본인의 정체와 본인이 이곳에 온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동생을 맡김과 동시에 종남산에서 영초들을 구하기 위함이라.’
사실 굳이 그녀가 내게 이러한 것들을 설명해줄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일종의 부채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장문인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중이에요.”
“장문인 말씀이십니까?”
“종남파 도사님들은 종남산에 들어가려면, 장문인의 허락이 있어야 한대요.”
일종의 수도(修道)의 일환이라는 것 같았다.
종남파 도사들의 경우,
너무 자주 산의 심처에 들어가면,
본인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선기(仙氣)가 몸에 쌓여 자칫 단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나.
하여 종남산에 외부인이 몰래 침입을 했다거나.
전쟁과 같은 비상상황이 아니면, 종남파의 도사들은 함부로 진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종남파 도사들에 한한 이야기였다.
나는 진희원에게 물었다.
“하지만 진희원 소저는 종남파의 도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재경각에서 발급하는 출입증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지요.”
“그건 그렇지만.”
듣기론 영초들이 자라는 심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진법이 워낙 많아, 진희원처럼 무공도 익히지 않은 사람은 절대 혼자 들어가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장문인의 허락을 구해, 진법에 능한 종남파 도사님들과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때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잠깐. 그럼 운공은 뭐지?’
분명 아까 지도 비무에서 이 몸이 이기면 종남산 안으로 데려가 주기로 하지 않았나.
어쩌면 애초에 자신이 질 것이란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내건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깊숙한 곳은 데려가지 않으려 했다거나.
뭐 실제로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이고. 당장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이후 대화는 순조로웠다.
내가 제시했던 술을 들이는 문제도 술술술 얘기할 수 있었다.
청진이 말했다.
“자네가 제안한 술을 경내로 들이는 일도 전향적으로 검토해보겠네. 다만 워낙 중한 일이니 장문인께도 상의를 드려야 할 터.”
시간이 조금 필요하단 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분위기를 보면, 십중팔구 통과될 것 같지?’
특별한 변수만 없다면 분명 그럴 테다.
대화를 마치고 접객당을 나왔다.
상당히 유익한 대화였다 하겠다.
***
누군가 시간은 흐르는 강물 같다고 했던가.
여기선 꼭 흘러가는 구름과 같더라.
“공자님, 벌써 보름이나 흘렀네요.”
“그러게.”
흘러가는 줄도 몰랐는데, 벌써 훌쩍 흘러가 있었다.
나는 장문인이 돌아올 때까지 종남파 경내에 머무르기로 했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청진도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고.
다만
‘대체 장문인은 언제 돌아오시는 것인지.’
장문인의 소식이 감감무소식이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괜히 몸이 달았다.
사실 청염단의 존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이 몸밖엔 모르는 것일 테지만.
왜 싸한 느낌 있지 않은가.
그런 느낌이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교도 움직이고 있고.’
전생엔 이맘때 어땠는지 모른다. 약왕에 대한 정보는 들은 것이 없었기 때문.
다만 수 년 후, 강불해가 별안간 이곳에 왔을 것 같진 않았다.
아마 이때부터 차근차근 정보를 모았던 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당장 종남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노릇.
대신 조만간 다가올 그날을 위해, 나름대로 칼을 갈았다.
종남파의 객당 뒷마당.
“표두님, 정말 저희 10명이서 한 번에 공격을 해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반격도 안 하시고 피하시기만 하실 거라고요?”
“이걸 지도 비무라고 하더군.”
표사들과 몸을 부딪치며, 종남신성 운공과의 지도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간 것이다.
그때 운공이 그러지 않았나.
산세가 굉장히 험하다고.
보법과 경신법의 수준이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안전할 것이라고.
‘익혀두면 겸사겸사 좋겠지.’
다가오는 표사들의 칼을 유려하게 피해냈다.
슉- 슉!
참고로 운공에게 보법의 이름을 물어보니, 잠영보라 하더라.
경신법의 이름은 진천공이고.
그걸 나름대로 변형시켰다.
‘이러면 아수라파천권과도 잘 어울릴 거야.’
전체적으로 패도적인 느낌을 가미했다.
물론 이로 인해, 금귀수나 금귀검법도 훨씬 더 단단해졌다.
이윽고 내 현묘한 발놀림에 표사들이 맥을 못 추고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어? 어!”
“으악! 내 발이 왜 이러지?”
“표두님, 꼭 허깨비 같습니다!”
보법을 밟으며 중간 중간 기세를 흘려보내, 다리를 꼬이게 만든 것이다.
‘예상대로야.’
어쩌면 예전에 얼핏 강불해에게 들었던,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의 원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또한 공방일체의 보법이라 들었다.
사실 천마신공의 내공심법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다 보니, 점점 그쪽을 의식하게 된 감도 없지 않았다.
'이것도 천마신공의 마기만 적절히 숨기면, 실전에서 하등 사용하는데 문제 없을 거야.'
어쨌든 아직 이름은 정하지 못했지만, 이제 정말 조금만 더 하면 나름의 보법이 완성이 될 터.
이 밖에 남는 시간엔 종남산 심처로 들어가는 출입문 근처를 기웃거렸다.
뿌연 안개로 가득한 그곳.
당장 들어갈 순 없어도 멀리서나마 눈으로 보고 계획을 세운 것이다.
***
종남산 심처로 가는 출입문 앞.
“진희원 소저, 또 뵙는구려.”
사실 몸이 달아 보이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진희원도 마찬가지.
종종 그곳에서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참고로 구암절초는 추후에 진희원이 영약으로 조제해주겠다고 했다.
일전에 표행비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나.
‘내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이지.’
나는 당연히 흔쾌히 수락했다.
추후에 다른 재료도 모이면 함께 건네주기로 했다.
그리고
“금형, 또 여기 있었군.”
오늘은 운공도 마주할 수 있었다.
“자네는 수련 같은 건 안 하나?”
“다 알아서 하고 있네.”
헌데 오늘은 운공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무슨 일 있나?”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고.
나와 진희원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종남산 인근에서 마교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내 입장에선 마교의 등장은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일이긴 했다.
더욱이 전생에 강불해와 나눴던 이야기들로 말미암아, 오늘 종남파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란 것도 알았다.
그때 분명 종남파의 이목을 속여가며 영약을 찾느라, 꽤 애를 먹었다고 했었으니.
만약 오늘 종남파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테다.
“···금형, 그래서 말인데. 혹시 도움을 좀 줄 수 있겠나?”
“도움?”
“그 정말 미안한 말이네만.”
대체 얼마나 심각한 부탁이길래 이처럼 주저하는지.
“우리 사이에 뭘 저어하나. 어서 말해보게.”
망설이던 운공이 말했다.
"같이 종남산 안을 수색해줬으면 하네."
“···.”
"미안하네."
종남산 안을 수색한다라.
"흠흠. 그럼 어쩔 수 없군."
나는 애써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